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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옛날이야기 10)건강한 농촌과 국민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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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옛날이야기 10)건강한 농촌과 국민 건강.

요즈음 들판을 보면 참으로 평화로운 한국의 농촌이다. 한때 FTA때문에 우리는 다 죽을 것이다고 소 싣고 가서 세종로에 풀어놓고 트럭에 쌀 싣고 와서 아스팔트 위에 패대기 치던 한국의 농민들 그때는 모두 죽고 말 것 같았었는데 요즈음 우리농촌은 덴마크나 네델란드 정도는 아직 멀었지만 어떤 곳은 년 평균 소득이 도시 뺨치는 곳이 허다하다.

세상은 참 신비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여 준다 컬러 TV가 나오고 각 방송국에서 연속극을 방영할 때 드라마작가들 떼돈을 벌고 탤런트라는 직종이 각광받을 때 영화산업 쪽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이 아우성이 있었고 전국의 극장은 부도가 나고 몰살 당하는 것 같았는데 요즈음 우리나라 영화산업은 선진국들과 대등하게 종합예술로 손색이 없고 그 극장들이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문화의 전당이 되어있다. 농촌 이야기하다가…ㅎㅎ

비가 오지 않아서 모내기를 하지 못하고 그 옆에는 그 논에 심을 묘상이 반드시 있었는데 그것도 말라서 농부들이 애타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해 기말고사를 치르고 방학이 되어 집에 가보니 그때 비가 와서 모내기가 한창이였다. 당연히 일조량이 부족하여 쭉정이를 추수할 수밖에 없었다. 성 급한 이는 메밀을 심어서 벼논이 하얗게 메밀꽃으로 장식된 메밀밭이 되기도 하였다. 요즈음은 메밀이 고급 먹을 거리로 되어 그 값도 비싸지만 그때는 하급 먹을거리들 이여서 천대받던 작물이였다.

모심기 할 때는 위에 사진처럼 남녀 노소가 함께 무논에 업드려서 못줄을 옮겨가면서 심었다. 10여명이 늘어서서 각자 자기 앞에 몇 포기씩을 심고는 양쪽 논둑에서 못줄만 옮기는 사람이 못줄을 옮길 때 일어서서 허리를 한번 펴고 그러기를 반복하여 큰 논도 작은 논도 이논 저논 옮겨가면서 심었다. 품앗이라고 오늘은 형님네, 내일은 삼촌네, 모래는 옆집 아무개네 우리 것 하면서 심고 논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루 일당을 주고 그렇게 모심기를 하였다. 모심기가 끝나면 얼마 있다가 논매기라고 또 엎드려서 손으로 구정물 일으키며 잡초를 매주는 힘든 논 농사일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너무나 힘든 일의 연속이였다.

밭 일은 또 끝이 없다 보리 거두어드리기 콩밭 고추밭매기 감자밭 매고 나면 끝나기도 전에 먼저 맨 밭에는 또 잡초들이 욱어지고 그러면 또 호미로 매고를 반복하였다. 밭매기는 대개들 아낙들 차지여서 갖 태어난 어린것은 밭 모퉁이 나무그늘 밑에 가마니 떼기 위에 눞여두고 잠시 젖 먹이고는 일에 정신 팔리다가 보면 아기는 기어 다니며 흙도 주어먹고 겨우내 썩혀서 밭고랑 밑자리에 깔아둔 거름도 주어먹어서 입가가 거무수레하고 모기에게 쏘이기도 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에 눈물자국이 마른체 자고있다.

지금 우리 또래 농촌 출신들은 그렇게 자란 사람이 많이있다. 그렇게 살아온 내게는 오늘 무심코 지나다가 본 이 모내기 광경을 보면서 내가 산 철들고 60여년 동안 달라져온 농촌 문화를 되세기게 하였다. 며칠 전에 길가에 5톤 차에 어린 벼를 이앙기에 실어서 모내기 하도록 만들어진 것을 가득싣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이제는 묘도 단지에서 씨 뿌려서 각 농가에 공급 해주는 것인가하여 알아보았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요즈음 시골 장날 나가보면 고추 묘, 고구마, 감자, 상추, 호박, 오이 등 각종 묘를 많이 팔고 각 농가에 500평 일천평 되는 곳에도 모두 묘종을 사서 심는다고 하였다. 그 넓은 평야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달랑 묘 심는 트럭터 같은거 한대만 달랑 무논에서 열심히 심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농업은 나라의 국민들이 먹을 거리를 제공하는 국가의 근본 업이다.

요즈음 대량생산에 돈 벌이에 혈안이 되어 먹으면 인체에 해를 줄수 있는 행위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그런 사람들 천벌을 받을 것 이다. 들켜서 감옥에도 가나 세월이 흐르면서 더 큰 벌을 받는다. 자식이 무슨 사고로 일찍 죽거나 본인이 암에 걸려 남들보다 먼저 죽는다 세상은 험하다고 하지만 공평하다 나쁜 짓한 사람들 세월을 두고 보면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르는 것 이 나이가 되면서 보고 느낀 경험으로 하는 말이다.

참 많이 달라졌다 우리농업은 이제 구식농업이 아니다 첨단 장비가 디지털식 영농법으로 경영하는 농업경영학이 고도로 발달한 농촌이 되었다. 힘들고 어려웠던일들도 지어주는 회사가 있어서 기계로 지어주고, 도시로 나갔던 젊은이들도 귀농하는 것도 자주 보이고 농촌이 젊어지고 있고 외국에서 값싼 농산물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우리 것이 세계로 팔려나가는 농업도 세계화가 되었다. 우리가 먹을 것들 우리가 품질 좋게 만들어 먹고 더 풍요로운 건강한 농촌이 국민건강으로 이어질 것이고 대한민국의 건강이 될 것이다.

