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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 꽃이 활짝 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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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 꽃이 활짝 피었어요.

산책길에서 보니 밤나무가 꽃이 활짝피었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단오날을 즐기시던 생각을 하였다.

그러니까 6.25전쟁이 끝나고 쯤인데 그때는 단오가 일년 중 여자들이 하루를 즐길수 있는 날이었다. 동내 남정내들은 단오 전날 짚으로 그네 줄을 매어 줄려고 어른 팔뚝만큼 굵은 그네 줄을 만들었다 물론 여럿이 모여서 짚도 품질이 좋은 것을 몇 짐을 지게에 지고와서 정성껏 비틀어 꼬아서 만들어 뒷산 오래 묵은 밤나무 튼실한 가지에 높게 그네를 맨다.

부실하면 사랑스런 자기아내를 비롯한 연인들이 떨어져서 다칠수도 있기에 정성을 들여서 끊어지지나 않을까, 또 다른 인근 나무에 닿지나 않을까, 그네를 맨 가지가 부러지지나 않을까 등등 염려하며 정성스럽게 매어 검증까지 꼼꼼히 해서 마친다.

다음날 단오날에는 그네에 동네 젊은 여인들 누구나 와서 하루를 마음껏 즐겁게 노는 날이다. 그날은 시부모님 식사걱정도 어린것들도 할머니가 아니면 남편이 봐주며 하루를 즐겁게 쉬게 하였다.

어머니는 일찍이 창피라는 풀이 있는데 그것을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농안에 간직해두었던 새옷을 꺼내어 입으시고 향기가 좋은 청궁이라는 약초한가지를 꺾어서 옷고름에 꽂아서 들뜻 기분으로 나가시면 나도 엄마따라 가서 하루종일 졸졸 따라다녔다. 100여호 거의가 우리성이여서 서로가 아지매 할매 동생 등 친척들이었다.

밤나무 밑에는 벌써 많은 어머니와 머리를 길게 땋은 누나들이 와서 재잘거리며 즐기고 있었다. 하루 동안 그 밤나무는 수없이 타는 그네로 피곤하게 지탱해주어야 했다. 그때들은 말인데 그래야만 정받이가 잘되어 튼실한 밤이 많이 열린다고 하였고, 약간은 비릿한 밤꽃향기가 건강한 한창 나이의 남정내 냄세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그후 어른이 되어 그 말뜻을 알았다.

왜 하필 매년 밤나무에 그네를 매었느지 그당시는 무심코 지났으나 그후 장성하여서야 그뜻을 알았고 그 향기를 맡으며 곱게 입은 한복들 긴 치마가 공중으로 몸이 날라 올라갈때 바람에 몸을 감싸고 나부끼는 모습은 어린 마음으로 보아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런 밤나무와 고생스럽게 살았는 우리 어머니대의 아련한 사연들이 있는 5월의 밤나무 꽃이 활짝피어 아름답게 보이는 밤나무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언제 있기나했나다 조금은 안타깝고 서운하기도 하다.

밤은 땅속에 밤알을 심으면 다른 식물과 달리, 싹이나는 것과 동시에 뿌리가 나와서 그것으로 영양 섭취를해서 자라고 밤알은 그대로 남아서 그 나무가 커서 밤이 열릴때까지 썩지 않는다는 말이있다. 믿기지 않는 말인데 그렇다고 한다.

모든 식물들은 씨가 싹이트고 자라는 동안 씨가 가진 영양을 먹으며 뿌리를 내리는데 밤은 그렇지않다고 하고 또 신주를 밤나무로 만들기에 밤은 노인이 심어서 그 나무가 크면 그 나무로 심은자의 신주를 만든다고 하였다.

또 있다 밤나무는 질기고 단단하며 타닌성분이 들어 있어서 잘썩지 않아 철도가 개발되고 초창기에 철도침목을 밤나무를 많이 썼다고도 하였다. 그런 밤나무에 대한 내가 겪었던 오래 묵은 추억과 말들을 곱씹으며 산길을 걸었다.

그리고 젊을 때 내가보기에도 키도 크시고 계란형의 어머니 예쁜 그당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는 돌아 가신지 3년이되었는 내 어머니생각도 하면서 이글을 쓴다.

사람은 자기가 겪어보아야 이해가 된다. 늙으신 어머니 다리가 아파서 병원으로 모시고 다니고 늙으셔도 손톱물도 들이고 돌아가실 때까지 얼굴화장도 하시며 머리염색도 새까맣게 하시며 사실 때 때로는 너무하다 이제는 마음도 좀 늙었으면 싶은 생각도 하게하신 아이들을 어렵게 하시기도 하시던 어머니였다. 병원생활도 자주 오래 하셨다.

이제 내가 늙어보니 몸이 늙어서 추하게 보이는데 약간의 외모가 단정하게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해서는 오히려 추한늙은이로 보여질것이다. 아름답게 늙고 건강하게 살다가 가고 싶은데 그래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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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한 제주도여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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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한 제주도여행 1.

지난 주말 28일 아이들과 제주도에 가서 4일을 있었다. 제주도는 운동하는 모임에서 여럿이 다녀오긴 했으나 별로였고 그거는 하도 오래되어서 지금 오라 아라라는 골프장이름 기억뿐이었는데 여행이라고 할 여행은 처음이다.

아들이 지난달 초에 아부지 작년에 고생하셨는데 어디 휴가 겸 저희들과 제주도 갑시다 했다 전에도 일년에 한 두번씩 저들과 함께 이곳 저곳을 다닌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일년 동안 내가 다처서 못했는데 가잔다.

