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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 꽃이 활짝 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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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 꽃이 활짝 피었어요.

산책길에서 보니 밤나무가 꽃이 활짝피었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단오날을 즐기시던 생각을 하였다.

그러니까 6.25전쟁이 끝나고 쯤인데 그때는 단오가 일년 중 여자들이 하루를 즐길수 있는 날이었다. 동내 남정내들은 단오 전날 짚으로 그네 줄을 매어 줄려고 어른 팔뚝만큼 굵은 그네 줄을 만들었다 물론 여럿이 모여서 짚도 품질이 좋은 것을 몇 짐을 지게에 지고와서 정성껏 비틀어 꼬아서 만들어 뒷산 오래 묵은 밤나무 튼실한 가지에 높게 그네를 맨다.

부실하면 사랑스런 자기아내를 비롯한 연인들이 떨어져서 다칠수도 있기에 정성을 들여서 끊어지지나 않을까, 또 다른 인근 나무에 닿지나 않을까, 그네를 맨 가지가 부러지지나 않을까 등등 염려하며 정성스럽게 매어 검증까지 꼼꼼히 해서 마친다.

다음날 단오날에는 그네에 동네 젊은 여인들 누구나 와서 하루를 마음껏 즐겁게 노는 날이다. 그날은 시부모님 식사걱정도 어린것들도 할머니가 아니면 남편이 봐주며 하루를 즐겁게 쉬게 하였다.

어머니는 일찍이 창피라는 풀이 있는데 그것을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농안에 간직해두었던 새옷을 꺼내어 입으시고 향기가 좋은 청궁이라는 약초한가지를 꺾어서 옷고름에 꽂아서 들뜻 기분으로 나가시면 나도 엄마따라 가서 하루종일 졸졸 따라다녔다. 100여호 거의가 우리성이여서 서로가 아지매 할매 동생 등 친척들이었다.

밤나무 밑에는 벌써 많은 어머니와 머리를 길게 땋은 누나들이 와서 재잘거리며 즐기고 있었다. 하루 동안 그 밤나무는 수없이 타는 그네로 피곤하게 지탱해주어야 했다. 그때들은 말인데 그래야만 정받이가 잘되어 튼실한 밤이 많이 열린다고 하였고, 약간은 비릿한 밤꽃향기가 건강한 한창 나이의 남정내 냄세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그후 어른이 되어 그 말뜻을 알았다.

왜 하필 매년 밤나무에 그네를 매었느지 그당시는 무심코 지났으나 그후 장성하여서야 그뜻을 알았고 그 향기를 맡으며 곱게 입은 한복들 긴 치마가 공중으로 몸이 날라 올라갈때 바람에 몸을 감싸고 나부끼는 모습은 어린 마음으로 보아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런 밤나무와 고생스럽게 살았는 우리 어머니대의 아련한 사연들이 있는 5월의 밤나무 꽃이 활짝피어 아름답게 보이는 밤나무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언제 있기나했나다 조금은 안타깝고 서운하기도 하다.

밤은 땅속에 밤알을 심으면 다른 식물과 달리, 싹이나는 것과 동시에 뿌리가 나와서 그것으로 영양 섭취를해서 자라고 밤알은 그대로 남아서 그 나무가 커서 밤이 열릴때까지 썩지 않는다는 말이있다. 믿기지 않는 말인데 그렇다고 한다.

모든 식물들은 씨가 싹이트고 자라는 동안 씨가 가진 영양을 먹으며 뿌리를 내리는데 밤은 그렇지않다고 하고 또 신주를 밤나무로 만들기에 밤은 노인이 심어서 그 나무가 크면 그 나무로 심은자의 신주를 만든다고 하였다.

또 있다 밤나무는 질기고 단단하며 타닌성분이 들어 있어서 잘썩지 않아 철도가 개발되고 초창기에 철도침목을 밤나무를 많이 썼다고도 하였다. 그런 밤나무에 대한 내가 겪었던 오래 묵은 추억과 말들을 곱씹으며 산길을 걸었다.

그리고 젊을 때 내가보기에도 키도 크시고 계란형의 어머니 예쁜 그당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는 돌아 가신지 3년이되었는 내 어머니생각도 하면서 이글을 쓴다.

사람은 자기가 겪어보아야 이해가 된다. 늙으신 어머니 다리가 아파서 병원으로 모시고 다니고 늙으셔도 손톱물도 들이고 돌아가실 때까지 얼굴화장도 하시며 머리염색도 새까맣게 하시며 사실 때 때로는 너무하다 이제는 마음도 좀 늙었으면 싶은 생각도 하게하신 아이들을 어렵게 하시기도 하시던 어머니였다. 병원생활도 자주 오래 하셨다.

이제 내가 늙어보니 몸이 늙어서 추하게 보이는데 약간의 외모가 단정하게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해서는 오히려 추한늙은이로 보여질것이다. 아름답게 늙고 건강하게 살다가 가고 싶은데 그래 될는지….

 

이제는 옛날이야기 10)건강한 농촌과 국민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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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옛날이야기 10)건강한 농촌과 국민 건강.

요즈음 들판을 보면 참으로 평화로운 한국의 농촌이다. 한때 FTA때문에 우리는 다 죽을 것이다고 소 싣고 가서 세종로에 풀어놓고 트럭에 쌀 싣고 와서 아스팔트 위에 패대기 치던 한국의 농민들 그때는 모두 죽고 말 것 같았었는데 요즈음 우리농촌은 덴마크나 네델란드 정도는 아직 멀었지만 어떤 곳은 년 평균 소득이 도시 뺨치는 곳이 허다하다.

