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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권을 행사한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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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권을 행사한 여인들.

조선시대 왕은 왕후의 몸에서 원자로 태어나서 세자 자격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고 관례식을 거처 성인이 된 다음에 아버지가 죽은뒤 왕위에 오른 신체 건강한 남자 여야 했다.

이런 요건중에 하나만 부족해도 정통성의 문제가 생겼다 즉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거나 원자로 태어나지 않았거나 세자를 거치지 않았거나 살아있는 아버지를 제치고 왕이 되었거나 건강이 아주나쁜 군주는 정치적 권위가 약하게 여겨졌다.

그러므로 1468년 7대 세조가 사망했을 때 세조에게는 의경세자와 해양대군 적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둘다 몸이 건강치 못해 의경세자는 앓다가 죽고 형을 대신해서 세자가된 해양대군 역시 허약했다.

세조가 어린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어 정통성에 흠이 가서 고심한 왕권이었고 조카를 죽이고 이룬 왕업에 벌을 받는다는 원성이 자자 했는 시점에 참으로 고심 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서자들에게 왕위를 물려 줄수도 없고해서 해양대군 예종이 왕이 되고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에게 수렴청정 권한을 맡겼다.

그러나 허약한 예종은 왕이 된지 15개월만에 사망하여 13살 밖에 안된 9대 성종이 즉위하고 정희왕후 수렴청정은 1476년까지 성종이 20세가 되어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하기 전까지 통치권을 행사했다. 이씨 왕조의 왕통을 이으기 위해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다.

정통성은 유지하되 예외를 인정하여 대비가 왕을 대신하여 왕권을 가지는 유연성을 인정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이 창업한지 76년만에 끈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식으로 수렴청정한 대비는 정희왕후 외에도 5명이나 된다 즉 여자 6명이 왕 행세를 하였다.

11대 중종의 부인 문정왕후 윤씨는 13대 명종때 대왕대비 자격으로 8년간 통치했고 명종의 부인 인순왕후 심씨는 14대 선조때 대비자격으로 1년간 통치했다

21대 영조의 젊은 부인으로 등장한 정순왕후 김씨(영조와 나이차 51세)는 제23대 순조때 대왕대비 자격으로 3년간 통치했다.

순조의 부인 순원 왕후 김씨는 24대 헌종과 25대 청종때 대왕대비 자격으로 7년과 6년간 통치했다. 또 추존왕 익종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26대 고종때 대왕대비자격으로 2년간 통치했다. 이때는 흥선대원군에게 섭정의 권한을 부여했으므로 큰 권한은 없었다.

이분들 6명 수렴 청정 기간을 합하면 조선왕조 5백년 역사중에 35년간 실질적으로 여왕의 역사 였다 통치권은 남자가 행사해야 한다는 원칙이 그대로 지켜졌다면 조선은 일찍이 멸망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수렴청정은 단순한 권한 대행이 아니고 주상의 의견을 듣는게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입각해서 통치권을 행사했다 즉 막후에서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즉 당시는 여왕의 시대였다 합법적 절차에 따라 수렴 청정이 끝나지 않는한 주상은 통치권이 없었다.

대신들이 조언과 세력에 의해서 했다고도 할것이나 그것은 친정을 하였는 임금도 그렇게 한 시대가 많았으니 여인들의 수렴청정이 권한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된 근거는 국가의 주권이 왕실에 있다 즉 국가의 주인이 왕실이니 주상이 죽으면 주인인 어머니나 아내가 최고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기에 그렇게 했다. 대비들은 왕을 낳은 신성한 몸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겉보기로는 조선은 남성중심사회고 여성은 무력한 존재같이 보이지만 왕실에서는 여성의 권리가 막강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개국한지 76년 세조가 마지막 임금으로 끝났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민주국가여서 여자가 대통령 되는 것도 선출이 되면 권력자가 되나 실지권력은 국민인데 왕처럼 여기고 군림하다가 방금 쫓겨난 것을 보았다.

*위의 사진은 문정왕후어보다(왼쪽) 이번 우리 대통령 방미에 미국에서 돌아온다고 하였다. 이처럼 대행시에는 어보도 자기것을 사용했다.

*문정왕후어보는 1547년(명종2년) 중종비인 문정왕후에게 聖烈大王大妃라는 존호를 올리고 그 기념으로 제작했는데 6.25때 분실되었으나 최근 미국 LA박물관에서 발견되어 문화재청이 교섭하여 현종어보(오른쪽)와함께 들여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학생1인

이제는 옛날이야기 9) 거국적인 산아제한 운동을 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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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1인

이제는 옛날이야기 9) 거국적인 산아제한 운동을 하더니.

이렇게 무작정 마구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꼴로 사는 것도 마구 낳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며 야단 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1963년에 위와 같이 하면서 2063년 한국 인구가 6억 명이 될 것이라고 하며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자고 대한가족협회라는 정부단체에서 전국 방방곡곡에 다니며 홍보하고 공무원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콘돔을 나누어 주고 시도별로 정관수술 루프시술 난관수술을 목표량을 주어서 수술 실이 구비되어 있는 이동차로 다니며 무료로 수술도 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머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했나 싶으지만 그 당시는 심각했다. 보통 한 가정에 아이가 5, 6명정도였고 1인당 국민소득은 70달러정도로 세계에서 최빈국에 가까운 나라였다. 정부는 이것을 해결하자면 적게 낳아야 한다고 긴급 처방을 한 것이다. 정관수술을 하면 예비군훈련 혜택도 주었고 공공주택 우선 입주권도 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제 먹을 거는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었고 심지어 어떤 집은 아무개를 낳고 살림이 일었다(불어났다) 그놈이 복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놈 때 문에 형편이 나아졌다고 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집은 개(犬)가 복을 가진 놈이다고 그 집은 개가 먹여 살린다는 소리도 내 어릴 때 들은 봐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는 아이를 낳지 않을 방법이라고는 없었다.

