문재인 정부의 조각에 말도 많다. 코드 인사니, 보은 인사니 하면서 여. 야간 공방이 치열하다. 호. 불호를 떠나, 나는 그런 것에 별 관심없다. 정치적 무관심도 좀 있겠지만, 원래 정치는 그렇고 그런 것이고, 그런 것인 만큼 끼리 끼리 나눠먹는 걸로 치부하고 그러려니 하며 지켜보면 된다. 시끄럽지만, 권력 가진 사람들의 의중대로 돼 가는 게 정치다. 특히 한국 정치에서는 그렇다.
나는 그것보다는 후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나름 재미를 갖는다. 보학에는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내로라하는 집안에 대한 얘기는 좀 알고 있기에 그렇다. 안 경환 법무장관 후보자의 경우도 재미있는 집안이다. 안 후보자는 주지하다시피 근엄한(?) 법학자다. 밀양에서 태어나 부산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이 양반은 대학 들어가 공부는 별로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대신 잘 놀았다. 그래서 사법고시에 떨어졌다는 말은 하고싶지 않다. 사법고시는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 양반은 딱딱한 법률 공부대신 문학을 즐겨하면서 자유분방한 대학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모의 모 방송국 아나운서와의 진한 사랑 얘기도 전해지지만,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법학자로서, 또 인권론자로서 안 후보자는 잘 알려진 명사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안 후보자의 지금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 그의 어머니는 조세핀 조라는 디자이너로, 지금 나이 지긋한 분들 가운데 알만한 분들은 알 것이다. 지금은 패션 디자이너라고 하지만, 6, 70년대는 복식 디자이너라고 불렀는데, 그 시대를 풍미한 당대의 복식 디자이너였다. 안 후보자가 조세핀 조의 몇 째 아들인지는 모르겠다. 알기로 조세핀 조는 슬하에 13명의 자식을 두었다는데, 지금 안 후보가 68세니까 아마도 장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확인해 본 것은 아니다.
조세핀 조는 우리나라의 6, 70년대 패션계를 대표한 인물이다. 그 무렵의 신문을 보면 매년 ‘조세핀 조 의상발표회’가 열렸다는 기사가 무슨 연례행사처럼 실리고 있다. 조세핀 조는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높던 디자이너였다. 1967년에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당과의 교분에 관한 기사도 나온다. 1967년 11월 경향신문의 기사는 조세핀 조가 프랑스 빠리를 방문한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조세핀 조가 가르당과 만나 환담하는 사신도 실려있다. 안 후보자의 자유분방한 사고는 이런 어미니의 유전자에서 기인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런 어머니 외에 안 후보자의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궁금한데,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의 유명세에 가려진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지만, 안 후보자가 정식으로 장관이 되면 알게될 지 모르겠다.
오늘 조세핀 조에 관한 기사를 검색해보다가 우연히 그녀의 글 한 편을 찾았다. 1972년 중앙일보에 게재한 에세이 한 편인데, 글도 잘 쓴다. 그 글과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기량과 명성을 감안할 때, 그녀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다양한 재주를 지녔던, 그 시대로서는 ‘선진화된 여성’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마산여고를 나왔다는 것이다. 마산 인근 함안에서 북마산으로 와 마산여고를 다녔다고 적고 있는데, 글에서는 마산을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글 속에 마산여고도 나오고 가포해수욕장도 나오고 무학산 봉우리에 핀 비비추 꽃도 나온다. 100년을 훨씬 넘긴 마산여고의 ‘학교 꽃(교화)’가 바로 비비추이니, 그 연유가 어느 정도 읽혀진다. 글 전문을 게재해 본다.
(2) 마산|조세핀 조 <디자이너>
- 태어난 곳을 고향으로 한다면 마산은 내 고향은 아니다. 하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생생한 소녀기를 나는 마산에서 살았다.
한마리 바닷고기처럼 인광 (비늘 빛)이 반짝이는 내 소녀기가 그 곳에서는 늘 살아 있다. 그러니까 난 마산이 고향임을 사영하지 않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남들도 내 고향이 마산임을 인정하기에 인색하지 않다.
무학산 봉우리엔 「비비추」 방울꽃이…|소녀 때 기억 생생…그 꼬시래기 회 맛
작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렇게도 도도한 도시. 그 같잖도록 오만함을 나는 사랑한다.