세상은 참 신비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여 준다 컬러 TV가 나오고 각 방송국에서 연속극을 방영할 때 드라마작가들 떼돈을 벌고 탤런트라는 직종이 각광받을 때 영화산업 쪽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이 아우성이 있었고 전국의 극장은 부도가 나고 몰살 당하는 것 같았는데 요즈음 우리나라 영화산업은 선진국들과 대등하게 종합예술로 손색이 없고 그 극장들이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문화의 전당이 되어있다. 농촌 이야기하다가…ㅎㅎ

비가 오지 않아서 모내기를 하지 못하고 그 옆에는 그 논에 심을 묘상이 반드시 있었는데 그것도 말라서 농부들이 애타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해 기말고사를 치르고 방학이 되어 집에 가보니 그때 비가 와서 모내기가 한창이였다. 당연히 일조량이 부족하여 쭉정이를 추수할 수밖에 없었다. 성 급한 이는 메밀을 심어서 벼논이 하얗게 메밀꽃으로 장식된 메밀밭이 되기도 하였다. 요즈음은 메밀이 고급 먹을 거리로 되어 그 값도 비싸지만 그때는 하급 먹을거리들 이여서 천대받던 작물이였다.

모심기 할 때는 위에 사진처럼 남녀 노소가 함께 무논에 업드려서 못줄을 옮겨가면서 심었다. 10여명이 늘어서서 각자 자기 앞에 몇 포기씩을 심고는 양쪽 논둑에서 못줄만 옮기는 사람이 못줄을 옮길 때 일어서서 허리를 한번 펴고 그러기를 반복하여 큰 논도 작은 논도 이논 저논 옮겨가면서 심었다. 품앗이라고 오늘은 형님네, 내일은 삼촌네, 모래는 옆집 아무개네 우리 것 하면서 심고 논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루 일당을 주고 그렇게 모심기를 하였다. 모심기가 끝나면 얼마 있다가 논매기라고 또 엎드려서 손으로 구정물 일으키며 잡초를 매주는 힘든 논 농사일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너무나 힘든 일의 연속이였다.

밭 일은 또 끝이 없다 보리 거두어드리기 콩밭 고추밭매기 감자밭 매고 나면 끝나기도 전에 먼저 맨 밭에는 또 잡초들이 욱어지고 그러면 또 호미로 매고를 반복하였다. 밭매기는 대개들 아낙들 차지여서 갖 태어난 어린것은 밭 모퉁이 나무그늘 밑에 가마니 떼기 위에 눞여두고 잠시 젖 먹이고는 일에 정신 팔리다가 보면 아기는 기어 다니며 흙도 주어먹고 겨우내 썩혀서 밭고랑 밑자리에 깔아둔 거름도 주어먹어서 입가가 거무수레하고 모기에게 쏘이기도 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에 눈물자국이 마른체 자고있다.

지금 우리 또래 농촌 출신들은 그렇게 자란 사람이 많이있다. 그렇게 살아온 내게는 오늘 무심코 지나다가 본 이 모내기 광경을 보면서 내가 산 철들고 60여년 동안 달라져온 농촌 문화를 되세기게 하였다. 며칠 전에 길가에 5톤 차에 어린 벼를 이앙기에 실어서 모내기 하도록 만들어진 것을 가득싣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이제는 묘도 단지에서 씨 뿌려서 각 농가에 공급 해주는 것인가하여 알아보았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요즈음 시골 장날 나가보면 고추 묘, 고구마, 감자, 상추, 호박, 오이 등 각종 묘를 많이 팔고 각 농가에 500평 일천평 되는 곳에도 모두 묘종을 사서 심는다고 하였다. 그 넓은 평야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달랑 묘 심는 트럭터 같은거 한대만 달랑 무논에서 열심히 심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농업은 나라의 국민들이 먹을 거리를 제공하는 국가의 근본 업이다.

요즈음 대량생산에 돈 벌이에 혈안이 되어 먹으면 인체에 해를 줄수 있는 행위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그런 사람들 천벌을 받을 것 이다. 들켜서 감옥에도 가나 세월이 흐르면서 더 큰 벌을 받는다. 자식이 무슨 사고로 일찍 죽거나 본인이 암에 걸려 남들보다 먼저 죽는다 세상은 험하다고 하지만 공평하다 나쁜 짓한 사람들 세월을 두고 보면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르는 것 이 나이가 되면서 보고 느낀 경험으로 하는 말이다.

참 많이 달라졌다 우리농업은 이제 구식농업이 아니다 첨단 장비가 디지털식 영농법으로 경영하는 농업경영학이 고도로 발달한 농촌이 되었다. 힘들고 어려웠던일들도 지어주는 회사가 있어서 기계로 지어주고, 도시로 나갔던 젊은이들도 귀농하는 것도 자주 보이고 농촌이 젊어지고 있고 외국에서 값싼 농산물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우리 것이 세계로 팔려나가는 농업도 세계화가 되었다. 우리가 먹을 것들 우리가 품질 좋게 만들어 먹고 더 풍요로운 건강한 농촌이 국민건강으로 이어질 것이고 대한민국의 건강이 될 것이다.

 

 

 

 

이제는 옛날이야기 8) 한번은 입어야 하는 삼배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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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옛날이야기 8) 한번은 입어야 하는 삼배옷.

철커덕 척, 철커덕 척… 배틀에 앉아 삼배짜는 소리는 다듬이 방망이이 소리와 함께 우리나라 고유 정서에 녹아있는 대표적인 한국의 소리다.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시절 다듬이질 소리가 늦가을 정서라면 배틀소리는 뜨거운 땡볕을 떠 올리는 여름의 풍경이었다. 그런 배틀로 짠 삼배는 오랫동안 우리 조상님들의 옷 원단이었으며 삼을 기르고 가공해서 짜느라고 얽힌 애환도 참으로 많다.

삼밭은 기름진 옥토가 아니고 산비탈 밭에도 잘 자란다. 3,4월에 씨를 뿌리고 쇠스랑으로 두드려 놓으면 사람 키보다 크게 자라고 그것 배어서 잎은 훑어버리고 줄기만 2,3일동안 물에 담가둔 후 개울가에 특별히 만든 구덩이에 넣어 쌂아 껍대기를 벗겨서 실이 되도록 가늘게 째서 한올씩 빼어서 끝부분을 2, 3cm정도 겹쳐서 무릎 위 맨살에 대고 손으로 비비면 올이 연결된다.