남녀가 가장 즐거운 그 행위를 안 하는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인데 그렇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참는 것도 한번 두번이지 허구한날을 그 즐거운 것을 참는다는 것이….ㅎ

그 당시의 시체 말, 철길 옆에 있는 동내에는 유독시리 아이가 많다고 하였다. 그 직전까지 기차는 칙칙 푹푹하는 증기기관차가 다녔고 철로 또한 토막 토막이은 철로여서 이음새에 지나가는 소리가 덜그덕 거렸고 게다가 모든 신호도 경음으로 꾀엑 하는 것으로 하였으니 그 소리가 요란했다. 1962년에 디젤기관차가 미국의원조로 막 도입 되었는데 그때도 기차가 지나가면서 걸핏하면 경음기를 울리고 기차길 옆 주민들은 많이 시끄러웠고 그때마다 잠이 깨니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ㅎ

의료시설이 형편없어서 자랄 때 내가본 경험으로는 출생후 30%정도는 어릴 때 죽었다. 그러나 피임을 할수 없었던 기간은 내가 30살에 결혼을 했는데 그때까지도 요즈음 그 흔해 빠진 콘돔은 있다는 말은 들어서도 보지도 못했고 돈을 주고 살려면 살수는 있었지만 약국에 가서 그것 주세요 하는 것은 부끄러워서 사지는 못했다.

여자는 더 했을 것이다. 자의든 아니든 간혹 해서는 안될 임신을 하여 수치스러움으로 큰일을 저지르기도 하는 사건도 있었으며 좀 독한 여인들은 모질게 작심하고 부부간이지만 가임기에는 절대로 남편을 곁에 오지도 못하게 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내 경우도 독한 아내 만나서 딸하나 아들 하나 둘만 낳았다.ㅎ

그렇게 그런 세월이 있었는데 요즈음은 기구도 많고 아예 불임으로 지날 기간을 가지게 하는 약도 많고 그에 따라서 아이 낳는 고통도 큰 고통이고 낳아서 키우는데 많은 수고가 따르니 아예 안 낳아서 큰 걱정이다.

곧 성년 한 사람이 노인 4, 5명을 부양해야 한다는 소리도 들리고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한다는 소리도 나오고 하나 말로만 걱정을 하면서 국가에서 출산장려를 한다고 아이 낳으면 몇 백만원 장려금을 주기도하고 각 지방에 따라 하나 별 효과가 없이 한해 두해가 지나고 있다. 물론 이런 처방도 하여야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것은 안하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고 부끄럽게 여기는 관념을 가질 정신적인 운동을 장기간 하여야 한다고 여긴다.

마음 속으로부터 가난하게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결혼 안 했다는 것과 자식이 둘이 안 된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국민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것은 기간을 10년20년 내다보고 교육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만 옛말에 말을 물가에까지 끌고 가지는 하지만 물을 먹이는 것은 말이 생각이 있어야 먹는 것이다. 그처럼 사람이기에 이것은 해야 한다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땜질식 정책으로 살아왔다 그 결과가 이런 현상이 되었다. OECD 경제 협력국가평균 출산율1.68명이나 우리는 1.21로 꼴지라고 한다(2014년) 이는 국가가 노인이 되는 것이다. 출산율이 꼴찌니 제일먼저 노인국가가 되고 나아가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위에 사진은 어느 초등학교 학생1인이 선생님과 학습 장면이다.

국가 정책은 적어도 100년은 바라보고 입안하고 결정해야 한다. 지금 그런 것 결정하고 만들 정부의 수장 대통령을 선출하는 시기가 되어 너도나도 그것 하겠다고 출마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한다 어떤 분들은 나라가 곧 망할수 있는 공약을 발표하기도 하고 연예인들 인기 영합 하는것 같은 공약도 있다. 잘 선별하여 실수로 인해서 많은 상처 입으며 얻은 기횐데 건강한 정부를 만들 사람을 선출해야 할건데….

 

 

 

 

 

국민들 바보 되기를 바랐던 전 정부들.

광주

나쁜 정부일수록 국민들을 바보 만들려고 한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국민들은 나쁜 정부들 때문에 바보가 된 적이 자주 있었다. 그들이 가진 권세를 확장하거나 연장하거나 욕심을 채우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그때 마다 북쪽 공산주의 놈들이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하면서 곧 쳐 내려올 기미가 보인다고 하면 6,25전쟁을 경험한 국민들은 그렇게 믿고 그래 될 까봐 겁나서 시키는 대로 다했다.

자유당 정부 때 그 핑게로 당시 대통령 정적도 용공분자 즉 공산주의자로 몰아 부치니 국민들은 그렇게 알았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은 간첩이라고 하여 사형되었다. 나는 그때 중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려고 출마해서 차점을 떨어졌는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그렇게 속이고… 하였고 국민들은 그렇게 믿고 살았는데 몇해전에 그게 아니다고 후손들이 재심소송으로 복권 되어졌다.그러나 인걸은 억울하게 죽었고 무심한 세월만 흘러서 이제 무죄가 되면 머하노.

그 당시는 나라의 일들 알수 있는 창구는 신문뿐이고 농촌에 살고 있는 사람이 서울 가는 것 지금 남극이나 그린랜드에 가는 것 정도로 여기는 시대에 외부 소식을 알수도 없고 그 신문도 100여호가 살고 있는 동내에 한 두집만 보았는데 그것도 정부가 시키는 데로 즉 정권잡은 권력자 뜻에 거슬리는 것 쓰면 이런 저런 구실로 압박을 하였고 정부의 뜻을 면장 동장에게 그렇게 시키면 속으로는 그게 아닌데 싶어도 그런 말 하면 불이익 당할까 겁나서 시키는 대로 국민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일본시대를 36년간 그렇게 살았던 후 10년이 될 즈음이니 그럴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 20여년이지난 박정희군사정부 때도 지식인들 학생들이 세상 돌아가는 것 알고 이래서는 안된다고 권력을 가진 집권자에게 반항하면 바로 무슨 간첩단사건 하면서 정보부에서 발표한 것 신문들 활자 중에 가장 큰 글자로 시커멓게 무슨무슨 간첩단사건이라고 하여 국민들 기를 팍 죽여버린다. 그러면 도시서민들 지방에 살고 있는 국민들은 “저런! 저런!….” 하면서 그게 입으로 입으로 전해지고 그리고는 재판을하여 많게는 10여명도 감옥에 가고 그중 한 두명은 사형을 시키고 하였다.

