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별 글 목록: 2017년 6월월

갑자기 혼자가 되다.

갑자기 혼자ㅣ갑자기 혼자가 되다
이자벨 오티시에르 지음, 서준환 옮김 / 자음과모음 / 2017년 5월

어릴 적 읽은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과 15 소년의 표류기는 미지의 세계, 그것도 무인도라는 섬에 정착했을 때의 무궁무진한 삶에 대한 일말의 희망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부족함이 없었던 책이었다.

 

특히 로빈슨이란 인물이 홀로 남겨진 섬에서 스스로의 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은 그럴듯한 모습과 함께 누구라도 이런 식이라면 홀로 남겨진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은 없을 것이란 상상을 더해주는데 더할 나위 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런데 또 다른 방향의 제시를 해 준 책으로 인해 과연 로빈슨의 생활은 가능했었는지에 대한 해석과 관점을 달리 보이게 한 책이 있었으니 미셸 투르니에의 작품인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란 작품이었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동화를 통해 성장해 나가는 길목에서 던져줄 수 있는 희망과 긍지, 자신감과 꿈을 간직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해 읽은  글이란 점을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싶기도 하지만 냉철한 각도에서 달리 받아들여지는 미셸의 책은 크게 인상이 남은 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읽으면서 또 한 번 미셸의 책을 동시에 생각해 가면서 읽게 했다.

이 소설은 세계 최초로 혼자 배를 타고 세계 일주에 성공한 여성 항해사 이자벨 오티시에르가 쓴 장편소설로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극의 상황에 몰리게 될 때의 인간의 선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행한 행동에 대해 어떤 시선과 관점,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 준 책이다.

 

서른을 막 넘긴 루이즈와 그녀의 남자 친구 뤼도비크, 두 사람은 동거를 하면서 살아가는 커플이다.

유머 넘치고 자유분방하며 쾌활한 퀴도비크의 계획에 따라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안식년을 이용해 배 항해를 시작한다.

돌고 돌아 남아프리카까지 가기로 결정한 그들의 계획은 남미 대륙의 끝인 파타고니아와 혼 곶 사이에 있는 천해의 자연보호구역인 어느 무인도에 몰아친 폭풍우로 인해 배는 종적을 감추게 되고 그나마  구명정만  간신히 건지게 된다.

 

이후 그들은 한때 고래잡이가 성행하던 시절  이 곳에 기지를 세우고  번창했던 사업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유물들을 보면서 이 난관을 헤쳐나가려고 애를 쓰게 된다.

 

변변한 옷이나 식량조차도 없던 그들 앞에 도사린 것은 굶주림과 변덕스러운 기상변화, 곧 불어닥칠 겨울의 추위로 인한 식량 비축까지….

 

책에서 익힌 지식들을 이용해보려 하지만 전혀 이용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곳, 보호 동물인 펭귄을 잡아 털을 뽑고 말리다가 쥐에게 상납당하고 강치를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은 급기야 서로에 대한 원망과 미움, 걷잡을 수 없는 절망을,  특히 그들 사이에 놓인 사랑마저 언제 했는지에 대한 기억조차도 물러서게 만든다.

 

둘이 의지하되 서로 혼자임을 느끼게 되는 과정, 관광 크루즈선이 보였을 때의 두 사람의 각기 다른 행동은 걷잡을 수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데….

 

미셀이 그린 책에 나오는  정반대의 크루소를 그리고 있는 점을 타당하다고 느끼게 해 주는 책,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경험과 생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데, 일종의 경고라고나 할까?

무수히 많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한낱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 인간들은 너무나도 자만심이 가득하다는 사실,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도 전혀 손을 쓸 수 없고, 이성마저 마비시키는 굶주림은 아무리 사랑으로 맺어진 연인이라고 할 지라도 각개의 독립적인 고독과 혼자라는 자각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는 과정들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도전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독자들은  루이즈가 기가 빠지고  절망, 굶주림에 빠진 뤼도비크를 남겨두고 홀로 섬을 탈출했을 때와 다시 돌아올 때의 기간 사이에 느꼈던 감정의 변화를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해서라도 구조의 손길을 찾고자 떠난 길이 자신이 찾은 기지에서의  아늑함,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잠, 다시 원기를 회복했지만 다시 돌아가길 머뭇거렸던 행간의 의미를 통해 인간 각자의 삶에서 이성을 제치고 본능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이행한 루이즈에게 차가운 눈길을 보낼 수 있는지를 묻는다.