그것을 물레를 돌려서 꼬이게 하면 배를 짜는 실이 된다. 그실을 우리할머니 어머니들이 배틀에 올리고 손으로는 북실을 좌측에서 우측으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보내고 발로는 앞두로 밀어서 한올씩 한올씩 철커덕 거리며 배를짜서 삼배 원단을 만든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수 없고 중국에서 원단이 많이 수입되고 있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내어 주었을 때 마이태자는 삼배 옷을 갈아입고 망국의 슬픔을 되 씹으며 개골산(금강산)에 입산했다 왕자에서 평민으로 되었다고 할수도 있겠으나 상을 당하면 삼배 옷을 입드시 나라가 망했는데 그처럼 그의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사회 과학적 철학이 깊이 담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

부모가 죽으면 상주가 삼배옷을 입고 3년동안 묘지기를 했다고 하였다 삼배는 이토록 우리 조상들의 애절한 풍습과 철학이 배어있는 섬유다.

삼배에 얽힌 애환으로 또 조선초기 정종때 여진족에게 되 찾은 육진 지역에서는 관에서 아들을 낳자마자 군적에 올려 병력세인 군포로 삼배를 거둬 들였다. 이 군력세가 얼마나 혹독 했던지 서민들이 이것을 면하기 위해 사내아이를 낳으면 고추를 짤랐다는 참혹한 기록이 있다.  삼배는 부녀자들의 원한이 맺힌 원포(怨布)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삼배는 질겨서 농사일에는 제격 이다, 더위를 쫓아 줄뿐 아니라 김매기 거름주기 물대기 등 바쁜 농번기에 작업복으로는 너무나 편리하고 질긴 옷, 한번 장만하면 몇년을 입을 수 있었다. 삼배 바지자락을 걷어 올리고 논이나 밭에서 웅크리고 일하는 농민들의 모습은 전통적인 그 당시 풍경이었다. 몸에 달라붙지도 않고 까슬 까슬한 식물성 섬유가 몸과 여유 공간을 만들어 공기가 잘 통하고 천연섬유로 목화로 만든 무명배와 함께 요긴한 섬유였다.

그 삼배옷 그리고 무명옷 지금 80대이상 늙은이들은 입고 자란 사람들이다. 나도80은 안 되었지만 어릴 때 많이 입었다. 내 초등학교 졸업사진 보면 검은 바지저고리입고 찍었다.ㅎ

여름에 그 삼배 옷을 입으면 참 시원하고 좋으나 사타구니가 옷에 쓰처서 헐기도 했으며 겨울에는 두텁게 솜 놓은 무명 바지 저고리 한 개만 입고 벌벌 떨면서 냇가에서 얼음지치기도 들불 놀이도 하였던 세대다. 그때는 요즈음 반드시 입어야 하는 속옷은 없었다.

지금은 삼 잎이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물질이 있다는 대마초가 되어서 재배가 엄격히 제한을 받고있다. 또 요즈음 화학 섬유에 밀려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저승갈 때 입고가는 수의로 쓰이고 그 수의는 누구나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죽으면 반드시 입고 가는 옷이다.

요즈음 흔한 알레르기라는 피부염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는것은 화학섬유로 인한 영향이 아닐까 하는데 그렇다고 삼을 심고 목화를 심고 누에 쳐서 비단을 만들고 나무섬유로 만든 인견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면 좋지 않을가 하나 여러 사정상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이제는 삼배와 무명천으로 옷 만들어 입는 것은 옛날 이야기다.

 

 

 

지난 이야기 4) 일본 천황이 전범에서 제외된 이유.

*읍소방문을마치고둘이찍은사진.출처네이버.

지난이야기4)일본천황이전범에서제외된이유.

일본천황히로히토는아시아의수많은생명을죽인나라의수괴였으나어찌하여전범에서제외되고지금까지일본은천황에대해서는신성시하고지나고있을까.

많은불가사의한일들이있지만이또한상식으로는이해하기어려운것으로보면서궁금하게여겼다.

그의항복문이라고1945년8월15일815자의‘대동아전쟁종결선언문’을읽어보면자기변명이고“미.영에선전포고한것은실로제국의자존과동아시아의안정을간절히바라는데서나온것이며타국의주권을배격하고영토를침략하는행위는본디짐의뜻이아니었다.”고하였다.

참으로황당한말,이런말을하고도건재한것은그이유가있었다.

1945년8월28일미군제1진이상륙했을때히가시쿠니노미야나루히코당시총리는기자회견에서“전쟁은모두가나빳기때문으로천황에게책임을물어서는안된다”고말했다.

일본제국헌법제1조에“대일본제국은만세일계의천황이통치한다.”고되어있고그에따라문무각료의임명육해공군통수권,선전강화및조약체결등모든권한이천황에게서나왔고그의결정으로시행하였다.

따라서히로히토천황은`1932년1월관동군의만주침략을자위전쟁이라고옹호하는칙어를내리고,중일전쟁에서화학무기와최루탄사용을허가했고식민지국민과전쟁포로로인간생체실험을한만주731부대창설그리고1941년12월미국과영국에전쟁을선포하는조서에서명을해서태평양전쟁을했다.

그러나막상전쟁을끝낼항복문서인전쟁종결서에는’이모든것은짐의뜻이아니다.’고하고일본내부에서도그렇게여론몰이를하였다.

그러나전쟁후미국을비롯한연합국들은히로히토천황을전범으로처벌해야한다고주장을했다.

호주와중국은수많은포로들을대거처형하고수만명의전쟁포로들을학대한장본인천황을처형해야한다고하였다.

당시에조사한겔럽조사는처형이33%,재판에서결정이17%,종신형이11%,추방이9%등미국민70%가처벌해야한다고하였다.

1945년9월18일미국상원은그를전쟁범죄자로기소해야한다는결의안을제출하였고현지에부임한연합군사령관맥아더는히로히토를전범으로처리하고천황이라는제도자체를없에버리면일본의사회구조도자연스럽게변할것이라는생각도하고있었다.

그런데어찌하여이런모든당시분위기와달리천황은살아있고지금까지천황이라는제도도있게되었을까?