나는 선듯 그래 그거 좋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따라 다니는데 힘들 것이다는 생각이 들고 다니는것이 겁나서, 또 늙은 우리 때문에 지들이 불편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경비도 만만치 않을 것 같고 선뜻 그러자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래 좀 생각해 보자 했더니 그후 며칠이 지나더니 28에 예약을 모두 해 두었으니 그렇게 합시다 한다.

내 아들이지만 나와는 많이 다른 무엇이든 박력있게 처리하는 아이인데 이번에 또 그렇게 했다.않된다 소리도 못하고 “그래 애~”라고 하며 성사된 여행이다. 아내도 나와 같이 중국으로 다니며 볼 것도 많이 보고 항상 하는 이야기 중국 유명지를 많이 보니 한국 명승지는 장난감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며 별로로 여겼으나 막상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보니 너무 좋아했다. 나도 덩달아 찜찜하던 기분은 간곳없고 아들네와 가는 여행이 즐거웠다.

누군가가 했는지는 몰라도 ‘인생은 여행이고 여행은 인생이다. 여행은 체험의 보고이며 아름다운 추억의 산실 또 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하며 영혼을 살찌운다’고 했다 그 말중에 영혼을 살찌운다는 말이 내게는 너무나 와 닫는 문구다. 그냥 무엇을 보고 예쁘다 좋다 보다 그것을 보고 느끼는 마음속의 물결이 영혼을 살찌게 하는 것 아닐까? 여행이 별거냐 가고 오고 다니면서 보고느낌이 풍부하면 그것이 가장 좋은 여행이 아닐까.

6학년이된 큰손자 이제는 너무 어른스럽고 세상에 태어난지 엊그제 3돌이 지난 막네 손자놈 이제는 비행기도 잘 타고 말도 조금씩하고 어린이 집에 다니더니 서로 협조하는 것 배워서 적응 잘하는 기특한 놈이다. 지도 아기인데 뒷좌석에서 우는 아기보고 아기가 운다고 어서 달래주라고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이야! 아이야” 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도 보이고 무언가를 지껄이는데 에미는 알아듣는 것 같으나 나는 모르는 말이다.ㅎ

5시 조금넘어 도착했는데 우리는 9인승 승합을 렌트해서 저녁을 먹고 ‘절물자연휴양림’ 이라는 곳에 도착하니 8시가넘었다. 휴양림 이름이 이상하다 절물이 무슨 의미일까? 주욱 주욱 곧은 깔끔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에 숲만큼 깔끔한 숙소가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여 지어져서 춥지도 덥지도 않고 또 파리 모기들도 아직은 없는 좋은 계절에 행복하다고 해도 될 여행이었다.

하루밤을 자고 아침산책길에서 보니 빽빽하게 들어찬 그 멋쟁이 나무들은 삼나무란다. 절물이란 이름의 유래는 그곳에 예전에 절과 물이 있었다고 절물 이란다. 머 그렇게 멋대가리 없이 지어진 이름인지.ㅎ 그러나 절은 없어지고 산중턱에 약수터가 있는데 그물이 제주에서 가장 좋다고 하였다 없어진 절 대신에 약사암이란 암자가 있는데 이른 아침인데 스피카로 염불소리만 청아하게 들리고 중도 사람도 볼수는 없었다.

차라리 삼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빽빽하게 들어찼는데 삼나무휴양림이고 하면…. 나 혼자 내방식의 생각이다.ㅎㅎ

*참고. 위치. 제주시 명림로 584 (산림청소관국유림). 전화. 064 728 1510. 홈페이지.http://jeolmul.jeju.go.kr  시설사용료. 6인실기준 비수기 4.5만원 성수기 8만원 정도. 4인실 6인실 8인 12인 20인실등 다양함

소래포구 어시장이 다 탔다고…

소래포구 어시장이 다 탔다고…

또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소래포구 어시장(재래시장)이 220여점포가 18일새벽에 탔다고한다.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들이 조개와 꽃게를 한상자 사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소래 갔다가 왔다고 하였다 소래가 어디 있노? 했더니 인천에 있다고 하였다. 며칠을 두고 먹었다 그후 우리는 놀기도 할 겸 가보자고 하면서 인터넷에서 가는 길을 찾아서 전철을 타고 가서 회도 먹고 김장할 젓갈도사고 하였다.

그리고 그후 간혹 아이들과 함께도 가고 우리둘은 자주 다녀오고 했는데… 참 무서운 세상이다. 나는 아무리 잘해도 남 때문에 죽기도하고 거지도 되고 하는데 한사람이 잘못으로 일어난 불로 220여개의노점 상가가 다탓다고 하니 그 많은 열심히 살아가는 서민들이 거지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집이 그집 같은 많은 상가중에서 고른 젓갈집 상냥한 할머니가게도 탔겠지…

그때 쓴 내 블로그의 글을 찾아 읽어보았다. 그때는 내가 한국에 온지도 얼마되지 않아서 아직은 남의나라 같을 때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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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나는 아직도 이곳에서 차 몰고 다니는 것 시내에는 몰라도 멀리 나가기가 버겁어 아내와 둘이서 전철을 3번 갈아타고 소래 시장에 도착하니 2시간 반이나 걸렸다. 차내가 복잡하지 않으면 아무데나 앉았다가도 복잡해 지면 경노석으로 간다 나 때문에 젊은이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이다. 노인들 무임 승차 혜택을 톡톡히 받으며 지정된 경노석에 앉아서 지난 세월 보낸 기억을 더듬었다.

