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동생과 오랜만에 김치가 맛있다는 집에서 번개 저녁을 함께 하였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중학교 1학년인 막내 동생에게 맞춰 막내와 동급생들을 대상으로 몇년 간 과외를 했었습니다. 막내 고3시절 대학진학시 학교에서는 학교를 우선한 공대를 추천하였는데,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현대중공업에서 수출입업무를 하고 있던 제가 전문직이 더 낫다고 의대를 권하였습니다.
고르고 고른 대학에 1지원은 의대로, 2지원은 약대로 썼는데 3지원까지 쓰게 되어 있었습니다. 3지원을 쓰지 않겠다는 것을 강권하여 쓰게했는데 당시 막내가 손길 가는데로 찍은 것이 전기공학과였습니다. 입시 결과는 하필 그 해 의대에 많은 학생들이 몰렸고 1지원 탈락, 2지원도 탈락하였습니다. 2지원까지만 확인하였다는 동생을 달래서 3차 결과를 보라했더니 합격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염두에 두지 않았던 학과, 우연히 손가는 데로 찍은 학과에는 다닐 수 없다고 재수하겠다는 것을 달래서 1년만 다녀보고 정 안되겠으면 재수하라고 해서 다니기 시작한 대학생활을 막내는 참 재미없어하며 다녔습니다. 졸업 무렵이 되자 어느 학과든 본인이 선택해서 다시 다녀보겠다는 것을 또 달래서 일단 누나가 다니는 현대에 시험을 쳐보고 합격하면 사회생활을 시작해보고 그래도 안되겠다면 그 때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막내는 현대중공업, 현대엔지니어링, 현대엘리베이터, 삼성중공업, 포스코건설 등 다양한 회사에서 일을 해왔고 지금은 GS건설에서 일을 잘 하고 있습니다. 가끔 막내를 생각할 때마다 재수한다고 할 때 그러라고 했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인도된 삶도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막내의 선택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막내가 대학1학년 때 만난 올케와 10년 이상을 연애하고 결혼을 한 신혼시절 부부싸움이 크게 벌어졌다고 해서 양가 어른들이 한밤중에 모인 적이 있습니다. 싸움의 원인을 물어보니 막내가 형님은 부모님을 모시고 있으니 본인은 누나를 모셔야겠다고 했다가 일이 커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이었던 저는 양가가 모인 자리에서 내 스스로 살아갈 역량이 충분하고 결코 동생이 모시게하는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무슨 자리에서든 ‘막내’라고 부르니 언젠가는 ‘저도 아들 둘이 있는 애아범입니다.’라며 막내로 불리기를 거부했던 그 막내가 벌써 나이 50 중반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들 둘을 군대 보내 다 제대시키고 내년이면 둘 다 대학을 졸업하는데 향후 아들들이 원하는대로 사회 진출을 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라는 막내의 걱정이 잘 풀리기를 바라며 저녁을 마쳤습니다.
어짜하였건 당시 미혼이었던 누나가 나이들면 자신이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던 막내의 ‘마음’은 지금까지도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