 

살기1

살기2

책은 섬에서의 ‘저편에서’와 극적으로 구조된 루이즈의 세상 나오기 편인 ‘이곳에서’를 통해 상반된 삶의 모습을 보인다.

 

보통의 우리들인  인간들이 갖게 되는 궁금증, 정말 그곳에서 로빈슨 크루소 같은 생활을 하고 구조된 한 여인의 경험을 그저 신기하고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세태와 이를 이용한 매스컴의 보도와 기자의 눈에 비친 또 다른 영역 활동은 루이즈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진실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다는 사실 이면에 또 다른 망설임을 통해 인간으로 지닌 양심의 끝없는 가책을 보여줬단 점에서 저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살기 위한 본능,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상호작용을 해야만 공존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경각심, 이성으로 돌아왔을 때의 겪게 되는 루이즈의 행동을 통해 결코 자연이 우습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줬단 점에서 이 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자연은 그대로 그곳에 항상 있지만 인간들의 무분별한 행동과 자만으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는 소리 없는 몸살과 아우성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한 책이자 저자의 계절 변화에 따른 풍경 묘사는 인상적이면서도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루이즈가 정신적인 충격을 딛고 일어서는 의지를 담고도 있는 책이기에 여러 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지게 한 책이 아닌가 한다.

 

카이사르 1

카이사르 1 마스터스 오브 로마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제5부인 <카이사르 1>이다.

이미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연속적인 발간으로 인해 이야기의 흐름은 여전히 흥미와 역사적인 재미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시오노 나나미가 애정 하는 카이사르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해서 다룬 것을 보더라도 카이사르란 인물은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사람임은 틀림이 없다.

 

정치에서는 아군도 적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필요에 의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서로가 반목된 결점들이 있더라도 한 수 접고 동지애를 발산시키는 체제이다.

그렇기에 이미 카이사르는 자신의 딸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킴으로써 정치적인 동지애를 장인과 사위라는 혈연관계로 끈끈하게 맺게 되지만 이 책의 처음 시작처럼 안타깝게도 딸 율리아는 출산 도중 사망했다는 비보를, 더군다나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다.

엄청난 비보였을 텐데도 군인은 군인인지라 애도의 기간을 거친 후에 카이사르는 본격적인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의 여러 부족을 분개 별로 무너뜨리며 정복의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영역 활동에 있어 카이사르는 주도면밀하게 본국의 정세 또한 놓치지 않고 있었고 이는 사위였던 폼페이우스가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넘어선 로마 만민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던 카이사르에 대해 견제의 눈길을 돌리면서 본격적인 공화정 말기의 정세를 그려낸다.

 

확실히 저자의 필치는 세밀하고 노련하다.

많은 방대한 로마의 이야기였기 때문일까?

주요 등장인물들이 나올 때마다 독자들에게 기억력 회생을 시켜주는 친절성, 비록 야만족이라고 칭했던 갈리아의 한 부족과의 싸움에서도 상대 부족장의 전쟁 옷을 묘사한 부분들은 철저한 고증의 자세와 성실성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냉철하자면 끝없이 냉철하다가도 유머와 지성, 뭇 여성들과의 염문에도 그 흔한 원망조차 듣기 어려웠다던 카이사르의 처신은 이제 본국에서의 핏줄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혼미한 공화정을 뒤엎고 자신이 꿈꾸는 세상으로의 진입을 마칠 준비를 하려는 자의 정신적, 육체적인 자세가 냉혹하게 그려진다.

 

서로가 서로가 취하는 바를 원하는 것이라면 한 눈은 지그시 감고 한 눈은 매의 눈으로 섭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어떤 작은 소도구라도 쓸모가 있는 법, 카이사르에게 오랜 원한을 품고 있는 보니 파의 카토와 비불루스와 폼페이우스의 연합, 드디어 로마로 복직해 원로원에 입성한 부투스의 존재는 이후 루비콘 강을 건너기까지의 긴박한 상황들과 이후 정국을 어떻게 그려낼지 다음 편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만일은 없지만 항상 생각하는 상상이 있다.

카이사르의 계획대로 자신이 초대 황제에 오르고 차근차근 로마 제정으로의 초석이 다져졌다면 과연 로마제국은 어떤 모습으로 지금의 유럽 정세를 변화시켰을지, 읽으면서도 내내 여전히 그의 죽음이 안타깝게 여겨질 뿐이다.