그후에 그런 방법으로 수차례 쓰면서 권좌에 있었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그 다음 번 전두환정권 초에 광주 사태 때(지금 광주 민주화운동 이라고함) 나는 대구에 살았는데 광주 금남로, 전남대학교, 또 어디 하면서 예비군무기창고에 무기를 탈취하여 북한에서 지령을 받고 내려온 간첩들과 합세해서 경찰서를 습격하고 몇사람을 죽이고 하더니 드디어 공수부대가 진압하려고 출동하였으나 무자비하게 발동하는 무리들이 탱크를 빼았아서 몰고..… 하며 무법천지고 공산당 빨갱이들의 천지가 되었고 그 배후에는 야당 지도자 아무개가 어쩌고 하며 광주는 북괴들의 소굴로 여기게 하였다.

나는 그때 대구에서 회사생활을 하였는데 그런줄 알고 친구들과 저녁에 약전골목 돼지잡고기 집에 자주 갔는데 모이면 광주는 빨갱이 천지로 알고 지났는데 그후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정권이 바뀌고 그게 아니고 민주화의 시발이고 광주5,18어쩌고 할 때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에 이럴수가 이렇게 국민을 속일 수가 있을까 싶었고 기가 찼다. 그러더니 지금은 그것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눈이 뒤집힌 몇 사람들의 농간이였는 것이 사실로 되어 광주는 이나라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보니 박근혜 대통령되고 얼마되지 않아서 십상시니, 정윤회 사건이니…., 하더니 박근혜대통령은 찌라시니 어쩌고 하면서 그런 것을 폭로한 그때 청와대 무슨 참모들과 조응천이라는 분이 그때 면직이 되었는데 나는 그때 조응천 그 사람이 아주 나쁜 사람으로 알았는데 요즈음 박 전대통령과 최순실사건을 보면서 나는 조응천 그분에게 많이 미안하다.

그때만이라도 바르게 평가되어 바로 잡혀졌다면 오늘과 같은 대통령파면 그리고 구속이 되고구치소 생활하는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국가적인 수치와 소요도 없었을 것인데 참으로 아쉽다. 이토록 나쁜 권력자는 국민들을 속이고 감추고 언론을 매도하고 하는 것이다.

그후 결국은 그로인해 최후도 맞아서 비참하게 된다. 지난 동안 그런분들을 돌이켜보면 하나같이 전직 대통령으로의 존경보다는 지금 어느당 대권주자 우악스러운 말 잘하는 사람 말과 같이 허잡한 사람으로 여김 받고 지나고 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이기회에 잘해서 다시는 바보되지 말자.

 

이제는 옛날이야기. 5) 미국군인을 위한 기지촌 정화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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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옛날이야기. 5) 미국군인을 위한 기지촌 정화작업.

6.25전쟁으로 우리나라에는 외국 군인들이 많이 와있었다. 그 후 다른 나라 군인들은 돌아 갔지만 미군은 유엔군으로 남아 지금도 있다.

미군기지는 대개 일제시대 일본군이 주둔했던 지역이었다 용산 미군기지는 일본 조선군사령부 자리 평택기지는 일본군의 비행장기지 그 외 대구 왜관 동두천 군산기지 등 미군기지가 산재해 있다. 그 기지에는 반드시 그들을 위한 기지촌이 있고 위안부도 있었다.

갑작스런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여자 내가 아니면 가족을 굶긴다고 여기는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당시에는 거의 없었다. 그런 여인을 지켜줄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만 여성의 순결은 목숨과 같은 것이다는 힘 없는 도덕관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운명 때문에 그런 여성을 지켜 줄 수가 없었다.

어느 통계에 보면 한국 전쟁 때부터 지금까지 기지촌을 거처간 여성의 수가 30만여 명이 된다고 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참 많은 숫자이다. 그 30만 명이 아무에게도 말하기 싫은 아픈 과거를 가슴에 안고 평생을 살다가 죽은자도 있고 이 땅에 아직 많이 살고 있다.

1971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주한 미군이 6만2천여명 정도인데 2만명을 철군 단행 하였다. 그리고 추가로 더 할려고 하였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안보에 큰상처가 날 지경에서 전전긍긍 했다.그러나 미국 쪽에서 보면 자국 군대가 외국에 가서 언제 전쟁이 날지도 모르고 열악한 환경으로 고생하고 문란한 생활과 성병으로 건강이 악화되는 것 이대로 방치 해서는 안 된다는 미국의 여론에 못 이겨 시행 할려는 계획이었다.

우리 정부는 미군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감수하여야 할 시점 이여서 그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고 대대적인 기지촌 정화 작업도 하였다. 기지촌 여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미군을 위한 정화 운동 즉 주한 미군 붙들어두기 전투력 극대화를 위한 건강한 양공주 기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어느 분의 글에서 보니 청와대 주도로 10여개 부처 차관급으로 기지촌 정화 위원회를 만들고 힘 있는 사람이 내려가서 군산에는 미군의 쾌락을 위해 건설된 미군을 위한 클럽, 식당, 미용실, 각종상점, 환전소, 기지여성이 사용하는 500여 개의 방을 갖춘 주식회사 같은 위안부촌 아메리카 타운을 건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기지촌 여성의 인권은 더 무시되고 미국 군인이 즐거우면 되는 것이다. 성병 퇴치는 물론이고 그 여성들은 미군을 위한 국가를 위한 소모품이었다. 청결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일주일에 2번을 검진을 받아야 하였다. 검진대에 올라가서 남자 의사에게 여성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곳을 시키는 대로 보여 주어야 했고 검진증에 도장을 받아야 했다 그 도장 받은 검진증은 위안부 그들의 영업 허가증이다.