경찰서는 지나가도 무섭고 면소나 군청에가면 큰 혜시나 베푸는 것 같이 고압 적이었던 공무원들, 열차를 타면 서서도 몇 시간씩 다녔던 시절,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어릴 때 보리 베기 하다가 낫에 크게 베어서도 병원에 갈 생각도 안하고 된장 발라서 나은 왼손가락의 큰 상처는 아직도 보면서 지난다.

뼈 빠지게 일해도 하루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자유니 인권이니 하는 말은 듣기는 했으나 그것을 누리면 얼마나 좋은지 즐거운지 몰랐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즘은 강간한 놈도 사람 죽인놈도 인권 지켜주는 세상이 되었다. 늙었다고 기차도 공짜 태워 주고 적지만 푼돈도 국가가 주는 이래 좋은 세상이 되었고 온 국민이 보험 혜택으로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는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도 살기 좋은 나라이다.

추석이 몇일 남아 있지 않고 모두들 바쁜 사람들이여서 인지 소래 포구역에 내리는 사람들 거의가 노인들이다. 포구 시장에는 아래와 같이 많은 종류의 생선들이 있었고 파는사람 사는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가게도 많고 사람도 많고 싱싱한 꽃게, 조개, 갈치, 고등어, 문어 그리고 커다란 왕새우 등등 많이 있고 맛있게 보이는 젓갈도 미식가들 유혹하고 물통 속에 가두어져 있는 이름 모를 물고기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러다 보니 저 만치에서 고깃배 한 척이 도착하고 좀 있으니 배에서 내린 꽃게 등 해물들이 공판장에서 팔려 상점으로 운반되고 있다. 우리와 같이 부부로 온 사람도 있고 손 수레를 끌고 온 몇 무리의 할매 부대도 보이고 간혹 젊은 아낙들도 보였다. 우리는 조개와 젓갈 꽃게 몇 마리를 사서 오면서 보니 입구쯤에 60년 전에 먹어보았던 국화빵을 젊은 아낙이 굽고 있었다 아니 이거 생선시장에 왠 국화빵! 우리는 오면서 먹을려고 한 봉지를 삿다.

그런데 오면서 먹어보니 옛날 그 맛이 아니다. 모양만 같고 굽는 방법이 같으나 맛이 영 아니다 내입이 달라졌는 것이다. 노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고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가 기구도 새것이더니 더 연구하고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의 입이 얼마나 총명한데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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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부지 기분이 너무 좋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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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부지 기분이 너무 좋은날.

30개월된 손자가 지 엄마가 데리러 온다는 전화를 할머니가 받는 것을 빠안히 쳐다보더니 벗어둔 양말과 윗옷을 안고 오더니 할머니 앞에 놓는다 입혀주니 내게로 오더니 내 손을 꼭 잡고 일어서라고 끈다. 아마 같이 가자는 것 같다. 그렇게 끌려서 현관문을 열고 아내와 셋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그래도 손을 놓지 않는다 그렇게 끌고 가더니 지가먼저 어미에게 안겨서 타고는 나도 타라고 “타 타” 하였다.ㅎ

보통은 할머니와 함께 내려가면 며느리가 받아 뒷좌석의 아기 카시트에 앉힌다 내가 집에서 내려다 보면 아내는 서서 지켜보다가 며느리차가 안보이면 올라오는데 오늘은 나도 그 놈에게 끌려 내려갔다가 왔다.

손자는 나를 부를 때 “하부지”라고 한다 ‘할’ 발음이 어려운 것 같다.ㅎ 아직 나는 몸이 덜 나아서 몸이 가볍지 못한데 갑자기 끌려 내려가서 추운데 벌을 섰다. 그래도 어린 것이 할아버지를 좋아해서 제집에 함께 가자고하는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참 좋다.

할미는 느을 그놈 자식 나는 지가 오는 날이면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다가 어린이집 차에서 내리면 추울가봐 보듬어 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와서는 손 씼기고 지가 좋아하는 치즈, 요플레, 쵸콜렛도 챙겨 먹이고 티비 어린이프로 켜놓고, 컴켜서 딩동뎅도 열어서 함께 놀아주고 하는데 할아버지만 좋아한다고 불평을 한다.

손자는 일주일에 두번 어린이 집에서 우리 집으로 와서 두어 시간 있다가 가는데 어쩌다가 감기라도 걸려서 어린이집을 가지 않는 날은 그 주일에는 만날 수가 없다 가서 보고 올때도 있지만 며느리가 불편해 할까봐 그것도 염려가 되어 참고 있으면 10일 만에 볼때도 있다. 그럴 때면 많이 보고싶다

며칠 전에는 집에 갈 때 먹던 포도쥬스병을 가지고 가야 한단다 2 리터 반병도 먹지 않아 무거울건데 할머니가 안된다고 두고 가라고 하는데 기어코 지가 안고 갔다. 아범은 욕심이 너무 없는데 이아이 욕심이 있을려나 조금 컷는가 싶어 기분이 좋다. 그후 어느날은 장난감버스를 또 그렇게 가지고 가더니 오늘은 내가 필요해서 사둔 시트지를 가지고 가겠다고 하여 안 된다고 하나 기어코 가져간다고 하여 빼았겨 버렸다. 한 장을 말아둔 것인데… 집에 가면 이런저런 장난감이 진열장에 가득한데 참 히한한 놈이다.