맥아더에게일본의각료들이천황은도장만찍었는허수아비였고따라서책임이없고천황을그자리에그대로두어야전후일본을통치하는데쉬울것이고일본의좌익혁명세력척결에20사단의힘을갖고있다고하는보고를받고맥아더마음에변화가생겼다.

이런분위기를만들어놓고히로히토는직접맥아더를만난다.

히로히토는각국에서자기를전범으로처벌해야한다는여론이고맥아더생각에따라운명이결정될것을감지하고맥아더를만나러도꾜미국대사관을1945년9월27일오전10시에찾아갔다.

맥아더는히로히토의방문을받고“방문을영광럽게생각합니다.”고하며시가를권했으나히로히토는불을부치기어렵도록손을떨었다.

천황은짐이라는호칭을항상쓰며살았는데“내가모두책임을지기위해이렇게왔습니다.”고처음내가라는

호칭을하였다맥아더는자기를전범자로기소하지말아달라고호소할줄알았는데초라한모습으로와서스

스로책임을지겠다고하니감동을받았다.

그리고는우호적인분위기로35분간의회의가끝나고둘은대사관로비에서사진을찍고해어졌다.

그후맥아더의본국에보낸보고서에는“히로히토는전쟁을시작할수도끝낼수도없던꼭두각시에불과한인물이다전쟁의시작도종전도내각의결정에따른것이다따라서그를기소하는것은논리에맞지안는다”라고하였다.

그리고난후상황이호전되어가니히로히토는1946년1월1일신년에“짐은현신이아니다”고하면서인간선언을하였다.

그후일본인들은천황구명운동으로맥아더에게어린아이들까지동원해서수많은편지를보냈다.

드디어맥아더는1961년1월본국으로“천황을처벌하면일본에엄청난혼란이일어날것이고천황을망가뜨리면폭동이일어날것이고진압하는데100만명의군대가필요할것이고그군대는무기한여기주둔해야할것이다….”고하고마지막에미국인은일본에영원한증오심을안게될것입니다고하는장문의보고를하였다.

이리하여미국의회와트루먼대통령은’천황을해치는어떻한행위도용납하지않는다’는대일본정책을수정하여반대국들의여론을무시하고전범에서제외시켰고히로히토는88세까지장수하는천수를누리고그후미일의관계는오늘에이르게되고있다.

지금이시점에서보면맥아더는미국을위한장군이었을까일본을위한수호천사일까?

또한그가그렇게구걸하며살아있었기에오늘의일본이되었는것아닌가여겨진다.

지난 이야기 2) 못 생겨서 죄송 해요 라고 한 이주일.

지난이야기2)못생겨서죄송해요라고한이주일.

지난80년대초우리는광주사태로많은생명을잃었고언론통폐합이라는권력자의강압에의해서전국의64개언론매체가18개로통폐합되었고그중심에군보안사가온나라를좌지우지하였던그암울했던시절그러나우리에게마음을달래주고웃음을안겨준일들도있었다.

가수조용필은‘돌아와요부산항에’를불러서시름을달래주었다.

‘돌아와요…’는트로트풍에서약간벗어난세련된리듬과멜로디를조용필이처연한목소리로소화해내어서많은시청자들이그노래를들으면서또목이터져라부르면서열광하였다.

그후‘창밖의여자’로또한번온나라끼있는젊은이들은‘창밖의여자’에매료되어길거리에도주점에서도창밖에있는여자에빠지며마음을달랬다.

그는그후‘미워미워미워’‘일편단심민들레’‘고추잠자리’‘단발머리’등을불러많은시청자들에게국민가수라는사랑을받았고가왕이라할가수가되었다오빠부대라는신조어도그로인해서생겨서많은어린여성들매료되게하였다.

KBS에서방영한전원일기는그당시등장한컬러티비로전국민이즐겨시청하는드라마였고거기에주인공양촌리김회장최불암과그의부인김혜자,일용이네김수미,첫째아들김용건,고두심,유인촌등대가족의일상을진솔하게표현하여농촌생활의아기자기한일상과인간의심성을다룬휴먼드라마에매료되었다.

또한코미디계의이주일이라는희대의걸물이등장하여우리를많이웃게하였다.

그는삼팔선북한땅강원도고성군거진에서5대독자로태어났다1947년겨울에7세때부모손을잡고월남해강원도명주군사천면에서자랐다.춘천고등학교다닐때축구선수였고군에서는군예대에소속되었고

1964년제대후사병때결혼한아내와아이들은춘천부모님집에맡기고사이비약장사를따라다녔다.

그후파월장병위문공연에보조MC로활약도하였으며하춘화쇼단의단골사회자가되었다.

1977년11월이리역폭발사고때극장에서공연중이던하춘화를둘러업고뛰어나와그의목숨을구해주었다는일화도있다.

그후MBC코미디프로그램의웃으면복이와요에출연하였으나못생겨서혐오감을준다는방송국의판단으로편집되어그의모습은방송되지않았다고한다.

그런우여곡절을겪었으나좌절하지않고80년대초지금은없어진TBC‘토요일이다전원출발’의연출자가코미디언송해의추천을받아이주일에게출연기회를주었다.

이주일은첫녹화에긴장해서줄을타고내려오던타잔역의가수윤수일과부딛혀연못에빠졌다가발이벗겨지고물에빠져흉측한몰골의이주일을보고방청석에서웃음이터져나왔다그런데그장면을연출자는

1980년1월19일‘토요일이다전원출발’첫방송때그대로내보냈다.

시청자들은생전처음보는40대의중고참신인의연기에박장대소했다그리하여고정맴버가되고수지큐에맞춰춘오리춤이코미디역사에남을대히트를쳐방송3회만에코흘리개부터백발이된노인에게까지전국민의사랑을받았다‘못생겨서죄송합니다’‘일단한번와보시라니까요’‘콩나물팍팍무쳤냐’등말을남기고우리나라코미디계의전무후무할대스타로우리들머리에각인되어있다.