어떤 병사가 성병에 걸리면 관계한 여성은 바로 감금 시키고 그 병사가 나아야만 풀어 주었다 고도 한다. 그래도 원인 규명은 물론 왜 그러느냐 하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어야 하였다. 그렇게 사람대우는 물론 인권이니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사치였다 그러나 1964년 우리나라 외화 수입이 일년 일억 달러 정도일 때 그들이 벌어 들인 돈이 970만 달러 정도 약 10% 정도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국 정부는 외출 나온 병사들이 일본과 오끼나와로 가는 것을 안 가도록 기지촌을 업 그래이드 하여 국내에 붙잡아 둘려고 정부 차원에서 위안부들 모아놓고 영어를 가르치고 에치켓 교육도 시키고 아양 떨고 많이 즐겁게 해주라는 교육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어느 강사가 ‘여러 분들은 우리나라에 애국자 입니다 긍지를 느끼고….’하니 그렇게 좋은 일이면 자기 딸부터 시키지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세월도 많이 지났지만 이렇게 되도록 우리 온 국민이 어려웠던 시절 그렇게까지 하면서 미군을 국내 주둔해 주기를 바라기도 하였고 서독에 광부로 간호원으로, 월남전쟁에도 우리국군이 주저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가서 노력한 결실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내 나라의 안보를 미군이 지켜주기를 바라는 나라다.

 

 

 

 

이제는 옛날이야기. 4) 금기시 했던 이상한 관습들.

소달구

이제는 옛날이야기. 4) 금기시 했던 이상한 관습들.

어릴 때 어른들에게 듣고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여라고 하여 지키고 살았던 금기시하는 관습들을 써봅니다. 이런 것은 충효사상으로 이렇게 하여라 또는 하면 않된다 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것들입니다.

요즈음이야 전국이 일일 생활권이고 연일 각종 정보 매체에서 분초를 다투어 알려주고 있는 시대니 전국이 별로 다르지 않고 차이가 있었던 것들도 같아지고 있지만 교통이 불편하여 지방에서 서울에 가자면 몇날 며칠을 걸어서 가기도 하고 내가 어릴 때만해도 서울에 가는 것은 지금 먼 아프리카에 가는 정도로 어려웠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들은 경상도 내륙 지방에 내가 겪은 것들이나 전라도 쪽이나 바닷가 쪽 또 제주도 같은 섬 지방은 또 다른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오랜 관습에서 얻은 금기를 하면 살아가는데 삶이 부드러워지고 남을 배려하고 자기마음도 행복해지고 또 더 위생적이다 고 여겨지는 것들입니다.

이런 사항들을 지키는 것은 좀 불편하기도 하였지만 지키고 살았는 조상님들의 슬기를 느끼게 합니다. 좀 토템적이다고 여겨 지는 것도 있으나 아무리 바쁘게 살더라도 지금도 지키면 손해 볼 것은 없을 것 같고 각박한 우리생활이 좀더 여유로워 질 것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래 지키느라고 약간의 인내가 필요했던 것들 지금 잊지 않았는 것들 적어봅니다. 순서는 별 의미가 없고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입니다.

1 손톱 발톱을 밤에 깍지 않는다.

2 아플 때 국수를 먹지 않는다.

3 여자들 바느질 할 때 반드시 실을 잘라서 바늘에 꾄다.

4 문전을 딛거나 위에는 앉지 않는다.

5 해질 무렵 문을 고치거나 창호지를 바르거나 하기 위해서 손 대지 않는다.

6 생일에는 국수를 먹어라.

7 아이를 낳으면 대문에 금줄을 친다.

8 아침 일찍 여자는 남의 집에 가지 말아라.

9 오전에 상점에 갔을 때는 물건 안 사면 안 된다.

10 다리를 떨지 말아라 복이 나간다.

11 큰 일을 시작 할 때 고사는 반드시 지낸다 그때 돼지 머리는 중앙에 두고

12 붉은 팥은 귀신을 물리친다.

13 절에 갔다가 올때는 중간에 다른 곳에 들리지 않고 집으로 곧 바로 온다.

14 미운 사람이 다녀가면 소금을 확 뿌린다.

15 집안 사람이 멀리 외출하면 그날은 집 청소를 하지 않는다.

16 중요한 일을 하러 갈때는 미역국을 먹지 말아라.

17 이사 갈 때는 삼살 대장군의 방향을 알아서 그쪽으로 가지 말아라.

18 이사는 좋은 날을 받아서 가거라 아무 때나 가면 큰 재앙이 올 것으로 여긴다.

19 잠잘 때 동쪽으로 머리를 두면 오래 살고 남쪽은 부자가 되고 서쪽 북쪽은 그 반대이다고 여기고 반드시 지키고 살았다.

20 길 가다가 어른이 가는 길은 먼저 지나가지 않는다 특히 여자는 남자 앞의 길을 끊어 지나가면 재수 없다고 하였다.

21 윗 사람과 같이하는 술 자리에서 술잔은 머리 돌려서 마신다.

22 어른 앞에서 담배는 피우면 안 된다.

23 며느리는 어른들 앞에서 아이를 업으면 안 된다.

24 어른 앞에서 눈이 나빠도 안경은 끼면 안 된다.

25 부부가 외출 시에는 여자는 남자보다 2.3보 뒤 처져서 간다.

26 여자가 술을 마시는 것은 상것들이나 마신다.

27 여자들 아기를 배면 오리고기 닭고기 문어 등을 먹지 말고 상모서리에 앉지 말아라. 등등 생각 나는대로 적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중에 이해가 되는 것들도 있지만 아직도 그 이유가 궁금한 것도 있으나 가능한 한 지키며 불편하게 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와 아내는 어릴 때 어른들이 위의 것들을 지키며 지나시는 것을 보아서 될 수 있으면 그렇게 지키며 살고 있으나 간혹 위반하면 마음이 편하지를 않았습니다. 부부는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제보다 제 아내가 좀더 잘지킵니다.ㅎ

사람사는 세상 이야기 좀 무식한 이야기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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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럼깨기는 오랑캐들 머리를 부수자는 것.