 

 

 

 

학생1인

이제는 옛날이야기 9) 거국적인 산아제한 운동을 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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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1인

이제는 옛날이야기 9) 거국적인 산아제한 운동을 하더니.

이렇게 무작정 마구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꼴로 사는 것도 마구 낳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며 야단 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1963년에 위와 같이 하면서 2063년 한국 인구가 6억 명이 될 것이라고 하며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자고 대한가족협회라는 정부단체에서 전국 방방곡곡에 다니며 홍보하고 공무원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콘돔을 나누어 주고 시도별로 정관수술 루프시술 난관수술을 목표량을 주어서 수술 실이 구비되어 있는 이동차로 다니며 무료로 수술도 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머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했나 싶으지만 그 당시는 심각했다. 보통 한 가정에 아이가 5, 6명정도였고 1인당 국민소득은 70달러정도로 세계에서 최빈국에 가까운 나라였다. 정부는 이것을 해결하자면 적게 낳아야 한다고 긴급 처방을 한 것이다. 정관수술을 하면 예비군훈련 혜택도 주었고 공공주택 우선 입주권도 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제 먹을 거는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었고 심지어 어떤 집은 아무개를 낳고 살림이 일었다(불어났다) 그놈이 복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놈 때 문에 형편이 나아졌다고 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집은 개(犬)가 복을 가진 놈이다고 그 집은 개가 먹여 살린다는 소리도 내 어릴 때 들은 봐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는 아이를 낳지 않을 방법이라고는 없었다.

남녀가 가장 즐거운 그 행위를 안 하는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인데 그렇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참는 것도 한번 두번이지 허구한날을 그 즐거운 것을 참는다는 것이….ㅎ

그 당시의 시체 말, 철길 옆에 있는 동내에는 유독시리 아이가 많다고 하였다. 그 직전까지 기차는 칙칙 푹푹하는 증기기관차가 다녔고 철로 또한 토막 토막이은 철로여서 이음새에 지나가는 소리가 덜그덕 거렸고 게다가 모든 신호도 경음으로 꾀엑 하는 것으로 하였으니 그 소리가 요란했다. 1962년에 디젤기관차가 미국의원조로 막 도입 되었는데 그때도 기차가 지나가면서 걸핏하면 경음기를 울리고 기차길 옆 주민들은 많이 시끄러웠고 그때마다 잠이 깨니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ㅎ

의료시설이 형편없어서 자랄 때 내가본 경험으로는 출생후 30%정도는 어릴 때 죽었다. 그러나 피임을 할수 없었던 기간은 내가 30살에 결혼을 했는데 그때까지도 요즈음 그 흔해 빠진 콘돔은 있다는 말은 들어서도 보지도 못했고 돈을 주고 살려면 살수는 있었지만 약국에 가서 그것 주세요 하는 것은 부끄러워서 사지는 못했다.

여자는 더 했을 것이다. 자의든 아니든 간혹 해서는 안될 임신을 하여 수치스러움으로 큰일을 저지르기도 하는 사건도 있었으며 좀 독한 여인들은 모질게 작심하고 부부간이지만 가임기에는 절대로 남편을 곁에 오지도 못하게 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내 경우도 독한 아내 만나서 딸하나 아들 하나 둘만 낳았다.ㅎ

그렇게 그런 세월이 있었는데 요즈음은 기구도 많고 아예 불임으로 지날 기간을 가지게 하는 약도 많고 그에 따라서 아이 낳는 고통도 큰 고통이고 낳아서 키우는데 많은 수고가 따르니 아예 안 낳아서 큰 걱정이다.

곧 성년 한 사람이 노인 4, 5명을 부양해야 한다는 소리도 들리고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한다는 소리도 나오고 하나 말로만 걱정을 하면서 국가에서 출산장려를 한다고 아이 낳으면 몇 백만원 장려금을 주기도하고 각 지방에 따라 하나 별 효과가 없이 한해 두해가 지나고 있다. 물론 이런 처방도 하여야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것은 안하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고 부끄럽게 여기는 관념을 가질 정신적인 운동을 장기간 하여야 한다고 여긴다.

마음 속으로부터 가난하게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결혼 안 했다는 것과 자식이 둘이 안 된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국민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것은 기간을 10년20년 내다보고 교육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만 옛말에 말을 물가에까지 끌고 가지는 하지만 물을 먹이는 것은 말이 생각이 있어야 먹는 것이다. 그처럼 사람이기에 이것은 해야 한다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땜질식 정책으로 살아왔다 그 결과가 이런 현상이 되었다. OECD 경제 협력국가평균 출산율1.68명이나 우리는 1.21로 꼴지라고 한다(2014년) 이는 국가가 노인이 되는 것이다. 출산율이 꼴찌니 제일먼저 노인국가가 되고 나아가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위에 사진은 어느 초등학교 학생1인이 선생님과 학습 장면이다.

국가 정책은 적어도 100년은 바라보고 입안하고 결정해야 한다. 지금 그런 것 결정하고 만들 정부의 수장 대통령을 선출하는 시기가 되어 너도나도 그것 하겠다고 출마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한다 어떤 분들은 나라가 곧 망할수 있는 공약을 발표하기도 하고 연예인들 인기 영합 하는것 같은 공약도 있다. 잘 선별하여 실수로 인해서 많은 상처 입으며 얻은 기횐데 건강한 정부를 만들 사람을 선출해야 할건데….

 

 

 

 

 

이제는 옛날이야기 7) 여자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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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옛날이야기 7) 여자의 목소리.

여자가 시집을 가면 벙어리로 산다 3년, 나는 귀먹어리다 3년, 앞을 못본다 3년이라고 한 시대도 있었다. 또 칠거지악이라고 행실이 나쁜 여자를 응징하는 7가지 무서운 규범도 있었다. 나 또래의 어머니들까지도 그런 규범으로 살았는데 그분들도 이제는 옛날이야기라고 여기면서 기죽어 사시다가 많이 유명을 달리하셨고 몇 안남았다.