그렇게열심히노력한결과연예인소득순위5년연속1위,아시아최대규모의8백평짜리케피탈호텔나이트클럽과1990년홀리데이인서울을인수하는등돈도남부러울것없었다.

하지만세상만사는좋은일만않겨주지는않았다.

그가5대독자이고6대독자인아들을1991년에교통사고로잃었다자식을먼저보낸아비의마음이얼마나아팟을까?

그리고그다음해정주영씨의권유에의해경기도구리시에서국회의원에당선되어활동도했으나15대총선을앞두고‘정치는한마디로코메디,4년간코메디많이했다’는말을남기고연예계로돌아왔다.

1999년11월에코미디언으로서는최초로세종문화회관에서이주일의울고웃긴30년을공연했다.

그리고3년후8월27일에그는폐암으로우리곁을떠났다.

어릴때부모따라월남해서시골에서자란잘생기지도못한마스크로그렇게대단한사람도아닌사람,그가남긴족적은우리세대를산사람들에게큰기쁨과희망을안겨주었고폐암이라는무시무시한병을앓으면서도금연운동을하다가작고했다.

인터넷에이주일을열람해보면본명은정주일,그아래대한민국희극배우,영화배우,국회의원이라고쓰여있고‘코메디황제’라는극찬도있으며마지막경력은범국민금연운동추진위원회공동대표라고적혀있다.

세월은흐르는물과같이빠르다더니그가우리곁을떠난지도벌써10년이넘었다.

*아직도우리에게친근감으로남아있어서등장한분들존칭을쓰지않았으니양해바랍니다.

지난 이야기 1) 컬러 TV 이야기

지난이야기1)컬러TV이야기

나날이일어나고있는뉴스가홍수를이루고있고볼것쓸것너무많은데하필이면지난이야기를가끔씩들추기는무엇때문에하느냐할것이다.

그러나사람은한번한실수는두번다시하지안으려고하고지난것들을많이알고있고그것들을토대로살아가는국민이많은나라는큰발전을한다.

우리는일본이노벨상을많이타는것을지금보고있다.전에도이야기하였지만동양에서는유일하게도전정신이많은민족을가진나라이고그렇게하면서큰실수도하면서얻은기초가튼튼한지식의결과라여긴다.

우리나라컬러TV방송시작은1980년12월1일kBS티비가첫방송을시작했다.

MBC는그해12월22일KBS2티비와함께시작했다미국은1954년일본은1960년홍콩은1967년대만은1969년중국과북한도1974년에시작을했다고어느자료에서보았다.

우리나라는미국보다는26년일본보다는20년북한보다6년뒤에다.

그런데1974년에우리나라는컬러TV를일본나쇼날전기와한국아남산업이합작한한국나쇼날이컬러TV를만들었다그후금성사,삼성전자,대한전선,등국내5개업체가만들게되었고년간생산량은170만대였다.

그러나만들어서내나라에서는팔지못하고미국등외국에팔았다미국은국내시판은않으면서외국에만팔고자기들에게만판다고불평이많았다.

세계에서처음으로컬러TV방송을시작한것은1951년6월미국의컬럼비아사(CBS)였다.

그러나CBS는한국6.25전쟁으로인한인력및물자부족을문제삼은미국방부의제동에걸려1952년10월에컬러TV방송을중단하게된다.

우리나라가방영이늦어진것은박정희대통령이‘과소비를조장하고계층간의위화감을불러일으킨다’는반대때문에생산을하면서도남의나라에만판희한한국가였다.

그러던것이1979년전두환을비롯한신군부들의5공정부출현을앞두고심각한경제난타계를목적으로또출범시광주사태등여러강압적인행위로흉흉해진민심을돌리려고하는정책중한방편으로1980년8월1일시판을시작하였다하지만컬러방송을볼수있는곳은미군방송AFKN부근과부산일대가가시청권인일본TV방송뿐이었다그러니판매량도5천여대로미미했다그리고그후11월초컬러TV에대한특별소비세를내리고12월1일부터방송을허용한다고발표했다.

방송을시작한다고발표하자불티나게팔려나갔다11월한달중4만여대가팔리고재고가소진되었다가전제품대리점들없어서못팔았고당시컬러TV한대가격은14인지가32만6천원20인지가42만4천원당시쌀80키로그람들이한가마값은5만원그7배정도그후1981년7월말까지105만3천대가팔려나갔고81년에월평균10만대이상이팔렸다.

컬러TV정책은오일쇼크로타격받은전자산업을구해내고반도체가주력이되기전까지효자상품으로확약하였으며80년대수출경쟁력도높이는데큰기여를했다일본의소니,마스시타,히타치,도시바등이장악하고있던컬러TV시장에우리는도전장을내밀었다.

컬러TV는TV화면이흑백에서컬러로비뀌었다는차원을넘어국가경제적인차원에서문화적으로큰변화를일으켰다출연자의옷차림이나사물들이현란한천연색으로바뀌면서국민의일상생활에도큰영향을미쳤다.

따라서방송매체들의활발한비약으로끼있는가수탤런트들이활약이두드러지게나타나서돈잘버는시대로그러나국내영화산업이서리를만나는사태로되기도하였다.

대형극장은근근히유지되었지만지방의작은극장들은관객이없어문을닫고건물마저팔려고내놓아도팔리지않아서곤혹스럽게되었다.

컬러TV는아날로그방식에서디지털방식으로바꾸어졌고경제적인효과는새삼이야기할필요가있을까할정도로우리나라수출에큰효자상품이었고수출주종상품으로지금의반도체가주종이되기까지이끌어온품종이기도할뿐더러반도체생산과지금세계인들이품질이좋다고인정하며즐겨쓰는휴대폰개발에도큰영향을끼친제품이다.

미국에서쿼터를얻어와서수출하였던궁색스러운제품으로일본이전세계를석권하였던TV시장을이제는세계방방곡곡우리삼성,LGTV가지구인들이즐겨보는제품이되었고가장많이팔린다고한다.

위에서보다싶이많은국민들이좋아할것을알면서도시행하지못하였을때그고뇌도컷을것이다.