정월대보름, '부럼' 깨기 준비하세요

부럼깨기는 오랑캐들 머리를 부수자는 것.

정월보름 아침 부럼 깨자고도 하고 부스럼 깨자고 하기도하며 좀 딱딱한 과일을 깨물어 먹는 이런 풍속이 있는데 어느 자료에 보면 조선 인조 임금 때 병자호란이 있은 후에 생긴 것이다고 한다. 우리 어릴 때 까지도 정월 보름날아침 잠에서 깨어나자 부럼 깬다고 하면서 좀 딱딱한 과일이나 곡식을 깨물고 그러면 일년 동안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부럼 깨는데 쓰이는 것으로는 호두, 밤, 땅콩, 볶은 콩, 등이 쓰이는데 처음에는 호두가 쓰였다. 그러나 그 호두가 많이 생산이 안 되니 아마 대용으로 밤도 쓰고 땅콩도 쓰고 한 것 같다. 요즈음은 세계화가 되어 각국들의 먹을 거리들이 수입되어 아몬드도 캐슈넛도 쓰이고 있다.

병자호란때(1636) 오랑캐 청 태종은 10만대군으로 쳐들어 왔을 때 온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다 무자비한 그 놈들에게 당한 치욕은 온 백성은 물론 인조도 삼배구고두라는 치욕스러운 모습으로 청태종에게 꿇어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을 하였다. 놈들에게 소를 비롯한 가축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먹히고 재물은 물론 먹을거리도 강탈당하고 여인들이 겪은 수모는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보이는 대로 능욕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당시에 조선의 여인들은 그 놈들이 보기에는 천사처럼 아릿다워서 수천명을 데리고 가기도 하였다. 아내를 잃은 남편이 딸을 잃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한 맻힌 분노로 만들어진 풍습인 것 같다. 그래서 호두를 그 해의 벽두에 깨물어 바수어먹는다.

호두는 발음으로 호두(胡頭) 즉 오랑캐 놈들의 대가리다 그것을 깨물어 먹는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것이 믿을 수 있는 것 같다.

온 백성들의 분노심으로 이런 풍속이 만들어진 것 아닌가 한다. 겪어보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렵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요즈음과 달리 창 칼로 사람을 찌르고 자르고 하여 많은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너무나 끔직스러운 행위이다. 무지막지한 병사들이 농업위주의 농경시대에 겨우 마련 하였으나 일년 먹기도 모자라는 양식을 빼았길 때 심정 그리고 조금이라도 걸그치는 것은 노인이건 어린아이이건 칼로 베어 죽여 버리고 여자는 닥치는 대로 능욕하고는 성이 차지 않으면 목숨조차 죽여버리는 행위를 당하였던 힘없는 나라의 서글픔을 상기시키게 하는 풍습이다.

여자가 흉악스러운 놈에게 몸을 바쳤을 때의 심정을 상기해보라, 그 당시는 정조가 회손되면 죽어야 하는 시대이고 혹여나 그 놈의 씨가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 마음이 어떻 하겠나 이런 치욕으로 인해서 생긴 풍습이라고 여길 때 우리의 생각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해마다 정월초 보름 경에는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서는 부럼 깨는데 쓰일 과일을 나름대로 소비자들의 구매의욕을 일으키게 해서 팔고 있고 우리는 위와 같은 사연으로 만들어진 것도 모르고 무슨 축제인양 그냥 즐기고 있었다.

마음으로만 호두를 오랑캐 대가리로 여기고 그해 벽두에 깨물어 먹기만하면 나라가 강해지나? 죽기살기로 군사장비도 준비하고 강한 군대를 만드는 강병정책을 하였다면 그후 여려 수난은 없었을 것이나 조정에서는 당파 싸움이나 하고 중국만 섬기는 사대주의로 다스린 나라의 말로는 결국 일본의 식민지경험까지 하였는 나라가 되었다.

그때 병조판서 김시양은 그 낌세를 알고 인조에게 군비와 군사를 길러 준비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김자점은 아닙니다 이 평화로운 시대에 그럴 필요 없다고 오히려 그를 모함하여 김시양은 벼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난 후 1636년 병자년 12월에 그 곤욕을 치렀다.

지금 우리 주변정세와 정치권이 하고 있는 모습이 그당시와 별로 다르지않다.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이냐?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이고 그보다 더 치욕스러운 것은 짓밟히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힘을 길러야 한다 지금 시대에 국가의 힘은 경제력도 큰 힘이지만 그에 상응하는 군사적인 힘이 더 중요하다.

지금 강대국들이 첨단무기 개발에 열중하고 있는 것도 또 일본 같은 나라는 강한 군사시설을 하고있는 것 그것도 부족해서 지금 미국과 과거사도 모두 잊고 동맹이니 하면서 결속하는 것을 보고있고, 국민들 먹고 살기가 어려운데도 무기개발에만 힘 쓰고있는 북한도 모두가 그런 맥락이 아닐까? 이런 틈세에서 치욕을 당하지 않을려면 하루속히 이정국이 끝나고 안정되어 국방을 개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욕심이 끝없던 여자들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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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끝없던 여자들의 최후.

여자의 집념은 한으로 변하고 그 한이 세상을 놀라게하고 그 놀라움으로 인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역사상으로 유명한 여인이 비참하게 최후를 마감한 여인들, 클레오파트라, 중국의 양무조와 양귀비 그리고 조선의 장희빈 그들의 최후를 이 시점에 한번 생각해보았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대제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로마의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두남자를 여성이라는 무기로 차례로 접근한 것은 사랑보다는 그의 욕심을 달성하기 위한 야심의 정치술이었다. 그리하여 영토를 넓히고 태평성대를 잠시 누렸으나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적군의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안토니우스 묘 옆에서 자살한다. 그렇지만 이집트국민들은 그가 그렇게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을것이다.