그리고 난후 한 세대가 지난 우리 때부터 아니 무슨 소리세요 왜 이나라의 여성에게 이토록 홀대를 하나요 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나오더니 그리고 또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여자는 이땅에서 주인이 되었다. 남자들은 너나할것없이 들러리이고 여자를 위하여 살아가는 노복처럼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는데 지금은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 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조차도 잘 보이지 않아서 그런 세상이 있었다는 것도 잘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다. 불과 60여년이 지났는데 이토록 달라 질수가 있나?

그렇게 사셨던 어머니들은 이제 할머니가 되어서 너무 달라진 세상을 보면서 마음속으로는 한탄하면서도 며느리에게 할말도 못하고 살았는데 그 아래대 시어머니들은 오히려 자기자식의 아내에게 눈치 코치보며 숨도 크게 못 쉬고 살아간다. 누가 모진 시집살이한 사람이 모진시어머니 된다고 하였나 그런 말은 사라진지 오래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하는 말 “말조심해라 너 말 한번 잘못하면 금지옥엽으로 키운 내아들이 설음 당한다, 나가서도 기죽어 살고 집에서도 할말도 제대로 못하고 사는 아들 불쌍 하쟌니? 그저 니가 보고도 못 본척 듣고도 안 들은척 하고 하고싶은 말도 참고 또참고 살아라.”고 하면서서로 격려하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살면서 그 스트레스는 이제는 다 늙었는 남편들 소위 영감에게 풀기도 한다. 내 경우도 아내가 요즈음 조금 무섭다. 때로는 그날 기분이 어떤지 나는 살피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도 참고 조심해서 한다. 돈을 많이 벌어놓지 못해서 일직이 경제권도 주어버렸더니 살아가는데 그런 것 걱정하지 않고 지나니 편하기도 하지만 아내는 쪼개고 아끼고 하면서 살아는 것 보면 나는 때로는 아내가 안스럽고 나는 조금 처량한 생각이 들때도 있다.

물론 아내도 조심은하나 간혹은 어딜 좀 다녀 올려면 거기 왜 가나요? 하면서 물을때 구구한 설명 해서 설득시켜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럴 때면 자존심도 상하지만 꾹 참아야 한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들 걸핏하면 외식을 자주하는 것 보면서 돈 쓰고 나쁜 음식들 자주 먹어 살이 찐다고 걱정하고 손자도 그런 음식들 자주 먹어서 장차 체형에 체질에 변화가 오고 건강이 나빠진다고 느을 걱정도 한다. 그외 여러가지 못마땅한 것들 많다 그렇지만 여기에 쓰지도 못한다. 혹시나 아들며느리가 이 블로그를 간혹 보는데 그럴까 싶어서 못쓴다.

그런 불평은 내게 하고 집안친척들 간에 일들도 거슬리는 것 있으면 내게 불평을 하고 어떤 때는 내가 동내 북이가 싶을 때도 있다.ㅎ

자기자식이라고 다큰 자식에게 우리 부모님들처럼 언성 높여 야단치고 며느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은 절대로 못하고 손자에게도 옷가지 하나를 사줄려고 해도 늙은이 관점에서 본 마음에 안 드는 옷 사주면 안 입힐려니 미안하고 입히기 싫고 할까 봐 그것도 못한다.

한번은 겨우 걸음 걷는 어린것 신발이 요즈음 유명메이커제품 투박스러운 것이여서 내딴은 가벼운 것 사준다고 남대문 시장에 가서 온 시장 돌아다니며 겨우 가벼운 것 사주었더니 신기지않았다. 유명제품이 아니여서인지 그렇다고 물어 볼수도 없고….ㅎ 내 아들과 며느리가 어른들 무시하고 그런 아이들은 아니고 착한 아이들인데도 그렇다. 세상이 너무 빨리 많이 달라졌다. 별거아닌 부끄러운 지난 이야기를 오늘 또 한참 썼네.

 

 

 

 

 

 

 

이제는 옛날이야기. 4) 금기시 했던 이상한 관습들.

소달구

이제는 옛날이야기. 4) 금기시 했던 이상한 관습들.

어릴 때 어른들에게 듣고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여라고 하여 지키고 살았던 금기시하는 관습들을 써봅니다. 이런 것은 충효사상으로 이렇게 하여라 또는 하면 않된다 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것들입니다.

요즈음이야 전국이 일일 생활권이고 연일 각종 정보 매체에서 분초를 다투어 알려주고 있는 시대니 전국이 별로 다르지 않고 차이가 있었던 것들도 같아지고 있지만 교통이 불편하여 지방에서 서울에 가자면 몇날 며칠을 걸어서 가기도 하고 내가 어릴 때만해도 서울에 가는 것은 지금 먼 아프리카에 가는 정도로 어려웠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들은 경상도 내륙 지방에 내가 겪은 것들이나 전라도 쪽이나 바닷가 쪽 또 제주도 같은 섬 지방은 또 다른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오랜 관습에서 얻은 금기를 하면 살아가는데 삶이 부드러워지고 남을 배려하고 자기마음도 행복해지고 또 더 위생적이다 고 여겨지는 것들입니다.

이런 사항들을 지키는 것은 좀 불편하기도 하였지만 지키고 살았는 조상님들의 슬기를 느끼게 합니다. 좀 토템적이다고 여겨 지는 것도 있으나 아무리 바쁘게 살더라도 지금도 지키면 손해 볼 것은 없을 것 같고 각박한 우리생활이 좀더 여유로워 질 것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래 지키느라고 약간의 인내가 필요했던 것들 지금 잊지 않았는 것들 적어봅니다. 순서는 별 의미가 없고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입니다.

1 손톱 발톱을 밤에 깍지 않는다.

