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를 발명한 장영실의 출생과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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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영규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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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의 과학 혁명을 주도한 사람은 단연 장영실이다. 세종의 과학적 열정이 아무리 대단했다해도 장영실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현실화 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장영실의 태생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일설에는 중국에서 귀화한 아버지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동래현에서 관노생할을 하던 중에 제주가 출중하여 천거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관기였을 가능성이 높고, 아버지는 중국과 조선을 넘나들던 중국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장영실은 가끔씩 조선을 찾는 아버지를 통해 중국 문물을 접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관기인 탓에 관노생활을 해야 했을 것이다.

세종은 과학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신분에 상관없이 인재들을 찾고 있던 중이었고 장영실이 인재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장영실이 발탁된뒤 곧장 중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유학중 장영실은 천문기기에 대한 식견을 가지게 되었고 귀국해서 궁중기술자로 본격적인 기술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뛰어난 능력 덕분으로 이미 세종 5년에 노비 신분에서 면전 되었으며 상의원 별좌라는 직책도 부여 받았다.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등을 만들어 내고 스스로 종을 치는 물방울 시계를 만들어 냈으니 그 것이 바로 자격루이다. 활판 인쇄술의 대명사인 갑인자와 인쇄기를 완성 하기도했다.

장영실은 과학 발전에 일생을 바친 조선 시대 최고의 기술 과학자였다. 노년을 아산에서 보내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튼튼한 국방력 없이 국가의 안녕을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종 시대에 국방을 담당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은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노략질을 일소시킨 이종무와 변방의 안정을 정착시킨 김종서였다.

이종무는 세종 전반기, 김종서는 후반기의 국방을 도맡았다. 왜선 39척이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조정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 때 동원된 병선은 227척, 군사는 1만 7천여명이었고 식량은 65일분이 준비 되었다.

이종무 부대는 대마도에 진입하여 129척의 선박을 노획하여 쓸만한 20여척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으며 가호 약2천 호를 소각하고 적군의 114급을 참수 했다. 대마도 정벌 후 대규모의 왜구 는사라졌으며 이를 통해 조선은 평화 시대의 기틀을 마련 할 수 있었다. 수 십년간 계속되던 조선의 근심거리를 제거하고 대일 외교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조선을 위협하는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고 있던 북변의 여진족이 있었다.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끊임없이 한반도 진입을 시도하며 조선 초에도 그들의 내습은 그치지 않았다. 세종은 두만강 주변에 여섯 성을  개척토록하여 북방을 안정시켰는데 이 일을 김종서가 맡았다.

김종서가 10여년간의 노력 끝에 육진 개척을 완수하고 나서야 조선은 비로소 안전 지대가 될 수 있었다. 김종서의 육진 개척은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 짓는 성과를 올렸다. 1452년 단종 원년에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어 63세 일기로 생을 마감 했다.

문종실록

세종의 치세 기간은 자그마치 31년 6개월이었다. 세자향(문종)은 세종 즉위 3년에 왕세자에 책봉 되어 29년 동안 왕세자로 머물러 있었는데 이 기간 중 8년 동안 세종 대신 섭정을 했기 때문에 세종 치세 후반기는 왕자 향(문종)의 치세라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세종이 병상에 누운 것은 세종 18년으로 향의 나이 23세 때였다.

이듬해 세종은 드디어 왕세자에게서 무결재권을 넘겨 줄 것을 결심한다. 말하자면 왕세자의 섭정을 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종 은실질적으로 상왕으로 물러 앉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왕세자의 섭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 이상 건강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위 초부터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한 탓에 병은 날로 악화되었고, 병상에 누워야 하는 일이 잦아져 편전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반복 되어서더 이상 집무를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하지만 세자의 섭정 은신하들의 반대 로실현되지 못했다.

세자의 섭정이 좌절되자 세종은 별수없이 업무량을 줄일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실시한 것이 의정부 서사제였다. 의정부 서사제란 부분적인 내각제를 의미한다. 이는 곧 정도전이 왕도정치의 표본을 내세웠던 재상 정치의 일부였다.

1442년 세자에게 서무결제권을 넘겨 줄 것을 선언한다. 왕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세자로 하여금 정사를 결정하게 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세종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신하들의 반대에 도세자의 섭정 체제를 구축했다. 첨사원의 설치와 함께 세자 향(문종)의 섭정이 시작 되었다. 세자 나이 29세 때였다.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세자의 결재를 받도록 했다.

세종이 죽자 문종은 8년의 섭정을 끝내고 마침내 왕으로 등극 했다.하지만 원래 병약했던 그는 세자 시절의 업무 과중으로 건강이 심하게 악화된상태였다. 즉위 후에 는병세가 더 심해져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했다. 문종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 했을 정도로 천문역수 및 산술에 뛰어났고,서예에도 능했다.

성격은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받는 일도 없었다. 문종은 이렇듯 유연함과 강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했으나 건강악화로 제워 2년 3개월만에 39세 일기로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문종은 어린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어 일찍 혼인했다. 빈궁 김씨와 두번째 봉씨가 있었으나 둘 다 과실이있어 폐위되고 권전의 딸이 세자 빈으로 정해졌는데 그녀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다. 현덕왕후 권씨는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죽었다. 문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1남 2녀를 두었다. 그의 능은 현능으로 경기도 구리시에 있고,현덕왕후도 이곳에 함께 묻혀있다.

p.s:간추린 조선 왕조 실록을 읽으면서 그동안 조각조각 알고 있었던 역사가 이어지는 느낌 입니다. 그렇게 될수 밖에 없었던 배경들이 다 있었습니다. 왕이나 왕후보다 내가 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란 생각도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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