 

카이사르에 대한 평, 이 문장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 “카이사르에 관한 한 술책은 습관이 되지 않아. 불가피한 것일 뿐. 폼페이우스는 누구를 속이려 할 때 스스로 거미줄 속에 뒤엉키네. 그래, 그가 거미줄들을 잘 다루기는 하지. 그래도 거미줄은 거미줄이야. 그에 반해 카이사르는 태피스트리를 짜지.” -p. 349~350

 

자, 이제 판은 정해졌고 얼만큼의 정교한 태피스트리를 통해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할지 독자들은 여전히 목마르다.

                                                                                                                          
                                            

 

선한 이웃

선한이웃선한 이웃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5월

책을 모두 읽고서 한참 동안 어떻게 써야할지 기준이 잡힐 질 않았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등의 작품을 통해 익히 알려진 작가가 그리는 1987년 6월은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왔는지에 대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한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저자의 오랜만에 나온 출간작의 배경이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이야기는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을 모티프로  출발한 만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대를 다룬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제목만 보고서 내 나름대로의 착각을 한 점도 한몫을 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선한 이웃, 말 자체의 어감은 부드럽게 다가오지만 이  책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들은 누가 선한 이웃이고 누가 악한 이웃인 지 조차도 모호할 정도의 판단력의 기준에 혼동을 불러일으킨다.

 

책은 운동권의 실세로 지목된 미지의 인물인 최민석이라고 불리는 자를 잡기 위해 당시 흔하게 벌어졌던 대학생들과 경찰들의 대치상황을 통해 이 작전에 투입된 김기준이란 인물, 그리고 연극 연출가인 이태주와 배우를 꿈꾸는 여인이자 이태주의 페르소나인 김진아란 여인, 그리고 김기준의 상사인 관리관의 시선으로 이야기는 그려진다.

 

이태주는 연극으로서 줄리어스 시저에 대한 공연을 올리기 위해 자신이 번역한 대본을 수정하고 배우들을 캐스팅하면서 무대에 올리지만 한 줄의 번역을 바꾸면서 이내 연극이 끝남과 동시에  경찰에 끌려가게 된다.

자신과 동료 배우들이 서로 다른 대우를 받았다는 눈초리는 이내 연극계에서 외면당하고 그 자신 또한 미행의 두려움을 느끼며 재기를 노리던 중 진아를 만나게 되고 그는 진아를 내세워 엘렉트라 란 연극을 올릴 계획을 세우게 된다.

 

언뜻 보면 전혀 상관없을 듯한 세 사람의 조합과 만남은 국가의 철저한 계획과 통제하에 길러긴 정보요원 길들이기와 시대의 흐름에 상관없이 자신의 맡은 바대로 임무를 충실히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김기준이란 인물이 실패한 작전에 대한 만회를 위해 최민석 잡기에 올인하는 과정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준다.

 

 

– 빨갱이를 잡고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일은 정치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민석을 쫓기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최민석을 쫓았다. 그냥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충실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제대로 일하는 방식이었다._144쪽

 

정부가 원하는 방향대로, 그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양심대로 행동했을 뿐인 결과로써의 참혹한 사실들을 접하는 과정에서의 독자들은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되며 이후 반전의 결과물을 또 한 번 접하면서 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 생존 때문에 악이란 것에 자신도 모르게 발을 내딛고 살았다는 자각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의 국가 개입을 통한 한 개인의 인생을 망치는 과정들이 여전히 시대의 아픔을 전달해준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주도권 하에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라 할지라도 당시 시대의 흐름은 이토록 쉬운 일도 하기 어려웠다는 사실, 철저한 강약 공세을 쥐고 두 사람을 쥐고 펴락 했던 관리자란 인물이 생각했던 그 나름대로의 선의의 정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책은 연극 작품을 통해 은유의 문법을 통한  이태주의 주장이 섞이면서 몰입도는 힘들게 하지만 한쪽에선 여전히 본 적이 없는 실세 최민석을 잡기 위해 모든 설계도에 그려진 것처럼 착착 옭아매기 위해 조여 오는 김기준과 또 다른 쪽에선 연극에 대한 논쟁으로 그려진 반대의 상황을 통해 과연 이 설정을 통해 진정한 나 자신은 무엇인지를 헷갈리게 한다.