2 아플 때 국수를 먹지 않는다.

3 여자들 바느질 할 때 반드시 실을 잘라서 바늘에 꾄다.

4 문전을 딛거나 위에는 앉지 않는다.

5 해질 무렵 문을 고치거나 창호지를 바르거나 하기 위해서 손 대지 않는다.

6 생일에는 국수를 먹어라.

7 아이를 낳으면 대문에 금줄을 친다.

8 아침 일찍 여자는 남의 집에 가지 말아라.

9 오전에 상점에 갔을 때는 물건 안 사면 안 된다.

10 다리를 떨지 말아라 복이 나간다.

11 큰 일을 시작 할 때 고사는 반드시 지낸다 그때 돼지 머리는 중앙에 두고

12 붉은 팥은 귀신을 물리친다.

13 절에 갔다가 올때는 중간에 다른 곳에 들리지 않고 집으로 곧 바로 온다.

14 미운 사람이 다녀가면 소금을 확 뿌린다.

15 집안 사람이 멀리 외출하면 그날은 집 청소를 하지 않는다.

16 중요한 일을 하러 갈때는 미역국을 먹지 말아라.

17 이사 갈 때는 삼살 대장군의 방향을 알아서 그쪽으로 가지 말아라.

18 이사는 좋은 날을 받아서 가거라 아무 때나 가면 큰 재앙이 올 것으로 여긴다.

19 잠잘 때 동쪽으로 머리를 두면 오래 살고 남쪽은 부자가 되고 서쪽 북쪽은 그 반대이다고 여기고 반드시 지키고 살았다.

20 길 가다가 어른이 가는 길은 먼저 지나가지 않는다 특히 여자는 남자 앞의 길을 끊어 지나가면 재수 없다고 하였다.

21 윗 사람과 같이하는 술 자리에서 술잔은 머리 돌려서 마신다.

22 어른 앞에서 담배는 피우면 안 된다.

23 며느리는 어른들 앞에서 아이를 업으면 안 된다.

24 어른 앞에서 눈이 나빠도 안경은 끼면 안 된다.

25 부부가 외출 시에는 여자는 남자보다 2.3보 뒤 처져서 간다.

26 여자가 술을 마시는 것은 상것들이나 마신다.

27 여자들 아기를 배면 오리고기 닭고기 문어 등을 먹지 말고 상모서리에 앉지 말아라. 등등 생각 나는대로 적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중에 이해가 되는 것들도 있지만 아직도 그 이유가 궁금한 것도 있으나 가능한 한 지키며 불편하게 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와 아내는 어릴 때 어른들이 위의 것들을 지키며 지나시는 것을 보아서 될 수 있으면 그렇게 지키며 살고 있으나 간혹 위반하면 마음이 편하지를 않았습니다. 부부는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제보다 제 아내가 좀더 잘지킵니다.ㅎ

사람사는 세상 이야기 좀 무식한 이야기입니다.ㅎㅎ

이제는 옛날이야기. 3) 1950년대 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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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옛날이야기. 3) 1950년대 설 이야기.

지금처럼 입을 옷, 먹을 것이 풍부하지 못했고 돈이 많이 있어도 살수없는 모든것이 귀하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내가 살았던 곳은 아주 시골농촌, 등잔불도 있었고 대개들 석유호롱불로 살았던 시절입니다. 전기 불을 중학교 졸업하고 외가에 가서 보았습니다. 그때 보았던 동그란 작은 유리공 같은게 공중에 가는 선에 매달린 곳에서 나오는 섬광 같은,말만 들었던 전기불빛 호롱불에서 살았던 촌놈에게는 너무나 신기 했습니다.

설에는 할머니와 엄마가 몇 개월 동안 무명실 뽑아 베틀에서 짠 무명천에 솜 놓아 만든 바지저고리를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만들어 주셔서 입고 다녔습니다. 입던 옷도 설 전에 깨끗이 빨아서 엄마께서 손수 솜놓아 새 옷처럼 만들어 주십니다. 그 바지저고리 입고 찍었던 초등 졸업식 사진 지금 보면 참 우습습니다.

5일마다 읍내에 장 서는날 엄마따라 가보면 신기한 물건들을 많이 팔았고 고무신 공책등은 장날 사 두셨다가 설 때면 주십니다만 내복 양말 등 메리야스로 된 물건은 그때는 없었습니다. 엄마는 콩, 깨, 등 잡곡, 닭, 강아지 등을 머리에 이고 들고 가서 팔아서 필요한 그런 것들 사 오셨습니다.

군걸질 거리라고는 콩을 볶아 한 알씩 먹기도 하고 국수꼬랑지 무 등을 먹기도 하였지요. 내가 자라던 곳은 그 때는 고구마도 없었고 감자도 삶아 먹으면 아리는 자주색 감자 뿐이었습니다. 간혹 사탕과 꼬부라진 나뭇잎 같은 것 셈베이라는 과자, 엿, 같은 것을 사다 주시기도 하셨습니다만 군것질 할 것도 귀하고 먹을 것, 입을 것 귀할 때 설은 어린이에게는 너무나 행복하였습니다.

설 날에는 일년 내내 먹어 보지 못하는 떡국은 물론이고 엿, 엿콩, 유과, 감주, 곳감, 홍시 등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엿콩은 엿과 콩 또는 쌀 튀김, 깨를 엿과 버물러서 추운 다락 방에 두면 딱딱해진 것인데  풍부하게 많이 만들지 못해서 조금씩 감질나게 맛만 볼 수 있으나 설날에는 100여호 정도 되는 온 동네가 같은 성이 살아서 어른들께 세배하러 다니면 집 집마다 떡국 감주 엿콩 등 내어놓아 그날은 실컷 먹습니다.