그후여러사정을참고하여과감하게시행하여많은발전을한것또한지금시점에지나쳐보지않았으면한다.또한이제는끝이다고여기고큰실망을안겨주었던것들도다시되살아나는것도경험을하였다.

이래서세상은돌고돈다고하고산이높으면반드시계곡도깊고그에따른크고긴강도있는것아닐까.

고종황제와 미국여인의 황당한 결혼이야기.

고종황제와미국여인의황당한결혼이야기.

얼마전에서양인조선살이라는책을읽었는데거기있는황당한글이다.

1903년11월29일보스턴선데이포스트는아래와같은기사가한페지가득하게실렸다.

신문반페지는단정하고품위있게차려입은에밀리브라운이라는서양여성이한국황제고종과결혼식을치루는그림으로가득하였다.

보스턴선데이뿐이아니고다른미국신문도함께준비과정부터심층기사로야단하였다고하였다.

아래글은당시상황을자료를토대로저자가쓴글이다.

대관식에앞선여러달동안수많은돈이왕실로부터흘러나왔고미래의황녀를위해금고가고갈될때까지짐을나르는사람과짐승들의행열이계속되었다.

지난수년간한국에관한미국언론은대부분이기아부채그리고버지니아주로아노크대학에재학중인고종황제의아들의화군의여성편력에관해서떠들었는데갑자기의아스러운기사였다.

기사의내용은‘…..행진의맨위에는시위대의장군들과가장총애하는병사들이움직였다.

수천명의병사들이통과할때트럼벳이울리며궁궐의문이활짝열렸다.마침내귀먹을정도의커다란북소리와한의자에는고종황제가앉고다른의자에는한국황녀가된에밀리브라운이앉았다.머리부터발끝까지그녀는보석과비단으로휘감겼다황제의자위에는하늘을나르는용을그린14피트나되는깃발이날리고있었다.황제와황녀가나타나자사람들은머리가땅에닿도록허리를숙여인사를했다.

다지나갈때까지누구도쳐다보는사람이없었다.

귀족들은값비싼의상을차려입고시위대를따르고이거대한행진을서울의주요도로를지나서다시궁궐로돌아왔다궁궐에는거대한축제가준비되어있다왕관을쓰고보석으로장식한에밀리브라운이바로황제오른쪽에앉아있었다.

이신문을본대부분사람들은에밀리브라운이도대체누구일까?

전에그녀에대해서들어본사람이아무도없었다일부신문이추적보도에따르면에밀리브라운은1879년오하이오주에서태어났다유년시절을그곳에서보내고그녀의아버지는피터브라운이고성공한의사였는데일찍부인과사별하고홀로딸을키웠다.

그는헌신적인장로교도이고그가보기에당시한반도는선교사가절실한곳이었고1894년그는해외선교에참여하기로결심하고딸을대리고한국으로왔다한국은그당시지방에서민란이발생하고이를진압하기위해중국군이한반도에주둔하고그후일본군도진주하여1894년에는청일전쟁이일어났다.

그전쟁은대부분한국부근에서이루어졌다1895년일본군이민비를살해하고고종은신변보호를위해러시아공사관으로대피하는혼란기였다.

그시기에피터브라운박사가15살된외동딸과함께한국에왔다.

그의딸은생기가넘쳤고아름다운목소리를지녀서울의한교회에서성가대로활동했다그러던어느날우연찮게고종의눈에띄였고정치적어려움과죽은민비때문에비탄에빠져있는고종은위안을찾고자했다수시로그녀를궁궐로초대했다하지만정숙한그녀는초대를정중히거절했다.

한국에서황제는무엇이든지자기뜻대로할수있다.

선교사의딸을황실로들어오라고지시했을때그녀가그렇게할수없다는점을알고있으나그녀는정숙한서양여인이였으며황제의후궁이되는것을꺼려했다그러나그녀는고종이황제이기때문에동의할수밖에없었다.

그녀는한반도전체를기독교로개종시키겠다는황제의약속이있은다음에결혼에동의했다고한다드디어그의지혜와현명함으로궁궐내에서반대자들을극복하고짧은기간에황제가신뢰하는인물로부각되었다.

그녀와황제와의관계는더욱돈독해졌고황제는사랑을그녀에게고백하고결혼을하게되었다.

이결혼식에는최소3개국대표를포함해외국인들이대거참석했다그러나에밀리브라운의아버지는무슨연유인지참석하지못했다미국공사인알렌이아버지를대신해그녀와결혼식에걸어들어갔고미국출신윌리엄센즈와영국인맥레비브라운이공식적이증인으로참석했다.

이렇게미국언론은상세하게신빙성있게보도했다그러나나중에알고보니에밀리브라운이라는여자는실존인물도아니고오보였다.

오스트리아신문네브프리프레스가처음보도한것으로알려져있으며보스턴선대이포스트같은신문들이나름대로기사를각색해서보도한것이다.다만브라운이라는이름을가진선교사가실지로활동하고있었다휴브라운박사의아내였는데그결혼식기사가있기전에모두한국을떠났다고하였다.

이렇게황당한기사가그러면어찌하여나왔을까?

철딱서니없고사명감없는한기자로인해서가난한나라여서당한기사였다.

당시많은외국기자는일본과러시아간에전쟁이곧일어나리라고한국에왔는데예상과달리일어나지않고보도할기사거리가없어서뉴욕에있는대표되는어떤기자가언론의힘을확인하기위해만든기사였다고확인되었다고하였다.

너무나황당한가난한나라이기에당한억울한조롱으로여겨진다.

예나지금이나언론의힘은대단하다그만큼그곳에종사원들도사명감을가지고임무수행을해야한다.

지금나라안이이토록황당한일들이많이일어나는데중요한역할을하는영향력있는언론매체들은우리가잘하고있다고할수있을까?

한국에 처음 열린 축구와 야구는 언제였을까?

한국에처음열린축구와야구는언제였을까?

신라때둥근물체를만들어발로차는순수우리식축구가있었다는기록이있다.

그러나현대식축구는1896년말한국인학생들과영국인선원들이하였다고한다.

