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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 연습

문체연습표지

문체 연습
레몽 크노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20세기 프랑스 문단의 거장, 초현실주의자, 언어학자, 작사가,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자, 수학자, 영화인, 번역가, 소설가, 시인… 이상이 저자에 대한 첫 안내서처럼 여겨지는 문구다.

이 책의 내용을 우선 들여다보기 전에 책 띠지에 있는 저자의 얼굴을 먼저 보자.

한 얼굴이지만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동일인물, 그렇지만 하나하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한다.

익살스럽기도 하고 심각하기도 하고 피곤해 보이기도 하는 등,,, 우리들의 얼굴 표정도 이렇듯 수시로 변화를 주지만 책을 읽으면서 가장 떠올랐던 모습은 저자의 얼굴 표정이었다.

다시 책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내용은 그저 단순한 내용, 그 자체다.
약기略記 
출근 시간, S선 버스, 스물여섯 언저리의 남자 하나, 리본 대신 끈이 둘린 말랑말랑한 모자. 누군가 길게 잡아 늘인 것처럼 아주 긴 목. 사람들 내림. 문제의 남자 옆 사람에게 분노 폭발. 누군가 지날 때마다 자기를 떠민다고 옆 사람을 비난. 못돼먹은 투로 투덜거림. 공석을 보자마자, 거기로 튀어감.

두 시간 후, 생라자르 역 앞, 로마광장에서 나는 그를 다시 만남. 그는 이렇게 말하는 친구와 함께 있음: “자네, 외투에 단추 하나 더 다는 게 좋겠어.” 친구는 그에게 자리(앞섶)와 이유를 알려줌

– p 11

무심코 흘려보낼 수 있는 이문장이 99개의 문체로 변화되어 읽는 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면 과연 문학적인 그 느낌은 무엇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저자가 이 책을 출간한 계기는 바흐의 푸가 연주를 듣게 되면서 썼다고 하는데, 읽으면서 천재는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위의 문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변주의 문학적 형태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소설 속의 한 장면을 서로 다른 입장에서 바라본 글들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 문장을 두고 저자가 쓴 동시에 각기 다른 패턴의 방향과 생각들이 언어란 도구로 어떻게 그릴 수 있는지를 알아가는 재미와 흥미를 느낄 수가 있다.

‘당사자의 시선으로’, ‘다른 이의 시선으로’, ‘객관적 이야기’를 통한 내용들이 그렇고, 글에 맛을 느끼게 하는 묘사들, 일본어의 단가를 차용해 쓴 글, 미쿡 쏴아람 임뉘타, 무지개 빛깔을 드러내는 문장들, 더욱 놀라웠던 장면들은 저자의 수학자적인 면모를 드러낸 부분이 아닌가 싶다.

단카

버스가 오네
재즈 모 청년 타니
어이쿠 충돌
차후 생라자르 앞
이제 단추가 문제

집합론
S선 버스에 앉아 있는 승객을 집합 A로, 서 있는 승객을 집합 D라고 간주한다. 어떤 정류장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집합 P가 있다. 또한 버스에 오르는 승객 집합 C가 있다(……)

이 책에 대한 분류가 프랑스 소설이라고 되어있지만 뒤의 해제 부분을 보면 사실 전통적인 문학에서 본다면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그렇다고 에세이라고 부르기도, 콩트라고 부르기도(낄낄거리며 웃게 되는 문장들 때문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도발이자 언어의 새로운 도전이란 장르가 아닌가 싶다.

기존의 정형화되고 틀에 박힌 언어를 해체하고 부수고 다시 되돌리거나 앞지르거나 하는 실험적인 방식은 문학에 한정된 양식이 아닌 과학과 수학의 범주, 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 뉘앙스를 차용한 글을 통해 이렇게도 색다른 경험을 느낄 수 있는 문학이 존재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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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것에서 탈피하는 과정, 특히 이야기가 문체보다 앞서며, 구어에 대한 문학적인 면에서의 주장은 그가 이 책을 통해 쓴 글들을 통해 더욱 가깝게 느낄 수가 있다.

저자 자신은 이 책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기서 문학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고자 한 것 같은데” 사실 그것은 전혀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도는 순수한 “문체 연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어쩌면 고루하고 여러모로 녹슨 문학에서 문학을 잘라내는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 p 157)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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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는 순수한 말 그대로 문체 연습이었을지는 몰라도 읽는 입장에서의 독자 시선은 새로움 그 자체로써 받아들여지게 한 작품이다.

특히 책의 절반에 해당되는 해제 부분을 통한 저자의 의도와 번역가의 지대한 노력이 얼마큼 큰 노력이 있었는지에 대한 부분들(한국의 사투리 버전, 한국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한 버전…)은 읽으면서 궁금했던 부분이라 쉽게 공감이 갔다.

책 표지 또한 저자의 의도를 잘 드러낸 글자의 배열과 함께 뒤 부분의 ‘번역가와 편집자’의 부분은 저자를 닮은 듯한 센스 폭발을 드러낸 글이라 유쾌하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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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들을 많이 함으로써 독자적인 글쓰기의 발전으로 이뤄질 수 있는 단계가 된다고들 한다.

유명 소설가들을 보면 이러한 필사의 과정들을 많이 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만약 이러한 글쓰기에 도전해 보고 싶은 독자라면 저자처럼 우선 문체 연습부터 시작해 보면 어떻까?
너무도 기발하고 획기적이면서도 틀을 벗어난 글의 향연을 느껴보고 싶다면 바로 이 책을 읽어보라로 추천한다.

“사람은 글을 쓸수록 달필가가 된다.” _레몽 크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