 

– “범죄를 규정하는 건 의도가 아니라 결과야. 강요에 따랐든 자발적이었든 간에 거짓말은 거짓말이고, 범죄는 범죄야, 선의의 거짓말도, 어쩔 수 없는 범죄도 없어. 진실을 감추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그냥 악일 뿐이라고.”-p 246

 

 

의도한 바는 아닌 선한 행동으로 인한 결과물이 결국 악으로 인식되었을 때의 태주처럼 과연 우리들은 선한 이웃이었을까? 아니면 악한 이웃이었을까?

30년이 흐른 지금의 우리들 모습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선한 이웃은 어떤 기준으로 불렸을 때의 모습이었을지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 작품이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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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증명

악마증명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처음 도진기란 이름의 작가를 대한 것이 바로 ‘악마의 증명’이란 책이었다.

소재 자체도 신선했지만 저자의 이력면에서 더욱 흥미를 이끌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 외국처럼 자신의 활동분야에서 주 전공은 전공대로 활동하되 또 다른 번외의 외전처럼 제2의 창작활동이란 전혀 상반되면서도 연관성이 있는 소재를 통해 독자들과의 만남을 모색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직 판사로서 그가 그동안 쌓아왔던 장편들을 대하면서 한국적인 주 무대를 그린 점, 그런 가운데 법정에서 자신의 일을 보다 상세히 다루고 그 안에서 오고 가는 여러 정황들을 보통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토로하는 상황들이 또 다른 한국적인 맛을 느끼게 해 준 덕에 그의 작품에 대한 기대감 또한 갖게 했다.

 

이번에 그동안 각 출판사에서 내놓았던 작품들과 미처 발표하지 못했던 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발표한 저자의 작품들은 여전히 다시 읽어도 당시의 흥분과 느낌을 되새기게 한다.

 

특히 ‘악마의 증명’같은 경우는 쌍둥이란 점을 이용해  한 사람의 범죄를 증명한다는 기막힌 설정 때문에 내 기억 속에는 여전히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그런 이 작품을 여러 개의 이야기들 속에 첫 번째 주자로 내세운 점은 나만이 아니라 독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동감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기에 첫 주자로 내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생각도 해보게 된다.

 

 

저자의 글들은 하나의 성격을 이어가는 형태의 글이 아닌 다양한 문학적인 시도를 한 작품들이 섞여있다는 점이다.

 

읽으면서 섬뜩했던 ‘죽음이 갈라놓을 때’ 란 작품에서 전혀 도진기 작가의 작품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냉혹함을 보였던가 하면 남편을 죽인 여인의 정당방위 주장을 위해 혈기 넘치는 변화사의 활약을 그린 ‘구석의 노인’ 같은 작품은 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증거물과 정황들을 가지고 판결을 내린다고 해도 그 결정이 오랜 인생을 살아온 한 노인의 눈에 비친 인생의 또 다른 면을 통해 들여다보는 방향 전환점과는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그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제대로 알고 이런 법 진행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인간사의 새옹지마와 같은 느낌을 여실히 보여줬단 점에서 두 번째로 좋은 작품 대열에 꼽아본다.

 

또한 시간의 연속성의 되풀이로 인한 환상을 곁들인 ‘시간의 뫼비우스’는 당시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시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짜릿함을 느낄 수가 있었고, 그 밖의 작품들 또한 분위기가 전혀 다른 내용들을 전해 주기에 지루함을 모르게 한다.

 

이제는 현직 판사라는 법복을 벗고 본격적인 소설가로서의 길을 택한 도진기 작가가 과연 다음 작품에선 자신의 신분과 활동에 힘쓰면서 썼던 작품과는 어떻게 다른 작품을 선보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특히 책 말미에 저자가 쓴 내용 중 개인적으로도 궁금했던 ‘악마의 증명’ 이란 작품의 표절 문제로 방송매체와의 대립을 두었던 결과물의 저간 사정을 짧게나마 알게 된 것이 좋았다.

창작자로서의 자신의 자식처럼 여겨진 작품에 대한 당시의 고통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었단 점에서 차후 이러한 소설도 좋지만 단편을 통해서 한국적인 추리 스릴의 장르를 개척할 수 있다는 노력과 의지를 느낄 수 있었던 책인 만큼 외국의 소설과 비교해 읽어도 좋은 책이란 생각을 해 본다.

 

도진기 작가의 건필을 빈다.

머그컵을 받았습니다.

컾과 책

 

위블지기 님으로부터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컵을 선물 받았습니다.