할머니에게 안겨서 집에 들어오면 바로 나를 끌고 내방으로 가서 컴을 켜라고 한다. 켜주면 바탕화면에 저장된 딩동댕(아이들프로) 아이콘을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딩딩딩” 하며 켜라고 한다. 켜주면 거기서 또 몇 종류가 뜨는데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나에게 “이거 이거”하며 지시를 하고 이 하부지는 지가 시키는데로 해주면 된다.

그렇게 나를 끌고 다니며 이런거 저런 것 하라고 하는 것 돌봐주고 두 세시간을 하고 돌아가고 나면 좀 힘겨울 때도 있다 그러나 재롱스럽게 놀았던 귀여운 모습들을 생각하면서 아내와 둘이는 즐겁다.

두 늙은이가 사니 별로 웃을 일도 없고 조용한 일상으로 지나는데 그놈이 오는 날에는 먹을 것 챙겨주고 놀아주고 하느라고 바쁘고 통통걸음으로 다니는 모습, 어린이 집에서 배운 어린이 프로를 보고 팔을 어설프게 벌리고 옆으로 아래로 움직이며 율동도 하고, 먹는것도 지가 싫으면 절대로 안 먹는것, 문 뒤에 숨어서 숨바꼭질도 하자고 하고, 내가 보이지 않으면 “하부지!” 하면서 좀 큰소리로 오라고 명령도 한다.

이제는 많이 컷다 가고난 후에도 그런 것 아내와 이야기하면서 웃기도 하며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도, 아직은 채워주는 하기스 기져귀도 이뻐서 가끔 끄집어내어 보면서 둘이는 즐겁다. 어린이 집에서는 지난 여름부터 선생님이 화장실에 대려가기도 하고 혼자 화장실의 소변기에 바지를 내리고 한다는데 집에서는 절대로 안한다.ㅎ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힘나게 하는 너무나 귀여운 늦둥이 손자다.ㅎ

 

 

 

근검하지 말아라는 세상에 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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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검하지 말아라는 세상에 살면서….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장래가 촉망 되었으나 갑자기 정조가 죽고 순조초 신유사옥으로 귀양살이가 시작된다. 형은 사약을 받고 자기와 둘째 형은 귀양살이를 하는 폐족이 되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아들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서 교육을 시켰다 그가 자식에게 보낸 편지 글에 보면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큰 흉년에 굶어 죽는 백성이 수 만명이나 되어 하늘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굶어 죽은 사람 들을 살펴보니 모두가 개을러서이다. 하늘은 개으른자를 미워하며 벌을 주어서 죽인다.

내가 벼슬을 했으나 너희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고 오직 두 글자 부적이 있으니 이는 삶을 넉넉히 하고 가난을 구제 할수 있기에 너희들에게 주노니 야박하다 생각지 말거라. 한 글자는 근(勤)자요 또 한글자는 검(儉)자다. 이 두글자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 나은 것이어서 일생 동안 수용해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이하 략.

1810년 경오년 9월 다산은 동암에서 이런 글을 써서 아들에게 전해줄 때 그는 전라도 외진곳 강경에서 구걸하며 귀양살이를 하였고 귀양살이 5년만에 아들은 마늘농사가 잘되어서 그것을 팔아서 귀양살이 하시는 아버지를 보러 왔을 때 며칠 먹고 자게 할 곳이 없어 절에 가서 며칠만 아들이 먹고 자게 해달라고 구걸을 하였던 때였다.

다산은 부지런하면 먹고 살 방도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하여 쓴 글이다. ‘머 쾌쾌 묵은 조선시대 이야기를 지금 시대에 하는가?’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다산이 말한 ‘근’자를 광의로 해석해보면 남보다 더많이 노력하고 쉬지 말고 일 하라는 것이고 ‘검’자는 효용성 있게 쓰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보면 휴일을 많이 가지고 많이 놀아라 빚내어서 쓸것도 많이 써라 그래야만 돈이돌고 돈이돌면 내가 하는 일도 혜택을 보아서 잘살게 된다 즉 소득이 높아진다고 국가에서 그렇게 권장한다.

부지런하고 절약하라는 근검은 구시대 적인 말이다. 따라서 정 다산도 고약한 사람이었고 지금은 촌부보다 못한 사람이다.

설이라고 내리4일을 놀았다. 내 집앞 200m쯤 시에서 시민 체육 휴식공원을 만들고 있다. 토목 공사하는 차들이 오락가락하고 포크레인은 연신 흙을 퍼담고 하는데 토 일요일은 반드시 놀고 붉은 동그라미 날 다 놀고 비오고 눈오면 또 놀고 하면서 2년이 넘도록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일년 365일동안 반은 논다 거기에 장비 인원 등 많이 동원되어 있는데 저만큼 놀고도 그 곳에 일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고 돈 벌수가 있을까 싶으다.

간혹 OECD국가중에 한국이 노동시간이 아직 가장 길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그것에 연연할 것 없다 남이 내 살림 살아주지 않고 내 빚 갚아주지 않는다 너도 나도 대기업이나 공무원 철 밥통속에 가고 싶으나 내가 갖추어진 것이 그만 못하면 이제 아무리 노력해도 않된다.

소위 스카이 대학 못 나온 내가 되기 어렵다 현 시대를 원망하지 말고 빨리 잊어야 할 것이다. 오늘이라도 ‘잡 코리아’라는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중소기업들 사원모집 광고가 수없이 많다.

괜챤은 중소 기업들도 인재난에 허덕이고 있다 그곳에서 마음에는 좀 미흡 하지만 들어가서 정약용님이 자식에게 보낸 ‘근’자의 뜻을 새기고 부지런히 남보다 열심히 하면 대기업에 가서 과장 될 때 부장 되고 부장 될 때 이사가 될 것이다 그러면 기업 커지고 나의 보람도 커질 것이다.