또 중국 당나라 양무조 또한 그녀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일개궁녀가 태종과 그의 아들 고종의 사랑을 받고 드디어는 황후가 되고 최고권좌 황제에 까지 올라서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까지 되었다. 일게 목재상의 딸로 태어나 67세때 황제까지 오른 것은 오직 여인의 한과 욕심으로 이룬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최후는 재상 장간지의 명을 받은 친위군 사령관에게 퇴위되어 여황제라는 직위도 삭탈 당하고 상양궁에서 82세로 쓸쓸히 죽는다.

동양에서 빼어나게 아름다운 여자에게는 의례히 붙어다는 “양귀비처럼…” 이라는 말로 표현 하는데 그 양귀비는 당나라 마지막 황제 현종과 함께누린 호사스러운 여인으로서는 전무후무할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그의 6촌오라비 양국충을 재상에 오르게 하며 권세도 누렸으나 그가 총애한 안록산이 이끄는 반란군은 이모든 것이 양귀비 때문에 황제가 실정한 것이다고 여겨 그를 죽이라는 성화에 현종은 눈물을 먹음고 양귀비를 목매게하여 화려하였던 일생을 마감했다.

조선시대 장희빈 또한 첩의 딸로 태어나서 궁녀로 들어와서 숙종의 사랑을 한때 독차지하며 인현왕후와 지나친 세도다툼을 하며 원자를 낳고 여인으로서 누릴 온갖 호사와 권세를 누리며 지났으나 결국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성불구로 만들기까지 하는 악녀로 된 것은 그의 멈출 줄 모르는 욕심과 한 때문이었다. 그의 최후는 서인이 되어 사약을 먹고 한 많은 여인으로 죽게 되었다.

이세상의 모든 여인이 나도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고 싶다고 하면서 소원하는 여인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여인이 위에 몇 여인과 그 외에 또 많은 여인들이 있다. 하나같이 이것이면 되었다 더 이상은 바라서는 안 된다 하는 것, 그것을 못해서 일어난 처절한 한 삶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가는 여인은 앞으로도 있고 그 후에도 수없이 생겨날 것이다.

이것은 여인들이 갖는 욕심이고 그들이 가슴속에 쌓이고 쌓이는 한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과연 여인들의 행복은 진정 이런 것은 아닌데….    한 남자의 끝없는 “여보 사랑해요.”가 진정한 행복이고 그렇게 산 여인이 잘 살은 것이 아닐까?

 

세상이야기 (10) 당나라 공주의 정신 나간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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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공주의 정신 나간 사랑이야기.

한 좀도둑이 잡혔다. 심문관이 “이노~옴” “어디서 훔쳤는냐?” 도둑이 훔친 물건 중에 대단한 신분이 아니면 가지지 못하는 보침(寶枕)이 있었다.심문관은 무섭게 다그쳤다. 채찍을 내리치며 “사실대로 실토하지 못할까?” 드디어 “절간에서 얻었습니다.” 그러나 심문관은 믿을 수가 없었다. “바른대로 말하라 보침이 절간에서 나오다니….?” 하며 곤장을 친다. 그러나 도둑은 “틀림없습니다. 아이구 홍복사에서…”하며 비명을 지른다.

드디어 홍복사 어느 스님 방에서 훔쳤다고 확인이 되었다. 이 보침 사건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고 황제는 심신이 괴로워 밤잠을 설치고 삶에 허무를 느끼고 황실이 발칵 뒤집어졌다.

홍복사는 황제의 명을 받아 불경을 번역 하고있는 절이었다. 가서 확인하니 그 방은 변기라는 학식 높은 젊은 학승의 방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와 연이 닿았다고 하면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심문관의 끈질긴 추궁으로 태종 황제의 17황녀 고양공주의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녀는 당나라 초기에 명신이고 태종의 오른팔이라 하는 방현영의 며느리이다. 남편은 방유애이고 유애는 학문이 얕고 교양이 별로이고 반건달 같은 사람이고 고양공주는 아름답고 사치스럽고 학문을 좋아하며 좀 교만한 서로간에 맞지 않고 별 정이 없었다. 부모의 뜻으로만 혼인하던 시절 정략적으로 맺어진 부부 였다.

어느날 공주와 유애는 장안 근교에 수렵을 나가서 유애가 공주를 머물게 할 집을 찾다가 보니 자그마한 암자가 있어서 “거기 누가 없나 귀인이 오셨는데…” 하고 불렀더니 젊은 학승이 “어서 오십시요…” 하며 합장하며 나왔다. 허술한 승복 차림이지만 빼어나고 헌칠한 용모에 명석해 보이는 변기라는 학승이 단번에 공주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았다. 이때 공주는 16세 변기는 18세였다 남편 유애는 “어서 방 한칸 내어 놓으시요” 고 하고 보니 방은 누추하기 이를 대 없어 유애는 얼굴을 찡그리며 “다른 방 하나…” 하나 공주는 흔쾌히 방 안으로 들어 갔다.

항상 완력 만 있었지 문학적 소양 예의 범절 교양 같은 것 없는 유애에게 불만이 가득 했었는데 자기와 같이 교양 있어 보이고 명석한 학구적인 분위기에 매혹 되었고, 변기는 인적 드문 암자 에서 혼자 면학의 세월을 보내던 청년 앞에 눈 부실 만큼 현란한 아름다운 미녀 그것도 귀인이 나타나서 마치 불설에 극락에서 있을 여 보살이 자신의 젊은 심신의 번뇌를 구해 주고자 자비의 손길을 건네는 것처럼 여겨 졌다.

당서, ‘공주 열전’에 보면 ‘그때 공주를 수행 했던 시녀들이 암자에 임시로 자리를 마련하자 공주는 변기를 청 하여 그곳에서 두 사람은 당장에 청춘을 뜨겁게 불 태웠다. 그때 남편 유애는 아름다운 여주인의 충견(忠犬)처럼 밀회가 밖에 새 나가지 않게 다른 시자의 접근을 막고 애인과 나누는 공주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호위 했다’ 고 되어 있다 고 했다.