요즘은 흔하디 흔한 머그컵이 많고 인터넷 서점에서도 굿즈란 이름으로 해당 금액 이상이면 컵을 주는 행사가 있는지라 집에 컵이 조금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특정 문구, 원하는 문구를 새겨주시는 센스와 함께 머그컵을 받고 보니 아까워서 어디 사용하겠나 싶더군요.

가족들이 연신 탐을 내긴 하는데, 아직은 사용할 엄두도 못내겠고 아는 지인들에게 사방팔방 자랑하는중입니다.

전 얼마 전 읽은 최갑수 님의 글 중에서 발췌해 신청했는데, 선택한 문구가 읽고 썼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네요.

 

먼저 전에 주신 엽서 또한 고이 간직 중입니다.

위블러거들의 분위기에 맞는 엽서 선정과 선물을 주셨는데, 미처 올리질 못하고 있다가 이번 기회에 같이 올려주시면 좋을것 같단 생각을 하신 위블지기 님의 생각에 동참하고자 올려봅니다.

 

 

컵과 우표

 

엽서는 제 나름대로 다시 사진을 찍어 스마트 폰 홈배경 화면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멋진 풍경과 함께 선물 받았을 때의 기분도 느껴보고, 이제는 머그컵까지 있으니 더할 나위없는 선물대잔치라서 정말 기분 좋네요.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위블지기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시대의 소음

시대소음표지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한 인간의 무한한 창작의 열의와 욕구의 발산은 그대로 그 자신의 몫으로도 남지만 그 이후의 후세대들에 의한 평가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오래도록 인간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게 마련이다.

혹독한 평가이거나 아니면 당 시대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더라도 후대에 이르서 평단의 결과가 바뀌어 오히려 좋은 결과물로 남게 될 경우는 더욱 그렇기도 하지만 이미 유명 인사로서의 지명도를 가진 인물을 소설 속에서 다룬다면 과연 어떤 평가를 독자들은 내리게 될까?

 

줄리언 반스의 신작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흥분감, 더군다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실존 인물의 인생을 역사 속에서 녹여냈다는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은 전작들 못지않은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쇼스타고비치-

익히 알려진 소련의 유명 음악가라고, 특히 그의 작품은 연주하기 어렵다는 라흐마니노프에 비교된다는  사실만 알뿐 클래식에 관해선 크로스오버와 귀에 익은 음악 정도만 알고 있었던 내겐 흥미로운 인물로 다가왔다.

 

사실 실존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녹여낼 때만큼 창작자들의 고뇌도 만만찮게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고 상상이 가는바, 줄리언 반스의 글은 역시 실존 인물의 창작과 예술의 세계와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한 한 개인의 고뇌를 역사라는 이름 속에 작지만 큰  빅의 그림자의 대립을 통해 적절히 잘 녹여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여기 한 남자가 승강기 옆에 내내 서 있다.

담배만도 벌써 다섯 대를 피웠고 그의 이런 불안은 차라리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눈에 낯선 미지의 인물들이 자신을 어서 데려가 주길, 그래서 얼른 죽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편한 잠옷? 하긴 이런 옷을 입고 자길 원하는 부인의 말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정장을 갖추고 침대에 누워 있고 옆에 가방을 가지런히, 언제라도 나갈 준비태세로 잠을 취하는 이 사람, 바로 쇼스타고비치다.

 

그의 탁월한 음악적인 해석과 작곡 능력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촉망받았으나  윤년마다 세 번의 결정적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만 했던 암울한 시기를 보낸 음악가이다.

 

세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그의 음악적인 활동은 두 번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Ledi Makbet Mtsenskovo uyezda>이 스탈린에 의해 분노를 사게 되면서 당국의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고 이후 이 작품은 올릴 수가 없게 된다.

 

이 시기에 같이 활동했던 음악 동료들이 끌려가 죽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 자신 또한 그런 날이 멀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만큼 삶에 대한 생각,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생각은 이후 죽음을 비켜가게 되면서 당국의 비판을 수용하게 되고, 당국이 원하는 음악을 하게 된다.

 

 

낙관1

낙관2

 

당시 소련에서 일어났던 형식주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자신의 작품에 비하면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기적일 정도로 여겨지는, 음악가의 삶은 점차 모순적인 것을 알면서도 겉으로는 수긍하되 내면적으로는 창작에 대한 괴로움을 동시에 안고 가는, 아이러니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런 그의 삶은 스탈린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철저히 소련 문화 자체가 통제받는 시기를 거쳐 세계 2차 대전과 후르시쵸프 시대를 맞이하면서 또 다른 음악 창작활동에 전환점을 맞게 된다.