요즈음은 옷도 일년내내 유행 따라 사 입고 떡국 과자 과일 주스 등 과일들도 계절 없이 냉장고에 두고 먹고 싶을 때 마다 먹고 있지만, 그때는 계절 지나고 철 지나면 없고 있는 것들도 살 수 있는 곳 멀어서, 돈 없어서 사 먹지 못하였던 시절이었으나 설때 또는 추석때 명절에는 그철에 있는 음식은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 가질수 있고 일상 생활하는데, 사는데 필요한 물건들 많이 있고 그 것 가지는데 큰 어려움 없는 지금 우리아이들 그때 내 어릴 때 겪었던 설 때 그 행복한 마음같이 그들도 행복하겠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써봅니다.

없어서 모르고 살았고 별로 가지고 싶은 절실함도 없다가, 설 때 사주시면 너무나 행복했고 지금처럼 난방 잘된 집도 아니고 보온 잘된 옷도 아니고 영양가 풍부한 음식도 아닌 그때였지만 내가보고 느끼는 지금 설이 그때만큼 즐겁지 않게 보이는 것은 내 나이 탓 일까요?

*금년 신정과 설이 다 지나갑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한 한해 되세요.

 

 

 

 

세상이야기 (10) 당나라 공주의 정신 나간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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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공주의 정신 나간 사랑이야기.

한 좀도둑이 잡혔다. 심문관이 “이노~옴” “어디서 훔쳤는냐?” 도둑이 훔친 물건 중에 대단한 신분이 아니면 가지지 못하는 보침(寶枕)이 있었다.심문관은 무섭게 다그쳤다. 채찍을 내리치며 “사실대로 실토하지 못할까?” 드디어 “절간에서 얻었습니다.” 그러나 심문관은 믿을 수가 없었다. “바른대로 말하라 보침이 절간에서 나오다니….?” 하며 곤장을 친다. 그러나 도둑은 “틀림없습니다. 아이구 홍복사에서…”하며 비명을 지른다.

드디어 홍복사 어느 스님 방에서 훔쳤다고 확인이 되었다. 이 보침 사건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고 황제는 심신이 괴로워 밤잠을 설치고 삶에 허무를 느끼고 황실이 발칵 뒤집어졌다.

홍복사는 황제의 명을 받아 불경을 번역 하고있는 절이었다. 가서 확인하니 그 방은 변기라는 학식 높은 젊은 학승의 방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와 연이 닿았다고 하면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심문관의 끈질긴 추궁으로 태종 황제의 17황녀 고양공주의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녀는 당나라 초기에 명신이고 태종의 오른팔이라 하는 방현영의 며느리이다. 남편은 방유애이고 유애는 학문이 얕고 교양이 별로이고 반건달 같은 사람이고 고양공주는 아름답고 사치스럽고 학문을 좋아하며 좀 교만한 서로간에 맞지 않고 별 정이 없었다. 부모의 뜻으로만 혼인하던 시절 정략적으로 맺어진 부부 였다.

어느날 공주와 유애는 장안 근교에 수렵을 나가서 유애가 공주를 머물게 할 집을 찾다가 보니 자그마한 암자가 있어서 “거기 누가 없나 귀인이 오셨는데…” 하고 불렀더니 젊은 학승이 “어서 오십시요…” 하며 합장하며 나왔다. 허술한 승복 차림이지만 빼어나고 헌칠한 용모에 명석해 보이는 변기라는 학승이 단번에 공주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았다. 이때 공주는 16세 변기는 18세였다 남편 유애는 “어서 방 한칸 내어 놓으시요” 고 하고 보니 방은 누추하기 이를 대 없어 유애는 얼굴을 찡그리며 “다른 방 하나…” 하나 공주는 흔쾌히 방 안으로 들어 갔다.

항상 완력 만 있었지 문학적 소양 예의 범절 교양 같은 것 없는 유애에게 불만이 가득 했었는데 자기와 같이 교양 있어 보이고 명석한 학구적인 분위기에 매혹 되었고, 변기는 인적 드문 암자 에서 혼자 면학의 세월을 보내던 청년 앞에 눈 부실 만큼 현란한 아름다운 미녀 그것도 귀인이 나타나서 마치 불설에 극락에서 있을 여 보살이 자신의 젊은 심신의 번뇌를 구해 주고자 자비의 손길을 건네는 것처럼 여겨 졌다.

당서, ‘공주 열전’에 보면 ‘그때 공주를 수행 했던 시녀들이 암자에 임시로 자리를 마련하자 공주는 변기를 청 하여 그곳에서 두 사람은 당장에 청춘을 뜨겁게 불 태웠다. 그때 남편 유애는 아름다운 여주인의 충견(忠犬)처럼 밀회가 밖에 새 나가지 않게 다른 시자의 접근을 막고 애인과 나누는 공주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호위 했다’ 고 되어 있다 고 했다.

두 사람은 그 후부터 7년 동안 잦은 밀회가 있었고 이 정열적인 공주의 격렬한 사모에 이끌려 변기는 밀회를 거듭 할수록 파계에서 오는 정신적 갈등과 번민에 빠져 학승으로서 교학 연구에 바치고자 하는 포부와 지적 정열 사이에서 심적 고뇌로 미치도록 괴로웠으나 막상 공주를 만나 면, ‘살아있는 아름다운 여 보살!’ 그의 포옹에 현혹 되어 무간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이라도 마다 않고 지금의 현실에 빠졌다.

한편 공주는 남편께 고마움의 표시로 그녀의 아름다운 시녀를 유애에게 바쳤다. 유애 또한 마음대로 가지고 놀 마음에 쏙 드는 아름다운 여인을 받아서 하루 하루가 너무나 즐거웠다. 이상한 부부사이 남으로 하여금 서로 도우며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공주는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사랑하는 변기에게 자신이 언제나 베고 잤던 향기로운 보침을 사랑의 정표로 주었다.

