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날 바짝 덥다. 그렇게 심하게 더위를 타지 않는 체질인데, 요 며칠 간은 견디기가 정말 쉽지 않다. 밖으로 나가면 어떨까 싶어 나가보지만, 그 또한 별 수가 없다. 냉방이 잘 된, 이를테면 전철이라든가 은행 등도 있을 때 그 때 뿐이다. 더위를 피한다고 하루 종일을 전철을 타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은행 또한 별 볼 일도 없는데 죽칠 수야 없지 않은가.
장마 비가 내리니 그나마 좀 낮다. 장대 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는 바라만 보아도 시원하다. 하지만 그것도 그 때 뿐이다. 그에 따르는 뒤치다꺼리가 문제다. 온 집안을 눅눅하게 만드는 습기는 몸과 정신마저 축축하게 만든다. 쉽게 짜증이 난다. 나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다. 서로들 신경 곤두서이지 않게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찜통 같은 날씨에 웬 종일 비가 내리니, 매사가 귀찮다. 귀찮아지는 것 중에 먹는 것도 포함된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지만 더위는 그런 본능마저 마비시키는 것 같다. 어쩌다 먹게 되는 것은 정말로 배가 고파져 먹지 않고서는 못 배길 때다. 먹는 것도 대충이다. 나는 이번 여름처럼 콩국수를 많이 먹은 적이 없다. 콩국수 다음은 우무가사리다. 이 둘에는 콩국물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더워도 하루걸러 능곡시장엘 갔다 오는 것은 순전히 콩국물 때문이다. 다른 재료는 필요 없다. 오이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다. 있으면 오이 좀 채 썰고 소금 좀 타면 한 끼 뚝딱이다.
집에서는 거의 맨몸이다 한 상태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런 몰골로 둘이 콩국수를 말아 훌훌 먹는 게 이즈음 끼니를 때워가는 아내와 나의 모습이다. 그 자리를 비껴나 제 삼자의 처지에서 그런 모습을 봤으면 참 가관일 것이다.
이런 와중에 집에 물난리쯤으로 여길만한 일이 생기면 짜증도 짜증이지만, 거의 졸도 직전까지 갈 것이다. 다행히 물난리 직전에 그쳤는데, 아직도 마음 놓을 상황은 아니다. 그 때가 장마철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몇 년 전인가 경주에 큰 지진이 일어난 후에 아이 방 바닥에서 물이 솟아오른 적이 있었다. 한 몇 시간 적지 않은 물이 솟아올라 난리를 피웠는데, 그저께 장마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다시 방바닥에 물이 솟아오른 것이다.
어떻게 대처할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그저 수건과 신문지로 덮었다. 다행히 그 후 더 이상의 물은 올라오지 않고 있지만,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아파트 11층 방바닥에 물이 솟아오른다면, 전문기술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디서 뭐가 잘못된 것인지 도무지 가늠할 길이 없지 않은가. 장마 비가 그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요행만 바랄 뿐이다.
후텁지근한 장마가 끝나면 또 땡볕 더위가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윽고 초가을로 접어들 것이다. 이렇게 변하는 절기의 순리를 나는 정말 고마워한다. 아무리 지금이 덥고 갑갑해 속이 터질 것 같아도, 곧 오고 맞게 될 초가을 소슬바람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이다. 그런 기대와 희망으로 올 여름을 버텼다. 빨리 오라고 서두를 필요도 없다. 그저 기다리면 될 것이니까. 절기의 변화는 그런 것이다. 인간사와는 다르다. 고초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감내해 기다리면 된다. 그게 절기의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