한국에서발행된최초의영자신문디인디펜덴트에의하면11월말서울육영공원에서공부하는학생들이이름은모르는외국인친구에게축구하는법을배웠다고한다.

영국출신의열정적인운동선수아서비터너(ArthurBTurner)목사가아닌가한다고추정된다고한다.

그후학생들은스스로많은연습과수시로시합도하고하였다.

국제적이며공식적인경기는1897년3월26토요일지금동대문운동장훈련원에서영국전함나르시스호의승무원과학생들이친선게임을하게되었다.

초창기축구는오늘과는조금다른미식축구처럼거칠게하는경기였다고한다.

학생쪽에는영국인터너도있고반은한국학생이고그중에송긍상(SongKungSang)이라는한국인은영국인을능가할정도로잘했다고하고1:0으로한국학생이이겼다고인디펜덴트는한국최초의축구시합이라고하였다.

그해12월16일또다른시합이훈련원에서열렸다.

많은구경꾼들이추운날씨지만모이고열열한응원으로6:2로한국팀이이겼다는기사도있었다.

그후서양인들이세운사학의발전과함께비약적인발전을하여1902년배재학당에는축구팀이조직되었다.

공개적으로거행된공식축구경기는1906년6월10일황성기독청년회(YMCA)와대한체육구락부간의시합이였다.

대한축구협회에서발행한축구백년사에그때는무승부였다는기록이있다.

요즈음마치국기이다싶이많은푸로팀이있어서즐겁게하고또관중들도즐기고있다.

요즈음기중에국민들에게많은사랑을받고있는야구는많은한국사람들이야구의기원을1900년대초YMCA와연관해서여기고필립질레트선교사가황성기독청년회청년들에게가르친것으로알고있으나그보다일찍도입되었다고한다.

1890년대중반야구는한국에거주한외국인들이즐겨하였다.

1894년청일전쟁과민비암살등혼란기에각국은자국의공관보호를위해해군과해병들이파견하였다.

이들이여가를이용해서서로자주하였다.

최초의경기는미국공관을수비하는해병대원들이서울의미국인들과시합을서대문외곽공터에서하였다서양인들과한국인들이관전을하고훌륭한경기로해병대가21:20으로이기고경기가끝난후야간에는참가자들이연회가베풀어지고즐거운날이였다고하였다.

그후며칠이지나고더인디펜덴트는동대문부근훈련원에서하니여성들도참석하여방망이와공의기사들에게용기를주도록진심으로초청한다는기사를보내고전번에이어다시하여17:11로미국팀이패했다는기록도있다.

그후도자주시합이있으면서한국인들이즐겨하기도하였다

한국거주자외국인중에는필립제이슨(PhilpJaisohn)이라고있었는데이사람이서재필이다최초에야구를한한국인이아닌가한다.

해병대와시합때참가한그는미국시민권자로서울에서거행되는각종스포츠행사에적극적으로참가했다고한다.

이런과정으로한국인들의열기가또한대단하여서울종로에황성기독교청년회는회원들을대상으로야구를가르키기시작했고1905년에관립한성고등학교(경기고고)에다카하시라라는일본인교사가야구팀을조직해서황성기독교팀과한성고교팀이훈련원에서한국인끼리최초의야구경기를가졌다고하였다.

방망이공이라고부르고생소하였으나그재미에빠져서구경하고참가하고하였던야구가요즈음이렇게많은발전을하였다.

전국에초등학교에도중고등,대학교에서많은팀이있고십여개의푸로팀이있어서즐겨하고있다.

한편관전도외국에서는볼수없는독특한응원과많은국민들이함께하는마치야구장은축제의장처럼모두가즐길수있는경기가되었다.

여명의 시대 (23) 외자도입으로 달라진 조선의 모습들.

여명의시대(23)외자도입으로달라진조선의모습들.

1897년대한제국을선포한후열강은황실을보호해주는대신각종이권을넘겨달라고했고허약한황실은허락했다.

광산임업어업등자연과철도해운전기전차전신교통통신에관한이권이일본,미국,러시아,프랑스,청,영국,독일,등에넘어가고무역을통해외국자본이들어왔다.

그중에위협적인존재는일본이었다.

조선의수출품은쌀콩같은곡물,쌀의수출은1891년에94만석1909년에154만석이는총생산량의3분의1이였다고한다수입품은석유성냥화장품모피카페트등200여종류대개일본청영국러시아에서들어온물건이다.

장사들은그런물건을가지고다니면서쌀콩깨등으로대가를받아서그것을모아수출했다일본의상인은조선의쌀과콩을일본에가져가서몇배의이익을남기고팔았다.

백성들은쌀부족사태가일어나쌀값이폭등하고지주들은저장해두었다가값이오르면팔아큰돈을벌고그돈으로땅을사들였다가난한사람과부자소득의격차크기는그때나지금이나별반다르지않았는것같다.

일상생활에큰변화가일어났다.

석유등잔이쓰이고부싯돌대신성냥이구리무라는화장품에여인들넋을잃었다.

서양의양복조끼를본뜬조끼가유행하고상것들이나입는것이라하던두루마기를입었다팔에소지품을넣는거추장스러운도포는주머니달린조끼로벗어던졌다.

조끼주머니는개와또는개화라고했다옷빛깔도검은색옷을많이입었다.

일본에서들어온옥(玉)같은서양옷감이라해서옥양목이라고불린영국산면직물은조선의무명옷을제압했다싼값에팔려나간목화가비싼옷감이되어되들어왔다.

상투를짜르고긴담뱃대대신권련을입에물고조끼와옥양목두루마기입은신사가서울거리를활보했다.

1887년고종은경복궁향원정연못에수력발전시설을해서전등을켰다.

그전기불이제멋대로꺼졌다켜졌다해서건달불이라고했다.

왕비는건달불을밤새도록켜놓고책을읽었다그런데수력발전때문에연못물이뜨거워져서고기들이다죽자증어망국(蒸魚亡國)이라는비난이있었다.

그러나서울종로에전등이처음밝혀진것은1900년이다.