변기는 그때 현장 스님이 인도에서 구해온 책들을 번역하는 불서를 편찬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는 학승이었으니 대단한 사건이었다. “공주는 가택 연금시키고 파계승 변기는 요참의 극형에 처하도록 하여라” 는 황제의 칙명이 내려졌다. 요참(腰斬)의 형이란 발가벗겨 도마 위 같은데 눕히고 허리를 동강내어 죽이는 형 이다.

처형 당할 때 공주는 권력자의 옹호를 받았고 변기는 공주를 겁탈한 나쁜 중놈으로 되어 장안성 과 인근 지역에서 구경 온 많은 사람들이 “더러운 놈, 중의 탈을 쓰고…” “유부녀를 겁탈 하고…” “죽여라, 거기를 잘라라” 등의 욕을 먹으며 죽었다고 한다. 한편 겁탈 당한 것으로 처리 할려고 시녀들을 가두고 했으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온갖 의혹심 섞인 말들이 첨가되어 아름다운 공주와 까까머리 중의 정사 장면 보침의 용도를 부풀려서 술집 밥집 저자거리 등에서 안주거리가 되어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 후 공주는 사랑하였던 정부를 극형인 요참형에 처한 부황을 미워하고 복수하여 변기의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앙칼지게 다짐하고 땡중 등과 놀아나는 반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한다.

자고로 소문은 절대권력도 막지 못하고 여자의 집념은 큰일을 내며 한을 품으면 무섭다.

 

 

 

세상이야기 5) 세가지 척을 잘해야 모범남자.

 

원시시대로

세상이야기 5) 세가지 척을 잘해야 모범남자.

이번회는 쪼잔하고 좀 치사한 이야기다.ㅎ

여자들은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아주 오랜 옛적에는 잘 몰라도 기록으로 남겨져 있는 이야기나 기억으로 상기해보면 예전에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많이 인내하고 살았다. 다른 나라를 예로 들것 없이 우리나라의 내가 기억에 남아 있는 것만 돌이켜봐도 여자들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있어도 꾹꾹 누르며 참고 살았다.

마음 속으로 하고 싶은 말 한마디도 남자들 보다는 참고 수동적으로 살았고 남자들은 능력에 따라 두 세 명의 여자를 터놓고 사랑 할 수도 있었다.

그때 자기를 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 알면서도 참았던 여자들은 속이 시커멓게 타고 있어도 참지 않으면 큰일이 났다.

칠거지악이니 하는 규율이 있어서 불평 했다가는 바로 보따리사서 갈 곳 없는 곳으로 가야 하였으며 출가 외인이라는 무시무시한 풍습이 있어서 친정으로 가지도 못했다. 여자들은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일생을 살게 되어도 절대로 옆 돌아 보지도 터 놓고 불평도 못하고 남자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만 양식이 있고 도덕적인 남자라면 좀 참고 여자의 권익을 세워주는 사람 있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참을 것이니 당신 마음대로 하여도 좋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토록 남자들은 참지 않고,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았고 여자들만 죽으라고 참고만 살아야 한다고 강요 하기만했다.

그후 약 50여년이 지났는 지금은 너무나 달라졌다.

여자들은 거꾸로 조금도 인내 하지 않고 오직 남자들만 참으라고 한다. 한 부분만 살짝 가리고 벗은것 같은 몸으로 흔들어대며 춤도 추고, 윗 저고리는 아예 입지 않고 고운 목선을 내어놓고, 가슴도 가까스로 가리어 호기심 많은 남자들 유혹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고 다니는 것 예사고, 손바닥만한 치마(?)도 입고, 길고 주욱 곧은 다리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자랑하고 다니니 남자들이 보면 너무나 아름답고 곧 성적 충동을 느끼게 한다.

또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면 남자에게 너무나 귀여운 말들 행위들 수시로 하기도 한다. 남자들 아직 의지 약하고 수컷 근성 억제하지 못한 이들 많이 있는데 그런 행위를 보고 그 유혹에 빠지면 큰일난다, 눈길 한번 잘 못 주기라도 하면 큰 코 다친다. 너 참으로 예쁘다고 히는 말 한마디도 장소 따라 분위기 살펴서 그 여자의 감정 살펴서 해야 한다.

일상 중에 미운 남자 골탕 먹일려고 벼르는 표적이 되면 어느 누구라도 연령 제한 없이 그 흉측스러운 올가미에 씌워진다. 또 있다 마음에 들었는 남자 있으면 나이도 상관없다. 수단과 방법 동원해서 사랑도 할려고 하는 여자들 많이 있다.

남편이 있어도 눈속여가며 하고 싶은 것 해야한다 그러다가 들키면 내가 머 잘 못했나 하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여자도 있다.

그러면서 자기남편은 혹여나 자기 말고 다른 여자 곁 눈질 할 까봐 주야로 감시감독하고 그런 기미 보이기 만 하면 사설탐정 같은 거라도 동원해서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서 꼼짝 못하게 올가미에 씌워서 초죽음 이라는 거가 이렇다는 것 가르켜 준다. 심한 여자는 남자를 죽이기까지도 한다.

자기들은 조금도 참지 않고 남자들만 참아라, 남자들은 보고도 못 본척, 듣고도 안 들은 척 알고도 모르는척, 세가지 척을 고수 해야하지 감정표현 잘못하면 구렁텅이에 빠지는 세상이 되었다. 남자들 이제는 인내심 갖고 잘 참아야 한다.

예전에 우리 조상님들 고조부님, 증조부님, 할아버지들께서 여자들에게만 참으라고 하고 고생시킨 죄값을 세월이 지나서 지금 고손자, 증손자 들이 늘상 받으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꾸욱 참고 그 죄값 성실히 치루어야 하고 숫 컷 근성 보였다가는 죽는다 느을 조심해야 한다.ㅎㅎ

 

 

 

사탄의 음료라고 했던 커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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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음료라고 했던 커피가.