사랑 받을 곳을 스스로 많이 지니고 있어서 그럴 자격이 있는 항구 마을이다.
북 마산. 여기가 경상도 함안이란 시골서 유학간 우리 여러 남매가 살던 동네다. 이를테면 우거인촌이다.
신 마산. 남단의 이 작은 항구는 젊은 과부가 보쌈에 개가하듯 검탈 당한 부위를 지니고 있다.
소위 「사꾸라마찌」라 하는 앵촌이 있는 신 마산의 일본인 촌이 바로 거기. 마산이 새침한 것은 이 거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동동이 있는 구 마산. 토박이들 사는 곳이다.
경전 남부선을 타면 이렇게 세개의 역을 거쳐서 진주로 가게 된다.
팔딱팔딱 뛰노는 한마리 불고기의 생명감을 아직도 느낄 수 있게 하는 내 소녀기가 이곳 어딘가에 지금도 묻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앞 바다 합포만 속에 누워 있는 돛 섬은 그때는 모양이 고래처럼 생겨 『고래 섬』이라고 불렀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여길 친구들과 놀러 갔다가 얼마나 혼이 났던지. 비극스러워서 꼭 죽을 것 같은 그 기억이 성장 후에 이토록 짜릿한 것으로 남을 수 있으리라고 미처 생각도 못했었다.
무학산 높은 봉우리 위의 『비비추』 방울꽃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산을 고향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이런 기분도 있다. 가포 해수욕장은 일정 때 이름이 「지바무라」(천엽촌)였다. 일본 선생과 학생이 대부분이던 마산 여고에서는 1학년 여름방학부터 이곳서 수영을 가르쳤다. 「펍슬립」의 작은 소매가 달린 「스위밍·원피스」를 보고 『해괴함』을 참을 수 없었던 어머니께서는 기어이 거기다 치마를 달아야 한다고 하셨다. 밤을 새워 「스프릴」처럼 달았던 오버커트는「지리멩」이 었지, 아마….
오늘의 직업이 예시됐던지 지금 한창인 복고조의 낭만 풍이니 하는 것과 생각해 보면 정말 『왔다!』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나마 해수욕은 그 여름 그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진정이지 그것만은 안되겠다고 영 안 보내주신 부모님 덕에 난 결국 맥줏병이 돼 버렸다. 그러나 언제나 여름이 오면 그때 천엽촌 해수욕장을 생각하면 추억에 밀려 더위가 가셔지는 듯 하기도 한다.
하얀 「꼬시래기」 고기가 모여드는 봉암·낙동강 지류와 마산만의 분기점인 이곳은 독특하고 맛 나는 꼬시래기 회가 일품이다.
그리고 어 시장. 일제 때 이곳에서는 대구 생선을-사람 당-한마리씩만 팔았다. 「마꼬」 담배 사듯 새벽이면 온 식구가 있는대로 나가서 대구 사기 줄을 서야 했다. 그 괘씸한 일도 지금은 추억이 됐다.
항구가 얕아 발전이 늦다지만, 그래서 새침한 맛이 나는 마산의 내 애틋한 추억을 나는 즐긴다.
김수남
2017년 6월 16일 at 12:40 오후
아.네.그렇군요.저는 처음 듣는 분이신데 그런 멋이 계신 디자이너셨군요.무엇보다 13남매를 두셨다니 그저 감동이고 존경이 저절로 됩니다.좋은 소식으로 잘 이어지면 좋겠습니다.마산에 관련된 것은 특히 늘 반갑게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저도 저의 고향 안동 이야기를 맛깔나게 써 봐야겠습니다.추억도 많고 쓸 이야기들도 가득 있는데 조금씩 정말 풀어 봐야겠다 싶습니다.
안경환후보자님 성함도 저는 사실 오늘 처음 선생님 덕분에 알았습니다.
koyang4283
2017년 6월 16일 at 12:40 오후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 분은 법무장관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더 이상 끄슬리지 말고 그냥 사퇴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안동이 고향이라 하셨는데, 남기고 싶은 얘기들이 많을 겁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김수남
2017년 6월 16일 at 12:46 오후
댓글 쓴 후 지금 조선일보 인터넷 기사에 들어가보니 머릿 기사에 올라와 계신 분이시네요.자세히 읽어 보진 못했지만 실망스런 부분이 보이긴하네요.정치에 대해선 잘 모르기에 더 이상은 말씀을 안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