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외할머니 곁을 지키다시피 했다. 혹여 나 혼자만을 두고 가실까하는 조바심 때문에서다. 대구 외갓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마산 집에 온지 이틀도 채 안 됐다. 대구에서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나를 낳자마자 나를 두고 마산으로 떠났다. 아버지 직장 때문이다.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됐으니 마산 집으로 와야 했다. 할머니는 정이든 나를 떠나보내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대구에서 입학시키자고 했다. 부모님이 반대했다. 할머니도 그렇지만, 할머니만 따르는 내가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이러다 장남 잃어버릴까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할머니와 마산엘 온 것이다. 목적은 나를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한 것이다. 나는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던 모양이다. 나에게는 학교고 뭐고 없었다. 어린 마음에 할머니만 있었고, 할머니가 전부였다. 할머니는 결국 나더러 마산 놀러가자면서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가을 저녁이었다. 바람이 유난히 불었다. 소슬바람이 아니었다. 얼기설기 엮어놓은 집 판자문 사이로 숭숭 들어 와 한기를 더하는 센 바람이었다. 내일이면 할머니와 대구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어머니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부엌에 연이어 있는 안 방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쌀쌀한 가을 저녁의 그 풍경이 선연히 기억되는 것은, 할머니가 그날 저녁 나를 부둥켜 앉고 울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나를 안고 운다? 그런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할머니는 저녁 끼니 무렵이면 가끔씩 소주를 한 잔씩 드셨다. 몇 잔도 아니고 딱 한 잔이다. 그래서 대구 외갓집 부뚜막 위 찬장 한 구석엔 막소주 병이 있었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우리 집 부엌에서 소주 한 잔을 마셨다. 한 잔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한 따까리다. 할머니 술잔은 항상 밥뚜껑이다. 부엌 부뚜막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드시는 한 따까리 소주였다.
마산 집이 어색한 만큼이나 나에게는 집이 있는 동네도 낯선 곳이었다. 할머니가 어머니와 함께 부엌에 있는 걸 보고 나는 동네 구경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 집에 온지 이틀 동안 나는 한 번도 밖에 나오질 않았다. 할머니 곁에 떨어지지 있었다. 할머니가 나만 두고 떠날 것 같은 생각은 집에 있는 내내 계속 따라다녔다. 그런데 어머니와 함께 있는 정황이 나를 안심시켰던 것 같고, 그래서 동네로 나온 것이다. 집 아래로 선창이다. 바람은 선창가 쪽에서 불어왔다. 갯내음이 묻어나는 바다 바람이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선창가 쪽으로 맞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데, 한 길가 오른 쪽 골목길에서 어떤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린 마음에도 가을의 정감을 느끼게 하는 추정(秋情)이 있었던가. 그 노래에 마음이 이끌렸다. 노래가 나오는 골목길로 접어들었더니, 노란 백열등 불빛의 창문이 보였고, 노래는 창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슬프게 들리는 노래였다. 갑자기 슬퍼졌다. 아무리 할머니가 좋다지만, 그래도 집이고 부모님인데 왜 나는? 이란 생각이 그 노래와 맞아졌던 모양이다. 창 아래에 서서 한참을 들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그 노래가 ‘동무생각’이라는 것은 나중에 커서야 알았다.