서기 600년경에 이디오피아 예멘에서 한 양치기는 밤에 소리를 지르며 날뛰는 양들 때문에 잠을자지 못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어서 이상하게 여겨 양들을 따라다니며 관찰을 해보니 한번도 본적 없는 이상한 나무열매를 따먹고 있었다. 호기심에 그도 그 열매를 따먹었더니 조금 있다가 흥분 상태로 되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한사람 두사람으로 알려져서 커피의 영역은 이디오피아에서 자꾸 넓어져 갔다.

그 후 600여년이지난 1200년경에 예멘에서 식품으로 쓰이던 커피열매는 홍해를 넘어 메카, 카이로 등지로 보급되고 사제를 비롯한 특권층만이 마실수 있는 고급음료였다. 그후 1500년경에는 커피가 밤에 깨어있게 하는 음식으로 중동 전 지역으로 보급되어 커피숍도 생겼다. 특히 알코올음료를 마시지 않는 회교도들 사이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커피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는 이디오피아에 야생으로 커피나무가 자라는 곳이 있는데 그 지명이 카파(Kaffa)여서 그 지명에서 라고도 하고 힘과 정열을 뜻하는 희랍어 카화(Kaweh)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그 후1554년 콘스탄티노플에 카네스라는 찻집이 등장하여 상인들과 외교관들이 사교장으로 인기가 있었는데 이 카페가 유럽으로 건너가는 건널목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유럽의 전역으로 카페들에서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그런데 1605년 이탈리아에서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자극하는 사탄의 음료.’라며 기독교인들이 교황 클레멘토 8세에게 사람들이 못 마시게 건의했다. 그러나 교황은 오히려 “마셔보니 커피는 아주 훌륭한 음료다 이것을 이교도만의 음료로 두지말고 진정한 기독교인들의 음료로 만들어서 악마들의 콧대를 꺽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는 조선말기 1890년쯤 홍차와 함께 중국을 통해 들어왔는데 양탕국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고종황제가 최초의 커피마니아다고 소개한 글이 있다.

6.25전쟁때 주한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인스턴트커피가 고급음료로 취급되었으며 당시 다방에서 주로 마시는 음료로 많이 보급되었다. 수요가 늘어나니 1970년 동서식품이 인스턴트 커피를 처음 생산하였으나 그때도 그것 사서 집에서 먹을 형편이 되는 집들이 흔치는 않았다.

그런 커피가 만남의장소 또는 그 당시에는 사교장이라고 해도 될 다방을 점령하더니 요즈음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음식1위, 밥, 김치를 눌렀다는 농수산부의 자료도 있다.

지난해 커피원두 수입량이 13만 9천톤이라고하고 외국상표를 단 스타벅스 같은 커피가게가 생겨서 그 한잔의 가격도 중 상류 여타 음식값 정도 1만 몇 천원 하기도 한다고 하고 그래도 길거리에서도 차 중에서도 그것 한컵사서 한 손에 들고 다니며 마셔야 하는 음료로서 없으면 안 되는 음료로 되었다.

그러나 그래해서는 좋지 않고 하루에 두 세잔 정도를 음미하면서 마시면 건강에 아주 유익한 음료다고 한다.

 

의복제조기 재봉틀에 얽힌 아픈사연.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나와 똑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자주 볼수 있고 양복이라고 불려지는 남자들 옷은 색상만 다르지 거의가 거기서 거기의 모양이다. 이토록 요즈음은 모든 옷들이 치수에 따라 수 천벌씩 재단하여 재봉틀로 드르륵 박으면 된다. 그토록 되게 만든 것이 재봉틀이다.

그 재봉틀은 개발과정에 너무나 아픈 사연이 있었다는 글을 읽었다.

1830년에 파리의 뒷골목 빈민가에 살고있는 시몽은 1분간에 200바늘, 손바느질의 14배 빠르게 할 수 있는 재봉기계를 발명했다. 그렇지만 당시 손 바느질을 해서 먹고사는 수많은 직공들이 두려워 10여년이나 비밀에 부쳤다. 어느날 그의 집은 불타져서 잿 더미로 변했다. 직공들이 그가 개발했다는 기계가 자기들 생업을 위협할 것 같아 집을 부수고 불을 질러 애써 개발한 기계도 타버렀다.

1848년 두번째 만들었지만 역시 재봉노동자들에 의해 불 살려지고 가난의 밑바닥에 떨어진 최초의 재봉틀 발명자는 거지가 되어 가난과 절망속에 죽었다.

1819년 미국 매사츄세츠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하우라는 불구자가 보스턴에서 기계 기술자의 조수로 일하였고 아내는 집에서 싹 바느질을 하였는데 밤 늦게까지 바느질 하는 아내의 모습이 애처로워 바느질 하는 기계를 발명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연구 하던 중 어느날 꿈에서 본 토인의 창 끝 한가운데 구멍이 뚤려져 있는걸 보고 재봉바늘을 착안했다

1844년 24살 때 하우는 윗실과 밑실로 겹 바느질 할 수 있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바느질 기계를 발명했다. 빚도 많이지고 너무나 가난하였다.

하우 재봉틀 역시 옷만드는 공장의 직공들 반대에 상용화 되지 못하고 특허를 팔기위해 영국에 가 있는 동안 그의 발명품을 도둑 맞았다. 소득 없이 돌아와보니 그의 아내는 가난과 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도난 당한 하우의 재봉틀을 우연하게 입수한 사람은 미국으로 이민 온 독일인의 아들 아이삭 매리트 싱어 (1881_1875)였다. 그는 발 밟는 장치와 헌겁을 밀어내는 장치를 덧붙인 후 제작 판매했다.