1899년5월최초로서대문에서청량리에이르는전차가개통되었다고종이비명에간황후묘소를왕래하기위해서만들었다고한다.

그런데시내를빨리달리는전차에아이들이하루몇명씩깔려죽자사람들은전차에돌을던지고불을지르기도했다.

전차부설권과전기수도시설권은미국소유였다그러나인천서노량진까지최초의철도가일본이부설권을가지게되어그해9월18일개통되었다.

배로제물포(인천)에도착한외국인들이기차로서울까지왔다.

제물포와대동강입구까지주1회정기여객항로가개설되었다제물포와함경도경성은격주로운행되고낙동강에도기선을띄워밀양과대구까지화물을실어날랐다.

이기선여객사업은일본이독점했다.

한말의지사황현(黃玹)은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외국자본의침투로조선민족경제의폐해를아래와같이개탄하였다.

개항이래외국물건이처음들어올적에는값이매우싸서장사꾼들이이익을남겼는데몇년못가왜의간악한상술이심했는데우리나라간사한백성들이그들의앞잡이가된탓이다..

심하도다들어오는물건은비단시계물감따위그저기이한것들이지만나가는것은쌀콩가죽금은등우리들의박실한보배들이다이러고서야나라가피폐하지안을수있겠는가고한탄했다.

그당시나라여건으로는백성이먹고사는것이중요한시기에있어도좋고없다고해도별문제없는것들들어와서서민들더가난해지는모습들을본황현의마음을들여다보는것같다.

역사를읽으면서오늘을새삼느끼게하는대목이다.

지금의모습들을보면우리가사는것은시대를한참지나도별로다르지않는것같다.

빨리달리는전차에치여아이를잃은부모의마음,쌀옷등먹고사는생필품값이천정부지로올라갈때가난한조선의백성들의애환,그렇게만든부자들의횡포그로인한소득의격차하늘과땅만큼차이나는빈부의차,삶의질,그리고경제력이뛰어난부자나라의무지막지한경제침략등등아무것도달라진것이없다.

더잘살고오래살고할려고애쓴것이우리주변의환경들은날이갈수록황폐되어가고우리가무리한욕망으로만든제도가우리자손들을과연행복하게살게할까하는우려도자꾸불거지고늘어나고있다.

주변국가들과의얼키고설킨관계들도100년전그때와다른것이없고….

여명의 시대 (22) 나라경제의 불 소시게 영암선철도.

*승부역에있는’영암선개통기념’이라는이승만대통령의친필기념비.

여명의시대(22)나라경제의불소시게영암선철도.

안동에서북쪽으로낙동강을따라거슬러올라가면강원도와접경한경북봉화가있다.

봉화는내성춘양소천재산석포등이있다워낙산골짜기여서전국에서재정자립도가가장낮은지방중에한곳이다.

신라경덕왕때는옥마현(玉馬縣)라고하였으며고려때지금의봉화(奉化縣)라는이름으로불려졌다고한다.

동북여지승람에보면절약과검소를숭상하는곳누애를치며뽕나무가꾸기힘쓰는지역이라는기록이있다.

산골이여서잣나무송이버섯석이석청산나물등이많이나고지하자원으로납과아연또백중석등이매장되어있었다.

지금은거의폐광이되었지만일제시대에그곳자원을개발키위해서일제가중앙선을건설하고1944년영주에서춘양까지철길을만들려고경상북도북부지방사람들을강제로동원해서그이듬해봉화까지건설하고공사를하다가2차세계대전으로중단하였다.

해방후1948년8.15일대한민국정부수립후1949년춘양까지잇는공사를시작했다그러나다음해바로한국전쟁이일어나서또중단되었다.

이렇게두번이나공사가중단되자경상도북부지방에서억지로춘양까지철길을놓으려고하면변란이일어난다하여무슨일이잘안풀려억지로하는것을억지춘양이라고하는유행어가생겨서지금도그말을간혹쓰고있다.

전쟁이끝나고1953년자유당정권때미국의원조로공사를시작해서2년만에영주에서강원도철암까지완공시킨다그철길이지금은부르지도않는영암선이라고하고승만대통령에게친필을받아서승부역에준공기념비가있는우리나라기술로처음만든뜻깊은철로이다험한지역을변변한장비도없이하는난공사였다.

영암선은실지로는봉화선이다시발지영주와종착지철암을빼고는문단봉화봉성법전춘양임기현동분천양원승부석포등역이모두가봉화군의지역이다.

우리나라산업에큰역할을했다.

봉화지역의백중석납아연금등개발과강원도철암장성황지도계에서채굴된무연탄을전국으로보내는데큰기여를했고지금의산마다울창한산을만든산림녹화에도큰역할을했다.

강원도지금태백시라고하는철암장성황지에는질이좋은무연탄이무진장으로매장되어해방후우리나라산업화에큰기여를했다.

해방후산업화공업화에필요한에너지인무연탄거의가태백시부근에서생산되어영암선으로실려나와서영암선의시발지영주는무연탄실은화물열차가10여분마다왕래하는화물교통의요충지가되어중앙선경북선그리고영암선의중심지가되었다.

그전에는자그마한역이었고안동과봉화위세에눌려별로였으나갑자기교통의요지가되어물류집산지가되어영주는시가되고봉화에있었던세무서가영주로이전하고한국철도를운영하는서울대전순천철도국이있었는데영주에도철도국이생기고군사정부말엽공화당시절에는건설부영주국토건설본부가생겼다.

영암선은지금은찌들어진공기업대한석탄공사의장성광업소와삼척군에도계광업소의무연탄수송과함태탄광강원산업등초창기국가의기간산업체들의유일한수송로였다.

대한석탄공사는그외에도문경군에은성광업소전남화순군에화순광업소영월광업소등광업소가있었고그당시에는가장큰국영업체이기도했다.

우리나라초창기에너지수송로로서큰역할을하였던영암선은1963년동해북부선과통합하여영동선으로명칭이변경되었다.

지금도무연탄을운반하는열차가다니기는하지만추억의관광열차라고내륙관광이라던가하는관광유람열차도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