 

진실

저자의 조사와 그 당시 쇼스타코비치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을 근거로 내세운 이 작품은 제목 자체가 주는 시대의 소음으로 인한 창작자의 작품 활동을 통해 어떻게 당국의 검열과 교육, 통제를 받고 서방에 날아가서까지 당국이 원하는 활동을 하는지에 대한 그의 인생 전편에 흐르는 여러 가지 고심에 찬 모습들을 잘 그려내고 있다.

 

어느 시대나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시대가 있는가 하면 위의 시대, 특히 세 시기를 걸쳐서 살아갔던 많은 예술인들이라면 자신의 원대한 창작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고 그들이 원하는 초점에 맞추어 작품을 생산해내야만 한다면, 그것을 거절했을 경우에 어떤 보복과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들, 친지들, 관계자들까지 어떤 영향을 미칠지 뻔히 하는 상태에서라면 과연 우리들은 쇼스타고비치가 해왔던 행동들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소음진실

그 역시 이러한 부조리한 시대에서 오는 통제와 간섭, 폭력이 난무하고 가난과 고통이 사방에 널려있던 그 시대에 자신보다는 그 자신의 가족들과 주의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이를 행해야만 했다는 현실성, 그렇기에 작품 속에 당국의 심경을 거슬리지 않고 자신의 창작의 뜻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수단으로 아이러니를 매개로 했다는 점은 무엇이 옳은 행동이고 그른 행동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전에 예술의 진위성, 진정한 예술인으로서의 고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살아오는 내내 끝없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차라리 미리 죽은 동료들을 부러워해야만 했던 당시의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데서 체제의 불합리에서 오는 한 나약한 예술가의 그 나름대로의 치열했던 삶을 통해 진정한 용기와 비겁함의 차이는 결국 종이 한 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체제의 통제에서 그 자신 스스로가 당국에 협조를 하되 자신만의 예술적 신념과 창작만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오늘날에도 곳곳에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시대의 소음을 연일 들으면서 살아가 는 우리들에게 그가 들려주는 예술과 창작에 대한 열의는 소음마저 잠재울 수 있는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의 생 전 연대를 통틀어 본다면 무난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되던 독자들에게 이 책은 타 작가들처럼 망명이란 것을 하지 않고 자신의 나라에서 예술이란 것에 온 생애를 바치며 줄 타는 심정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한 예술가의 삶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마티네의 끝에서

마티네의 끝에서마티네의 끝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5월

 

 

 

 

 

 

지금 옆에 있는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책 띠지의 문구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파스텔톤의 책 표지 그림도 그렇지만 책을 읽기 전에 두루두루 살펴보며 첫 페이지를 열기 전의 강렬함이 다가오기는 모처럼 느끼게 되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그렇다고 책 속의 이런 경험을 해본 적도, 상상한 적도 극히 일부의 책을 통해서나 느꼈을 뿐인 이 책의 내용들은 얼마 전에 읽은 책과는 또 다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신문에서도 나온 적이 있지만 마티네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시청 근처로 기억이 되는데, 점심 시간을 이용해 직장인들이나 지나가는 사람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음악을 연주한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즉 프랑스어 마탱(아침)에서 온 단어인 마티네란 용어를 이용한 이런 종류의 음악을 낮에 들려줌으로써 음악을 쉽게 접해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음악회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는데, 바로 이 책의 제목이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그것이 마음 한편의 구석 속에 꼭꼭 숨어 감추어버린 하나의 추억거리로 자리 잡았다 할지라도 첫사랑이란  단어가 내뿜는 지속성은 아련한 기억이란 이미지 속에 또 하나의 사랑의 형성 형태로 남기가 쉽다는 것을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접해보곤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선 떠올랐던 것은 언제인지는 기억이 가물 하나, 차인표, 이영애 주연의 ‘불꽃’이란 드라마가 연상이 됐다.

 

결혼할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한순간에 사랑에 빠져 격정적인 사랑을 잊지 못하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감행하는 여정과 힘든 다른 생활을 보여주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 책은 이런 두 남녀가 처한 공통된 소재를 갖는다.

 

당시엔  정말 이렇게 짧은 순간에 말 그대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적이 있던 만큼 이 책 속의 두 주인공의 만남도 그렇다.