한집에 한대의 재봉틀을 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여러 도시에 전시회를 열고 재봉하기 시합도하고 125달러짜리 한대 기계를 5달러만 내면 가질수 있도록 활부 판매도 했다. 싱어의 재봉틀은 순식간에 전세계에 보급되고 싱어회사는 세계 제일의 재봉틀 회사가 되었다.

발명품들이 그것을 발명한 사람은 고생만 하고 그것 때문에 병이들려 일찍 죽었다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이 그것으로 큰 성공을 한 경우를 자주 보았다. 지금도 우리 곁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큰 성공을 할것이다고 여기고 신제품을 개발도하고 창업도 하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자주 볼수있다. 오히려 그러고 난후 수년이지나고 그런 제품이 다른 사람이 개발하어 많이 보급되고 엉뚱한 사람이 혜택을 보는 것 자주 볼수 있다.

손으로 한땀 한땀씩 바느질 하는 시대에 재봉틀은 의류제조에 큰 혁명이었다. 위에 사진의 싱어라는 마크가 찍혀있는 재봉틀 어릴때 어머니도 쓰셨던 것이다. 그것으로 아버지 무명 바지저고리도 만들고 우리들 옷도 손수 만들어 주셨다.

예전에는 의식주(衣食住)가 족하면 행복하다고 하였다. 의가 제일 첫머리에 쓴다 그만큼 의복이 중요하다는 것 아닐까. 그러나 다른 분야는 첫번째 발명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더 능율적이고 좋게 하는 변화된 것도 많으나 의복제조는 아직도 싱어의 발명품 재봉틀로 그때 그방식 윗실과 아래 실이 서로 작용하여 헝겁이 깁어 지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

얼마전 광고를 보니 여성들 속옷이 재봉선이 없는 옷이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고 하던데 재봉선 없이 접합시키는 방식인지 아니면 통째로 제작한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상식으로 가능 할 것 같고 머지않아 우리들의 옷도 만드는데 지금의 아날로그식 재봉틀이 필요 없이 만들어지는 날이 곧 올 때가 되었다.

여타 다른 산업들을 보면 아나로그식의 재봉틀도 머지않아 창고에 들어 갈 것이다.

 

 

 

 

 

옛날 보리 밀로 인한 아련한 추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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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보리 밀로 인한 아련한 추억들.

보리와 밀은 우리주식으로 먹을 때도 있었다 반년 동안은 그것으로만 먹었다.

가을에 수확한 곡식이 떨어질 때 이것들이 여물었다 보릿고개라는 말은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서 먹을게 귀할 때 봄철을 가르키는 춘궁기를 이르기도 한 말이다.

먹을 거는 없고 하도 힘들어 태산보다 높은 보릿고개라고도 하였다.

보리와 밀이 미처 익기도 전에 굶주린 사람들이 몰래 이삭만 따가기도 했고 밤중에 배어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전라도 지방에는 밤중에 활을 매고 지키다가 쏘아 죽이기도 한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보리는 알이 껍대기가 잘 벗겨지는 쌀보리 미맥과 잘 벗겨지지 않는 겉보리 피맥 또 맥주보리 등이 있는데 경상도 지방은 겉보리를 많이 심었고 전라도 지방은 쌀 보리를 많이 심었다. 겉보리는 늦가을에 심고 쌀보리는 이른봄에 심어서 겉보리보다 조금 늦게 추수하고 모심기를 좀 늦게 한다.

1960년대 까지도 보리는 여름 주식이었다 지금 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세대는 보리에 대한 마음 아린 추억이 많지만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도 있었다.

보리쌀을 한번 쌂아서 두번째 적당양의 물을 붇고 밥을 한 꽁보리밥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 먹으면 껄끄러운 것이 별로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싫컷 못 먹어서 허기진배로 산 긴 세월이 있었다..

우리는 국민학교 다닐 때 이른 봄에 겨울동안 얼어 부풀어 들떠 있는 보리뿌리를 활착시키는 보리밟기에 동원되기도 하였고 다 익어가는 밀밭에서 밀 이삭을 뽑아 밀서리라고 마른 나뭇가지 주워 붙 붙여 지지면 밀 껍질이 벗겨지고 약간 익은 밀을 먹으면 맛있다 그러고 나면 입가가 검정이 묻어서 서로 보고 웃고 검정 묻은 손으로 수염 그리기도 하였다.

보리밟기는 주로 논에 하였는데 밟을 때 60명 한 반이 2, 3명이 한 고랑씩 맡아 주욱 밟으면서 웃고 떠들며 재미있는 추억도 있었고 또 사춘기때 일찍 성에 눈뜬 남녀들 아지랑이 아롱대는 봄날 보리밭 밀밭이 연애 무대가 되기도 하고 깜부기라고 일종의 병을 앓는 보리를 먹고 장난도 했다.

통일벼가 개발이 되고 수리시설이 발달되어 논 농사가 많아져서 쌀 수확이 많아질 때는 도시락에 보리가 썪여 있는지 검사도 했다.

그리고 쌀값 보다가 보리쌀 값은 쌋다 그런 보리가 지금은 잘 볼수 없고 관상용으로 심어둔 것 간혹 볼수 있고 전남 지방에 지금도 더러 심어 진다고 한다 그리고 쌀 보다가는 천대 밭던 보리쌀이 요즈음은 쌀에는 없는 무슨 영양소가 들어있다고 하고 성인병을 예방해준다는 건강식이라고 하며 값도 많이 비싸다.

이제는 보리와 밀을 많이 심는 것도 농촌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보리와 밀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올라 갈 정도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6천년 전쯤 중동지역이 원산지라고 하고 인류가 재배한 먹을거리 중 가장 오래된 작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기는 약2500년 전쯤 이라고 한다.

우리 할아버지들 아버지 어머니들은 보리밥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살으신 분들이다. 훗날 내 손자도 지금 우리처럼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런 세상도 못보고 가셨네 하는 엄청나게 변화된 세상이 올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기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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