또 다산이 말한 ‘검’자 실천해 보면 처음에는 어렵지만 소득 생각하고 거기에 맞추어 씀씀이를 숙달 시키면 얼마든지 잘 살수있다. 요즈음 세상에 먹고 살고 적당한 문화생활 하면서 사는 것 충분하다.

대기업 연봉 높지만 그대신 받는 스트레스 그리고 수명이 짧다 물론 대기업에 들어가면 좋겠지만 능력이 안되는 것 마냥 바라보고 허송세월 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다. 그리고 받는 돈 검소하 게 안쓰면 그게 그거다. 사람 사는 것 예전이나 지금이나 모습만 달랐지 근본은 다른 것 없다 근과 검은 지금도 그 효능이 좋은 것이다.

많이 놀고 돈 많이 쓰라는 국가정책은 정권잡은 이들이 좋아하는 국가 총매출 늘릴려고 그래서 그것이 2또는 3%늘었다고 업적 뻥튀기 하려고 하는 그 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보잘것없는 시골 노인이 하는 소리지만 귀담아 듣고 따라 해 보면 먼 훗날 잘 했다고 여겨질 것이다. 사람 사는데 가장 지켜야 될 것은 근과 검이다.

 

 

아들에게 지금도 미안한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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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은 아들네와 이틀을 함께하면서 지났다.

요즈음 부모자식이 함께 사는 집이 드물고 내 남없이 서로 떨어져서 살고 구세대 신세대가되어 한 가족이라도 남남인 것처럼 살고있다. 그믐날은 아들과 나는 아이들보는 담당이 되어 함께 있었고 설날은 또 설날이어서 함께 하루 종일 있다가 밤에 지들 집으로 갔다.

해마다 제사 모시고는 처가로 가더니 얼마 전에 처 할머니가 위중하다고 다녀오더니 올해는 가지않았다. 그래서 금년 설은 이틀을 아들네와 함께 지나게 되었다. 그러나 별로 한 말도 없고 주가 이제 30개월된 늦둥이 노는 것이 되어 웃고 따라다니고 주방에서 준비하는 두 여자들 시중도 들고 하였다.

그렇게 이틀을 지나보니 아무것도 한것도 없이 지났는데도 저녁때는 그만 갔으면 싶었다. 둘만이 조용히 살다가 네 식구가 보태어졌고 설날에는 다녀간 동생들과 북적거려서 잔치를 치룬 기분이고 몸도 많이 피곤하고 어제 저녁에는 정신 없이 잤다. 사람의생활은 길들이기에 달렸다더니….

오늘아침이 되니 세상이 조용하고 이제는 이렇게 사는 것이 편하다. 밖을 내다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있다. 거실에서나 내가 하루 종일 노는 서재랄까 컴 있는 방에서도 넓은 창으로 내다보면 10여km정도 시야가 탁 트였는데 오늘은 온통 컴컴하더니 금방 온 세상이 하얗게 되었다.

이렇게 늙은 둘이 살다가 하나가 죽으면 그때는 어쩌나 아내가 먼저 죽고 나혼자는 하는 걱정도 되지만 내가 먼저 죽고나면 저 늙은 할마시가 어찌 살까 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질 때도 있다. 아내는 남에게 폐끼치는 것은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라도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이라 더 걱정이다 말로는 그때는 요양원에 간다고 나모르게 준비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들며느리가 지금으로 봐서는 그렇게 하도록 두지는 않을 것 같으나 안 그러더라도 위와 같은 성격이여서 염려를 많이 하면서 지난다. 또 그때 아들과 며느리는 얼마나 고달프겠나 등등을 생각도 한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니다 잘 할것이다 하고 잊으려고 한다.

설을 지나고 이제 나이가 80이 되어가니 그런 걱정도 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들에게는 많이 미안한 생각을 할때가 자주 있다. 그가 대학 2학년말때 내가 많이 어려워져서 3학년초에 군으로 입대시키고 제대하고도 형편이 풀리지 않아서 어렵게 등록하여 다니게 하였고 4학년때는 어느 은행 전산실에 야간 알바를 하며 졸업을 했다.

대학 2학년까지는 제 친구들이 형편 좋은 친구로 여겨 아내는 많은 친구들의 어머니로 여러 애로를 들어주고 먹여주고 잠재워 주고 하여 폼잡고 다니던 놈이 그런 일을 하며 쭈그러져서 학교에 다니게 한 것이 너무나 미안하다.

오늘은 멀 찾다가 나온 지 누나 대학 졸업때 사진들을 보면서 내 마음은 너무 짜안해서 이 글을 쓴다. 아들은 졸업사진도 앨범이 없다. 그때 졸업앨범에 대해서는 아무말 없어서 나는 잊고 지났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것이 아니고 .아버지에게 부담 덜어 줄려고 말하지 않은것이다.

나는 그것을 그때는 몰랐는데 그후 오래 지나서 가정사정 때문에 그가 그렇게 한 것이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부터는 느을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다.그러나 아들은 단 한번도 그 말을 한적이 없다. 한참 희망이 부풀어 지나고 큰 꿈을 그리며 지날 대학생활을 그는 곤궁한 부모를 보고 어렵게 지나게 한 것이 아직도 마음 아프다.

다행히 그것이 그의 생활에 좋은 거름이 되었는지 지금은 건강한 사회인이고 아버지가 되어 살고 있어서 대견스럽다.

 

이제는 옛날이야기. 3) 1950년대 설 이야기.