 

이미 천재적인 클래식 기타계에서는 독보적인 천재로 불리는  마키노 사토시는 데뷔 20주년 기념 공연 마지막 날 프랑스 RFP 통신에 근무하는 기자 고미네 요코를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어떤 첫인상의 강렬함을 느낀 두 사람은 그 짧은 대화를 통해 좀 더 이 시간을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지만 이내 아쉬운 작별을 고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였던 크로아티아인 영화감독 아버지와 일본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요코는 이미 미국인 약혼자가 있는 상태였고 두 사람은 각자가 지닌 감정을 지닌 채, 서로의 삶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마키노는 때마침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연주자로서의 한계와 요코에 대한 감정이 겹치면서 슬럼프에 빠지게 되고 요코는 요코 나름대로 바그다드 취재로 인한 파견 근무에서 폭탄 테러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두 사람의 멀고도 먼 사랑의 감정은 우연찮게 한 나라에서 다시 재회를 하게 되는데….

 

철 모를 때의 10대의 사랑과는 확연히 다른, 이제는 세상의 흐름 속에 나 자신을 어느 정도의 타협과 현실에 입각한 이해를 하면서 살아가는 중년들의 사랑은 어떻게 표현이 될까?

그 흔하다고 하는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의 감정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이 사랑을 간직하고 표현하는 감정 표현에는 확실히 신중함을 보인다.

그것이 두 사람이 처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을 넘어서 두 사람만의 미래를 약속하기로 한 그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험난한 앞길이 생겼다면, 인생 속에 사랑이 들어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두 사람의 오해와 당시의 여건은 나이 때에 따른 선택의 신중함을 보인다.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쾌활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라는 고독감을, 일이나 취미 같은 장점은 그럴 리 없다고 간단히 위로해버린다. 그리하여 인간은 단지 그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 아름다워지고 싶다, 쾌활해지고 싶다고 간절히 꿈꾸는 것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값할 만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없다면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p98

 

오로지 연주에만 몰두해온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최대 위기인 슬럼프는 요코만 곁에 있다면 서로의 감정을 통해 알아주고 위로받을 수 있을 텐데 하는 마키노의 사랑의 흔적은 나이라는 연식으로 인해 머뭇거리게 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통해 자제를 할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단 세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통틀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요코의 생각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이미 알았지만 맺어지지 못한 사랑의 원점에 대한 이야기 흐름으로 인해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우연이 필연인 듯, 필연이 우연인듯한 설정을 해가면서 두 사람 간의 만남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드라마나 영화 속, 책 속의 장면들은 많지만 이 두사람 간의 만남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것이 마키노의 사정이 급박하게 변해버린 이유도 있겠지만 필연이 우연처럼 제삼자가 등장함으로써, 그 당시의 상황이 이미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그 후의 결정으로 인한 각자의 삶은 또 다른 의미를 낳는다.

 

결혼이란 제도에서 사랑으로 맺어졌다고는 하나 이미 마음속의 또 다른 사랑을 간직하고 살았던 두 사람의 삶의 지속성은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여전히 만나고 싶다는 해후에 대한 기대치, 그러면서도 결혼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려 노력하는 마키노의 세뇌는 또 다른 아버지로서, 연주자로서, 남편으로서의 책임성을 보인단 점에서 이 책은 한순간에 불타오른 사랑이란 감정을 두고 사랑의 선택을 감행하기보다는 각자가 속한 인생의 길 속에 조그만 사랑의 불씨로 남겨놓은 중년들의 사랑법을 그렸다는 점에서 애틋함을 느끼게 한다.

 

 

– 나는 결코 요코를 잃고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사나에와 결혼한 게 아니다. 그녀라는 한 인간을 분명하게 사랑해서 오늘날까지 생활을 함께해왔다…..  잠시라도 마음을 풀면 금세라도 바뀌어버릴 듯한 그 위태로운 과거를 그렇게 애써 원래 모습대로 붙잡아두는 것이었다.-p456

 

 

책 속에는 일본인의 느낌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다국적인 문제들, 인종, 전쟁, 예술을 다루고 그 다방면에서 마키노의 직업인 클래식의 연주를 듣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게 해 준다.