울적한 마음은 바다와 선창을 한 바퀴 돌고난 후에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내가 나갈 때 그 모습이 아니다. 부뚜막 앞에 어머니와 함께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부뚜막 위에 소주병이 있고 밥뚜껑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의 얼굴이 복닦해 보였다. 소주 한 따까리에 취기가 오른 모양이다. 내가 들어가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나누던 말을 갑자기 끊는다. 어린 느낌에도 그랬다. 뭔가 나에 관한 말을 나눈 모양이다. 나는 괜히 서있기도 뭐 해서 할머니 곁에 쪼그려 앉았다. 그런 나를 할머니가 빤히 쳐다본다. “아이고 우리 철이, 빨리 커야 할 낀데, 언제 빨리 클꼬. 학교도 들어가고 해야 하는데 언제나 빨리 클꼬.” 할머니의 말이 신음처럼 들리면서 나는 할머니의 품에 안겼다. 할머니는 당신의 얼굴을 내 얼굴에 포갠다. 할머니에게서 달콤한 단감 맛이 났다. 할머니의 술 냄새다. 할머니는 연신 그 말을 되풀이한다. 결국 그 말은 울음으로 변했다. “아이고 우리 철이를 우짤고…” 나는 그런 할머니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디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꿈을 꾸었다. 집 부뚜막 쪼그려 앉아 있다. 할머니가 옷을 차려입고 마루를 내려오고 있었다. 어딘가 가시려는 채비다. 나는 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바늘이고. 바늘 가는데 실이 따라 가야하는 것 아닌가. 당연히 나도 할머니를 따라 갈 요량으로 일어섰다. 할머니는 판자문을 열어 나가도 있었다. 그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방에서 나왔다. 할머니는 따라가려는 나를 붙잡았다. 아무리 벗어나려 용을 썼지만 도무지 힘이 써지지가 않았다.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섯 살이다. 나는 여섯 살의 아이다. 써지지 않는 힘이 안타까웠고, 할머니가 나를 두고 혼자 가는 게 억울하고 분통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할머니가 없었다. 분명히 내 곁에서 나를 재우고 주무신 할머니가 잠자리에 없었다. 그 꿈이 생각났다. 또렷했다. 그 꿈 때문에 가위에 눌려 눈을 떴으니.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밖은 어두운 새벽이었다. 할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방 밖으로 나왔다. 혹여 할머니가 부엌에 혼자 있을지도 모를 것이라는 희망도 물거품이었다. 할머니는 사라진 것이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설마설마 했던 우려가 현실로 돼가고 있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나를 두고 혼자서 대구로 떠나려하는 것이다. 그러면 할머니는 아마도 대구 가는 첫 버스를 타려 정류소에 있을지 모른다. 정류소는 집 위 도로를 가로질러 불종거리 못미처에 있었다. 그 쪽을 보았더니 어둠 속에서 버스 비슷한 차가 한 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차를 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거기까지를 달리기 시작했다. 빤히 보이는 버스가 어둠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그러더니 버스는 속도를 내면서 정류소를 떠나간다. 할머니는 버스 안에서 나의 달려오는 모습을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운전기사더러 빨리 출발하자고 채근했을 것이다. 할머니를 실은 버스는 점차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나의 시야에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울 힘도 없이 나는 무력했다.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해 가을의 그 날 할머니와의 그 이별은 나에게 안타까운 가르침을 안겼다. 사람은 만나면서도 헤어지게 되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유년의 그 가을을 잊을 수가 없다.
할머니가 세상을 뜨신 때는 늦가을 때다. 돌아가시면서 할머니의 뜻이 그렇다고 했다. 화장을 해 당신이 다니던 부산의 한 암자 뒤뜰에 뿌려달라는. 그 뜻을 전하는 외삼촌이 의심스럽고 원망스러웠다. 결국 할머니는 그런 모습으로 세상을 뜨셨다. 유난히 메마르고 을씨년스럽던 가을 날 오후, 할머니의 유품을 불 살을 때 나는 그 잔불 속을 걸어 들어갔다. 할머니의 흰 고무신이 눈에 밟혔고, 그래서 그 고무신을 챙겨들고 나왔다. 고무신을 안고 울었다. “아이고 우리 철이 빨리 커야 할 낀데…” 할머니의 입김이 나를 감쌌다. 단감 맛의 할머니 술 냄새도 났다.
할머니의 이 말씀은 내가 커가는 고비 고비마다에 이어졌다. 고등학교를 들어갔더니,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사셔야겠다고 했고, 대학에 들어가니 결혼까지 이어졌다. 어차피 거기까지가 끝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결혼까지 보셨다. 결혼까지 보셨으니 나로서는 무슨 더 클 일이 있을까. 이제 육십을 훨씬 넘긴 나이에 새삼 할머니가 그리워지는 것은 그래도 다시금 그 말이 듣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라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이리저리 살기도 팍팍한 날들이니 이런 말씀을 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고 우리 철이, 인자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어여 빨리 내 곁으로 오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