설

이제는 옛날이야기. 3) 1950년대 설 이야기.

지금처럼 입을 옷, 먹을 것이 풍부하지 못했고 돈이 많이 있어도 살수없는 모든것이 귀하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내가 살았던 곳은 아주 시골농촌, 등잔불도 있었고 대개들 석유호롱불로 살았던 시절입니다. 전기 불을 중학교 졸업하고 외가에 가서 보았습니다. 그때 보았던 동그란 작은 유리공 같은게 공중에 가는 선에 매달린 곳에서 나오는 섬광 같은,말만 들었던 전기불빛 호롱불에서 살았던 촌놈에게는 너무나 신기 했습니다.

설에는 할머니와 엄마가 몇 개월 동안 무명실 뽑아 베틀에서 짠 무명천에 솜 놓아 만든 바지저고리를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만들어 주셔서 입고 다녔습니다. 입던 옷도 설 전에 깨끗이 빨아서 엄마께서 손수 솜놓아 새 옷처럼 만들어 주십니다. 그 바지저고리 입고 찍었던 초등 졸업식 사진 지금 보면 참 우습습니다.

5일마다 읍내에 장 서는날 엄마따라 가보면 신기한 물건들을 많이 팔았고 고무신 공책등은 장날 사 두셨다가 설 때면 주십니다만 내복 양말 등 메리야스로 된 물건은 그때는 없었습니다. 엄마는 콩, 깨, 등 잡곡, 닭, 강아지 등을 머리에 이고 들고 가서 팔아서 필요한 그런 것들 사 오셨습니다.

군걸질 거리라고는 콩을 볶아 한 알씩 먹기도 하고 국수꼬랑지 무 등을 먹기도 하였지요. 내가 자라던 곳은 그 때는 고구마도 없었고 감자도 삶아 먹으면 아리는 자주색 감자 뿐이었습니다. 간혹 사탕과 꼬부라진 나뭇잎 같은 것 셈베이라는 과자, 엿, 같은 것을 사다 주시기도 하셨습니다만 군것질 할 것도 귀하고 먹을 것, 입을 것 귀할 때 설은 어린이에게는 너무나 행복하였습니다.

설 날에는 일년 내내 먹어 보지 못하는 떡국은 물론이고 엿, 엿콩, 유과, 감주, 곳감, 홍시 등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엿콩은 엿과 콩 또는 쌀 튀김, 깨를 엿과 버물러서 추운 다락 방에 두면 딱딱해진 것인데  풍부하게 많이 만들지 못해서 조금씩 감질나게 맛만 볼 수 있으나 설날에는 100여호 정도 되는 온 동네가 같은 성이 살아서 어른들께 세배하러 다니면 집 집마다 떡국 감주 엿콩 등 내어놓아 그날은 실컷 먹습니다.

요즈음은 옷도 일년내내 유행 따라 사 입고 떡국 과자 과일 주스 등 과일들도 계절 없이 냉장고에 두고 먹고 싶을 때 마다 먹고 있지만, 그때는 계절 지나고 철 지나면 없고 있는 것들도 살 수 있는 곳 멀어서, 돈 없어서 사 먹지 못하였던 시절이었으나 설때 또는 추석때 명절에는 그철에 있는 음식은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 가질수 있고 일상 생활하는데, 사는데 필요한 물건들 많이 있고 그 것 가지는데 큰 어려움 없는 지금 우리아이들 그때 내 어릴 때 겪었던 설 때 그 행복한 마음같이 그들도 행복하겠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써봅니다.

없어서 모르고 살았고 별로 가지고 싶은 절실함도 없다가, 설 때 사주시면 너무나 행복했고 지금처럼 난방 잘된 집도 아니고 보온 잘된 옷도 아니고 영양가 풍부한 음식도 아닌 그때였지만 내가보고 느끼는 지금 설이 그때만큼 즐겁지 않게 보이는 것은 내 나이 탓 일까요?

*금년 신정과 설이 다 지나갑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한 한해 되세요.

 

 

 

 

2016년 차거운 년말에.

9차

2016년 차거운 년말에.
금년 일년이 다가고 이제5일이면 사람들이 흔히들 이맘때 말하는 ‘대망의 새해’ 2017년 초하루가 된다. 어릴 때 어머니는 왜놈들이 독하더니 그놈들의 설, 날씨도 독하게 춥다고 하시더니 금년도 예외 없이 많이 춥다.

그뿐이 아니다 금년의 대한민국은 예년 날씨보다 더 춥다. 열심히 정직하게 살려는 국민이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가장 편하게 살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철통 같은 약속을 목이 터져라 고 외치면서 나 대통령 되겠소 하였던, 세상에 그리 흔치 않는 여자 대통령이 온 나라를 쑥대 밭으로 만들어서 너무나 추운 금년 년 말이 되어있다.

지금이라도 “그래요 나로 인해서 불편해하는 국민이 이렇게 많으니 하야 하겠소.” 하면 그래도 측은하기도 동정 어린 마음이 생겨서 덜 추울 것인데…
국회에서 탄핵 받았고 싫다는 국민이 90%정도나 되어 추운 날씨지만 주말만 되면 지금도 6,70만 명이니 하는 국민들이 촛불로 물러가라는 시위가 계속되는 데도 할 테면 해보라고 하며 머리 좋은 변호사들을 앞세우고 법적으로 해보자고 버티고 있다.
어쩌면 이토록 국민 무서운 줄을 모르고 이럴수가 있을까?
국민들은 불쌍하고 이 연말이 너무 춥다.