 

 

 지금 옆에 있는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첫 만남 이후 5년 간의 시간 경과를 두고 다시 만난 두 사람, 예전의 감정은 갖고 있으되 또 다른 감정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해후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마키노와 요코의 선택이 결코 두 사람 만의 문제만은 아님을, 사랑의 지속성은 또 다른 행보를 통해 느낄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책이기도 하고 저자의 예술에 대한 사랑과 폭넓은 지식, 사랑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 커다란 인생의 자리에 사랑이 차지한 비중을 색다르게 접근함으로써 또 다른 사랑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감성을 남겨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만엔 원년의 풋볼

만엔원년

만엔 원년의 풋볼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이름을 알린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이다.

처음 제목을 대했을 때의 상상은 만엔이라 해서 당시의 환율로 생각해도 어떤 가치, 즉 축구공의 가격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일본의 연대를 가리키는 말이란 것을 알고 실소를 금하지 못했는데, 바로 만엔은 에도 막부 말기의 연호이고, 만엔 원년은 1860년을 의미한다고 한다.

 

소설은 무척 두껍게 세 연대의 기록으로 보일 만큼 인간의 일대기를 통해서, 아니 거의 100여 년의 한 가문의 일대기를 통해서 당시 일본인들의 생활상과 시대적인 흐름에 휩쓸려 살아가는 과정 속에 인간의 내면의 고찰을 심층 있게 다룬 것이라고 느껴지게 된다.

 

주인공 마쓰사부로의 고향인 시코쿠의 산골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난 1860년(즉 만엔 원년),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막을 내린 1945년, 그리고 혼돈시대인 1960년의 시대를 그린 대작인 만큼 일본의 역사를 한 가문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마쓰사부로다.

추한 외모와 기형의 아이를 낳은 후 자신의 아이를 다른 곳에 양육을 맡긴 채 그 상실감에 쌓여 알코올 중독자로 살아가는 아내가 있다.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 또한 상실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학생 운동을 하다 미국으로  갔던 동생 다카시의 귀국과 다카시의 의견으로 조상의 고향이자 자신들의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곳은 100년 전 증조부 형제가 연관된 농민 봉기의 역사와 패전 직후 조선인 부락 습격으로 S 형이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 두 형제는 각기 달리 이 사건들에 대해 기억을 하고 동생 다카시는 동네 청년들을 모아 축구팀을 만들어 축구를 가르친다.

 

풋볼팀을 만든 이유는 마을의 경제권을 장악한 조선인 ‘슈퍼마켓 천황’에 대항하기 위한 것. 때문에 이로 인한 다카시의 행동으로 인해 두 형제간의 갈등은 심해지는데 이 책은 이러한 여러 갈래의 길을 통해서 일본 내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본인 내부의 심폐 한 상실감 속에 ‘수치감’을 들어내 보임으로써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불만과 불안의 소용돌이 속에 모든 관심의 초점이 그나마 마을에서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살아가는 조선인에게 향하는 불안성의 조장을 숨 막히는 듯한 광경으로 그려낸다.

 

농민 반란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게 된 후의 비밀들과 그 비밀들이 탄로남과 동시에 일본인들이 당시에 조선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풍요로운 생활 속에 또 다른 삶의 행태를 기대하는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어떤 대상을 지목해 분풀이 식의 행동을 하며, 이 두 형제간에 벌어진 가족사의 슬픔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동생 강간 사건과 형수에게 아이를 임신케 한 행동들을 보면서 독자들은 작가가 그려내는 일말의 인간 구원의 길,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구원의 길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책은 일본의 역사 연대를 알려주는 칭호도 익숙지 않고 일본의 역사에 대한 큰 줄기는 대강 알았어도 이렇게 자세한 부분들까지의  지식은 없었기에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다만 중간부를 넘어가면서 급속도로 진전되어 가는 두 형제의 이야기 속에 다른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고 이러한 글의 구성 흐름이 동생의 잘못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제삼자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주인공의 무기력함과 비양심적인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동생 다카시란 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 인간의 심리 속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악’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읽는 내내 역사를 관통하고 살아가야 했던 인물들의 삶을 쉽게 동화하면서 읽어나가기는 어려웠던 작품인 만큼 일본인 작가가 그려내는 일본인 자신들의 자화상을 솔직하게 그려냈다는 점, 인간의 수치심과 방관적인 태도를 통해 또 다른 제 삶에 대한 희망을 가져보려는 의지를 엿보이는 주인공의 마지막 행동을 솔직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문학적인 면에서 바라보는 생각을 또 달리 받아들여 보게 한 책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