두 사람은 그 후부터 7년 동안 잦은 밀회가 있었고 이 정열적인 공주의 격렬한 사모에 이끌려 변기는 밀회를 거듭 할수록 파계에서 오는 정신적 갈등과 번민에 빠져 학승으로서 교학 연구에 바치고자 하는 포부와 지적 정열 사이에서 심적 고뇌로 미치도록 괴로웠으나 막상 공주를 만나 면, ‘살아있는 아름다운 여 보살!’ 그의 포옹에 현혹 되어 무간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이라도 마다 않고 지금의 현실에 빠졌다.

한편 공주는 남편께 고마움의 표시로 그녀의 아름다운 시녀를 유애에게 바쳤다. 유애 또한 마음대로 가지고 놀 마음에 쏙 드는 아름다운 여인을 받아서 하루 하루가 너무나 즐거웠다. 이상한 부부사이 남으로 하여금 서로 도우며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공주는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사랑하는 변기에게 자신이 언제나 베고 잤던 향기로운 보침을 사랑의 정표로 주었다.

변기는 그때 현장 스님이 인도에서 구해온 책들을 번역하는 불서를 편찬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는 학승이었으니 대단한 사건이었다. “공주는 가택 연금시키고 파계승 변기는 요참의 극형에 처하도록 하여라” 는 황제의 칙명이 내려졌다. 요참(腰斬)의 형이란 발가벗겨 도마 위 같은데 눕히고 허리를 동강내어 죽이는 형 이다.

처형 당할 때 공주는 권력자의 옹호를 받았고 변기는 공주를 겁탈한 나쁜 중놈으로 되어 장안성 과 인근 지역에서 구경 온 많은 사람들이 “더러운 놈, 중의 탈을 쓰고…” “유부녀를 겁탈 하고…” “죽여라, 거기를 잘라라” 등의 욕을 먹으며 죽었다고 한다. 한편 겁탈 당한 것으로 처리 할려고 시녀들을 가두고 했으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온갖 의혹심 섞인 말들이 첨가되어 아름다운 공주와 까까머리 중의 정사 장면 보침의 용도를 부풀려서 술집 밥집 저자거리 등에서 안주거리가 되어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 후 공주는 사랑하였던 정부를 극형인 요참형에 처한 부황을 미워하고 복수하여 변기의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앙칼지게 다짐하고 땡중 등과 놀아나는 반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한다.

자고로 소문은 절대권력도 막지 못하고 여자의 집념은 큰일을 내며 한을 품으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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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의 비색을 사라지게 한 조선의 양반들.

 

청자의 비색을 사라지게 한 조선의 양반들.

도예가 조기정씨에 대해서 쓴 글에 보면 고려 청자의 아름다운 빛깔을 내게 하는 원료 즉 청자유약은 바다에서 나는 꼬막 껍질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청자의 색갈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유약을 발라서 굽고 그 유약은 외국에서 사서 쓰기도 한다고 한다.

꼬막을 높은 온도로 구우면 가루가 되고 그것이 청자유약의 원료로 쓰인다고 하였다. 그것을 그분이 밝혀낸 것이다.

밝히려고 애쓴 그분의 말을 읽어보면 옛 도요지를 찾아 다니며 보면 깨어진 도기들 조각 부스러기들이 너절하게 있어서 꼬막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어느 도요지 석실에서 꼬막껍질이 버무려진 것을 발견하고 꼬막 껍질을 연구끝에 껍질가루를 발라서 이렇게 저렇게 시도 해보고 또 온도도 높게, 낮게 굽고를 수없이 하여서 1966년도에 빛깔을 제데로 내는데 성공하여서 국립박물관장에게 인정을 받고 그 해 8월 4일자 세계경제신문 문화면에 <최소 가치의 훈장>제하의 기사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말할수 있다고 하면서 일본은 그 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조선의 도공들을 끌고 갔으며 그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로 국제무역창구를 열었고 그것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공헌을 했다.

독일의 크루프 철광이 세계1.2차 대전의 동력이었고, 일본은 2차대전의 동력이 찻잔이라고 한다. 네델란드 상선은17세기를 전후하여 약200년간 한해에 7백여척이나 장기항(長埼港)을 드나들며 도자기가 주종으로 무역선들이 다녔다고 한다. 네델란드, 프랑스, 러시아의 황실과 귀족들 기호품으로 일본도자기를 썼다고 한다.

그 도자기는 한국의 도공들이 만든 것이고 일본을 상업국가로 만들었다.물론 일본도 그만큼 도공들을 우대 했다고 하였다.

그런 도공들은 조선에서의 대우는 최하위계급인 천민으로 백정들과 같이 소(所)에서 살았다. 왕궁 관아 사찰 부호들의 요구에 따라 몸이 부스러지도록 그릇을 만들어 주면서도 평민들이 사는 마을에 살지 못하고 산간 벽지에 특별히 모아놓은 곳에서 살았단 말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천민 중에도 천민으로 말이다. 뜻하지 않게 아름답고 예쁜 그릇이 구어져 나오면 그것을 몰래 깨어버렸다고 한다. 그 그릇을 양반에게 바쳤다가는 그것을 바친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

양반들은 그에게 그와 같이 아름답고 예쁜 그릇을 수없이 만들라고 하나 그것이 그렇게 된 것은 가마속의 불의 조화로 이루어 지는데 많이 만들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그렇게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며 거느리고 있는 종들로 하여금 두둘겨 패 죽인다.

때문에 개중의 똑똑한 도공은 가마를 등지고 산을 일구어 잡곡 밥이라도 먹을려고 그래서 농사꾼으로 평민 대접받으며 살려고 화전민이 되기도 했다. 자기는 천한 사람이지만 자식에게만은 그토록 처절한 천민 도공을 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니 고려 청자의 아름다운 비색이 전해질리 없고 그러므로 고려 청자의 맥은 끊켰다. 이 책임은 도공이 아니고 조선시대의 선비들이라고 할까 그 시대가 책임을 져야한다. 그런데 내 어릴 때 학교 교육은 도공이 자기만 알고 가르켜주지 않아서 맥이 끊어졌다고 하며 도공이 나쁜 놈으로 배웠다.