이런 차제에 동물들도 아주 불쌍한 것들이 있다 AI라나 하는 닭 병 그것 때문에 착하게 알을 낳아 주었던 닭들이 2600만여 마리가 살 처분되었다는데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고 3000만 마리가 될지도 모르게 전국에서 죽여야 될 것 같다. 그로 인해 달걀 값이 배로 올라서 그것이 들어간 먹을 거리들의 값 또한 많이 올랐다.
그 외 여러 생필품들 물가도 어수선한 시류에 편승해 올라서 더 추운 2016년 을씨년스런 세밑이다.

그러나 즐거운 것들도 있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전철을 타고 가면서 들판을 보니 금년에도 많은 기러기들이 와서 휑한 들판에서 무더기 무더기로 무리지어 다니며 퍼드득 푸르륵 날기도하고 분주히 먹이를 찾아 다니고있다.
우리나라 최북단 그러나 기러기들이 겨울나기에는 적당한 가까운 곳이기에 이곳에는 기러기 들이 하늘을 쳐다보면 끼룩거리며 줄지어 날아가기도 하며 이논 저논을 옮겨가며 다닌다.
이것들에게는 이 코리아의 겨울 세밑이 너무나 즐겁게 보인다.

어릴 때 경상도 시골에서 나무들이 낙엽이지는 늦은 가을날 하늘에 줄지어 질서 정연하게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면서 기러기는 겨울에 와서 이른봄에는 북쪽으로 가는 새다고 하며 참 고달프게 사는 새들이다 어느 한곳에 살면 될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우리는 아래와 같은 기러기 동요를 부르며 컸다.

‘명경같이 맑고 푸른 가을하늘에
우물가에 돋는 달빛 고즈넉이 내릴제
줄지어가는 기러기 떼야
서리 내린 저녁 길에 어딜 찾아 가느냐.’

이 동요를 부를 때는 6,25전쟁후 학교는 폭격으로 사라지고 한 반 60여 명이 동내 서당 으로 정자로 다니면서 가르쳐 주신 여자음악선생님은 지휘자가 되고 우리는 어린 목소리로 합창을 하면 참 아름답고 신이 나서 자꾸 부르고 싶었다.
그 후에는 사는 것에 정신이 팔리고 좀더 잘 살아 볼려고 때로는 큰 욕심도 내었고 또 그것 때문에 큰 좌절도 겪기도 하면서 내 옆에 있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도 이웃들의 아름다운 모습도 볼줄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사 들판에 있는 기러기 떼도 보인다.
휑한 들판에서 무엇을 먹고 있나 염려도 되고…

이제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고 느을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 봄을 맞아 생기가 나진다는 것도 알수 있고 그 모습도 보여지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 빨리 새해가 되어라, 그리고 봄이 빨리 와라, 그리고 기러기들이 북으로 가고 나면 헝클어진 나라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서 정리 정돈이 되겠지.

세상이야기 7)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본 세상.

13,11.25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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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7)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본 세상.

며칠 전에 동대문 시장에 쇼핑을 하였다. 쇼핑이라고 하니 무슨 고급스럽고 좋은 물건을 많이 사려고 간 것은 아니고 요즈음은 아무데서나 살수 없는 나만이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살수 있을가 싶어서 놀기 삼아 갔다.

어릴 때 옷을 어머니 할머니가 손수 만들어서 입었더니 그 후 재봉틀이 생겨서 그것으로 만드는 양복점 양장점에서 맞추어 입기를 오래하였는데 사람들 몸 칫수를 몇 종류로 구분하여 큰 공장에서 만든 기성복이라는 시대로 넘어가서 기술이 발달하여 깔끔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서 입고 다니게 하고 속옷도 신발 모자 가방 신발 등도 모두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 간혹 보면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수제품들이라고 하면서 손 재주 많은 분들이 만든 구두도 가방도 더러 보이고 그런 제품은 돈이 엄청 비싸다. 시계도 수제품이니 하며 수천 만원 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그리고 어느 분의 블로그에서 보니 천 쪼가리로 만든 방석, 아기이불, 옷, 등 손수 만들었다고 보여주는 너무 아름다운 것 보았다.

나는 하릴없이 지나면서 그러나 만들어진 기성제품들 써보면 어떤 것 불편하고 이렇게 밖에 못 만들까 하는 것 또 쓰다가 버리는 원제료가 좋은 가방, 옷, 등을 고쳐서 만들어보기도 하고 아예 확 뜯어서 작은 가방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그런 것을 잘한다.

그런데 내방식대로 할려니 그에 필요한 부품들을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아서 애로가 많다. 동대문시장에는 그런 부품이 있을까 싶어 며칠전에 갔다. 그러나 어디에 가면 있는지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더라.

그날은 예전에 흔하게 보았던 굵은 합사 실을 사려고 갔다. 구두, 가방 꿰매는 실은 요즈음 구두고치는 사람에게도 없다고 하고 구할 대가 없어서 갔더니 아직도 지게로 운반 할 수밖에 없는 것 그리고 오트바이로 많은 짐을 싣고 가는 모습들 등을 보았다. 그러나 실은 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내가 사모님 소리들을 때 메고 다녔던 가죽가방 버려야 되는데 자세히 보니 가죽이 너무 좋아서 버리기가 아까워서 버릴려고 하다가 버리지 못하고를 여러 번한 그것을 또 보고 연구를 하다가 요즈음 휴대폰 그리고 지갑과 메모지 몇장 볼펜만 들어갈수 있게 작은 가방을 만들어 볼려고 하여 부품은 응용해서 쓰면 되겠으나 실이 문제였다 그래서 사러 갔었는데 물어도 알 수 없다는 소리뿐이고 요즈음은 없다고도 하고 정말 촌 영감 불쌍한 영감태기 노릇만 하고 돌아왔다.ㅎ

그런 작은 가방 살려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 이쁘게 한 내가 디자인한 것을 만들어볼 욕심으로 할려고 제단도 다해두었다. 생기기는 멀쩡한 영감이 그런 실을 찾으니 이상했는지 그런거 요즈음 없단다. 요즈음 신발 꿰매 신는 사람도 없는데 그런거는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간혹은 그런 굵은 실로 만든 신발은 보이는데….