그러나 일본은 위에서 말했다 시피 도공들을 대려가서 호의 호식 할수 있도록 대우해 주고 그들이 좋은 조건에서 연구하고 일 하도록 배려를 한 결과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 할수 있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 그렇게 끌려간 대표되는 심수관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분은 1598년 정유재란 때 끌려갔고 본명이 심당길이라고 하는데 12대 후손이 심수관이고 그후 그 후손을 모두 심수관으로 부르고 지금 심수관이라고 알고 있는 분은 15대손이고 본명은 심일휘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심수관 15세다. ㅎ

*이 글은 도예가 조기정씨에 대한 글과 네이버 지식을 참고하여 쓴 글.

조선을 떠나는 일본인 4) 경성이 조선인의 서울로.

조선을떠나는일본인4)일본의경성이조선인의서울로.

일본패전후경성의모습은활기를되찾고있었다.

조선의한성이근반세기동안일본인들의일본인을위한도시가되어그이름도경성으로바꾸고조선착취의본부로키운그들에게는고향처럼안락하였던경성은하루가다르게조선인의서울로변해가고있었다.

전쟁물자대주느라고생필품도귀하고어려웠던경성은8월말부터푸줏간에오랫동안구경하기어려웠던고기가걸렸고술집에는술이넘쳐났다.

닫혔던카페에서는전쟁선전가요가아닌대중음악이흘러나오고암시장에는옷감이쌓이고남자들옷은칙칙한것에서말숙해지고여자들은볼성사나운몸뻬에서치마를입기시작하였다.

곳곳에‘왜노(倭奴)추방’이라고써붙인전단지가여기저기붙어있고일본기업의말단직원이었던자가무슨위원장이라고적힌완장을두르고다녔고일본인과장님은조선인에게가재도구를팔고있다.

그야말로세상이뒤집혔다.

한목노린투기꾼들의사재기로9월들어물가가천정부지로뛰어오르고일본인봉급자들이실직하니생활비로머든지내다팔아야하고대경성의엘리트로자부하던일본인들도죽지안으려면자존심도버려야하였다.

남산어귀에있는그들의존엄인일본신사는‘대한민회’라는정체도모를간판이걸려있고11월에는일본식이름동네이름도조선식으로바꾸어져서길찾기도어려워지고관공서에서는각종서류에쇼와,메이지등연호도쓰면접수도안해주고경성은어느새낯선곳으로바꾸어졌다.

조선착취에여론몰이경성일보도11월1일자로편집부가조선인으로바꾸어졌다.

1927년부터JODK라는호출부호로경성의일본인의눈과귀가되어주던경성방송국도1945년10월말부터일본어와조선어양국어로방송하더니곧조선어로만하였다.

조선에서는제국의언어도발붙일곳이없게되었다.

한편평양은1945년8월27일부터모든방송에일본어가배제되고조선어와음악만흘러보내니갑작스런정보차단으로일본인사회는많이불안해하였다.

결과유언비어가남한보다많이난무하였다고하였다.

1920년에창간된평양지역일간지헤이조마이니치(平壤每日)의8월28일자마지막판은언문(한글)으로나왔는데톱기사제목이‘일본정치기관소멸’이라고되어있었다고당시아사이신문평양지국장부라쓰네오는증언을하였다.

이와같이북한은남한보다빠르게변해가니그곳의일본인들은남한으로우선내려온사람과바로귀국하는자들이많았고11월이되자북한에서탈출해온일본인들의행열이끊이지않았다.

이들은경성부소재14개수용소에2000여명이분산수용되었고걸인과다를바없는행색으로과일가게나과자가게를들여다보고있는아이들의모습은처량하기까지한얼마전까지와는너무나다른주객이전도된일본인으로서는눈물나는모습이다.

미군병사들허리춤에바싹붙어서온갖교태를부리는일본젊은처자도흔하게볼수있었다고한일본인의증언도있었다.

그리고집앞의문패에는일본인명에서조선인문패가늘어나고조선식간판이하나둘씩생겨나고하루가다르게변해졌다.

그런데더기가차는모습이있었는데일본인들이일본으로돌아간후하카다(博多)항에서약40분거리에있는애국부인휴양소라는곳에서귀국한사람들의검역및치료를하였다는데패전후소련인또는여타민족의아기를가진여인들의낙태시술도하였다고하였다.

북한은소련군사들이진주하여날뛸때그곳의열성조선인의제보로일본인들의가정에들어가서돈될만한물건들을모조리빼앗아가고일본여인들도마구능욕을하여젊은여인들이머리를빡빡깎아서모면할려고애쓰기도하였고그것이겁나서일찍남으로온일본인들은미군을상대로해서연명하는사례가흔하였다는증언과연결이되는말일것이다고여겨진다.

이렇게지난동안의정복자로서누렸던일본인은그힘으로온갖착취와영광이일찍이조선으로온자들은본인,아들그리고손자까지누렸으나그최후는비참하다고할정도로처참한꼴로되어재산과명성모든것을두고돌아가지않으면안되었고수백년동안의한성도그이름마저경성이라는일본식명칭으로불리어왔는데서울로바꾸어졌으나수십년동안그들이의식에맞게그들방식으로그리고그들만이편하게살도록만들어진경성에서모든진가는다빨아먹은껍데기만남은이제는서울이우리에게돌아왔지만그모습은볼품도없고우리가살기에는너무나많은노력이들어가야하는도시서울이되어돌아왔다.

그렇지만우리서을이되기에는상당한긴세월이지났다.

*이로서조선을떠나는일본인을마칩니다.

생뚱맞은소리를하였습니다.그놈새끼들그토록괴롭게한놈들의떠나는모습을논할값어치가있는냐하는

말을많이들을글이나다른한편으로는이것이인간세상살아가는반복의모습이아닐까하는생각을하면서썼습니다많이응원해주시어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