몇 곳을 찾다가 보니 드디어 있는 곳을 찾았는데 실방구리가 아기 머리통만큼 큰데 값이 2만5천원이란다.ㅎ 내가 필요한량은 50미더 쯤이면 되는데…. 결국 망서리다가 그냥 돌아왔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고 달라졌다. 모든 것이 양산체제로 그래야만 수지가 맞으니 달라져야 한다. 인건비가 비싸졌으니 그에 따라 물건들 값도 그만큼 많은 돈 주어야 하고 결국은 그게 그거다. 그런데 나만 역행하고 살려는 생각을 하였고 지금도 그 옛날 생각으로 살아가니 내가 바보다.ㅎ

위 사진에 보면 아직도 저렇게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게 일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시장에는 많이 있는데….

 

 

 

아들 군에보낸 어머니의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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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군에보낸 어머니의마음.
세월 속에 묻혔던 아들 군 생활한 그 때가 생각나서 이 글을 씁니다.
아들은 ROTC에 가겠다는 말을 자주했고 우리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 했습니다.
대학 1학년 말 즈음에 우리 집에는 큰 시련이 왔습니다.
온 식구가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과 공장은 남의 손에 넘어가고 아들 딸 어머니 우리부부 5 식구는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2학년초 군에 지원 입대를 하였고 시어머니는 동생집으로…
네가 군에 갔다가 올때에는 안정된 가정을 만들어 놓겠다고 약속하고 지원 입대를 시켰습니다. 너무 힘든 상황에서 아들을 보내고 나는 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논산 훈련소에서 입영식 끝 순서 아들들은 운동장에서 부모님들은 스텐드에서 아들들의 큰 절을 받고 2년 동안의 이별을 따뜻한 포옹과 눈물로 작별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난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텅빈 운동장을 하염없이 내려다 보면서 나는 울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라면서 나에게 많은 기쁨을 안겨 주었던 너 이제부터는 내 품을 떠나고 나라의 아들로, 사회생활 하느라 언제 엄마 품에 오겠나를 생각하면서 정문을 뒤로하고 집에 도착 할 때까지 옆에 같이 타고간 아들의 빈 자리를 보며 또 눈물로 채우면서 무사히 병영생활 마치고 제대하길 기원하며 돌아 왔습니다.
 
손발에 굳은살 하나없던 아이 매일 반복되는 고된 훈련 잘 견디어야 할텐데…오늘은 뛰고 기고 걷고 뒹굴기를 얼마나 했을까. 무뤂은 얼마나 해지고 군화속에 발은 얼마나 진물이 났을까?

걱정하는 나를 아들이 오히려 걱정 말라며 위로의 편지가 왔습니다.
전우들과 서로 위로하며 잘 적응하고 있다고, 사기 전화를 받으면 현혹 되지 말라며 절대로 탈영은 하지 않는다고 이렇게 의젓 할수가…
 
자대 배치를 받고 처음 면회를 가서 본 아들이 너무 많이 변해있어서 내 아들이 맞는지 내 눈을 의심 했었습니다.
2개월도 안된 기간에 늠름하고 씩씩한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집에서는 곱고 나약하고 망치로 못 하나 박은일 없는 여리기만 했던 아이가 저렇게 변할수가 있구나…. 대단한 충격이였습니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대대장님과 선임들께 감사의 편지를 썼습니다.
‘잘 대리고 있다가 건강하게 보내달라고… 군에 보낸 것이 아니라 연수원에 연수를 보냈다고 생각을 하겠습니다. 라고 썼더니 엄마가 쓴 편지 때문에 단체 기합을 받을때 “이놈들아 너희들은 연수원에 연수온 놈들이 아니야!” 라는 말을 가끔 들었다고 했습니다.ㅎ 지금은 그런 지휘관은 없겠지만…
 
제대하면 기초공사가 잘 된 아들이 내부 장식 잘해서 상품 가치를 높여 아버지 어머니 잘 모시겠다는 의젓한 편지도 보내 주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 내 전부인 아들을 보내고 나서 길에서 마주친 아들부대의 군인을 만났을때 내 아들을 만난 것 같아 반가움에 빵과 음료수를 사주고 그 뒷 모습에서 꿈에서도 보고픈 내 아들을 만난거 같아 길가에 서서 한참을 운적도 있었습니다.
 
마음 조리며 2년이 지나고 믿음직하고 늠름한 몸짱이 되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제대 하던 날 아무 탈없이 무사히 씩씩한 남자로 거듭난 아들이 대견해서 금 다발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2냥짜리 금 목걸이로…

*이 글은 아내가 몇년 전에 쓴 자기 중앙알보 블로그 민속촌에 올려진 글(총장님의 글을 읽고)입니다.

그 아들은 그때 그렇게 엄마품을 떠나서 이제 40대 중반이 되었고 한 여자의 남편, 두 아이의 아버지, 의젓한 사회인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부부의 마음은 느을 그를 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