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내가 겪은 6,25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아버지께서  밖에  나갔다 오시드니  “난리가 났다,  피난 가야 한다”  고

어머니 더러  짐을  싸라고  하셨다.

바깥을  내다보니  어디서  오는지  짐을  이고  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계속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철없던  나는  그게 왜 그리 좋아 보이는지  우리도  어서 가자고

부모님을  졸랐다.

어머니는  살림살이들을  차마  못 잊어서  짐을  쌌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고,  아버지와  나는  독촉하고…..  이러면서  시간이  제법

흘러 갔다.

 

우리는  경상북도  영덕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곳 우체국에

근무 하셨기  때문이다.   나보다 일곱살이  더 많은  언니도 그때

우체국에  근무했는데  언니는  피난을  갈수  없다고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만   피난 대열에 끼어  고향인  경주로

향했다.

언니더러는  우체국에서  가라고 하면  언제든지  경주 외가로

찾아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나는  책보만  허리에  차고  나섰다.

그때는  책가방이  없던 시절이라  우리는  검은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차기도 하고  손에 들기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그  책보도  만만치는  않았다.

영덕에서  강구를  지나고   흥해를  지나고  포항을  거쳐   경주까지

오는데  꼬박  1주일이  걸렸다.

 

오는  중간에  친척집이  피난  안가고  있으면  그곳에  들려서  자기도

하고  때로는   누구네  헛간 같은데  들어가서  자기도  했으니

모기에  물리고   더위에 시달리고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경주에 와서도  편하진  않았다.

외가의 도움으로  겨우  자리를  잡고,   언니는   군부대의  교환원으로

가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나도  다시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경주도  피난을  가게 되었다.

우리는  또  짐을  싸서  작은 외숙모의  친정이  있는  불국사  밑의

마을로   피난을  갔다.    한꺼번에  딸네  시댁  식구들이  다  모여

드니   그댁도  방이 모자라서  헛간이며   마굿간이며  아무데서나

지냈다.

 

그러다  경주로  다시 돌아 왔다.

지금도  기억에  선한건   돌아 온  집에는  웬  벌레와  구데기들이

그리도  많던지…..  부모님은   팔을  걷어부치고  쓸고 닦고

며칠을   고생을   하셨다.

그리고  그해  가을,  나는   경주의  계림학교로   들어갔고

언니는   휴전때  까지   일선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전화교환원으로

일했다.    군인은  아니었지만  언니를  만나러 가면  군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피난이라고 해도  고향에  돌아왔으니  고생을  덜했지만

서울이나  타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은  늘 머리에 자루나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식량을  동냥했다.   그들이  갖고  온  수예품이나

옷가지들을  받고  감자나  호박, 때로는  보리쌀  같은걸   주면

고맙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초등학교   3학년의  어린 내  눈에  비친  6,25 전쟁은  배고프고

고달펐다.    학교에는  도시락을  싸 올수  있는  학생이  절반도

되지 않았고  하교길에  운수 좋으면  미군들이 찦차에서 던져주는

건빵이나  캬라멜   이런것들에  환호를  했었다.

 

동네에는  목발을  짚은  상이군인들이  늘어갔다.

온순하고   착하던   친구오빠가  상이군인이  되드니   난폭해

지는것도   봤고,    친구아버지의  전사소식도  들었다.

시장에 가면  미군양말과  낙하산 천이  인기가  있었다.

미군양말을  풀어서  스웨타를  짜고   낙하산  천으로 옷을

해입었다.

그리고  배급주는  우유가루로  떡을  만들어서  먹었는데

그 떡이  식으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던  생각도

난다.

 

점심이라곤   먹어보지도  못하고  누렇게  뜬  얼굴에는

버짐이  핀  아이들이  대부분이 었다.

 

오늘  성당미사 시간에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꿍에도 소원이 통일…..

신부님이 선창을  해서 따라  부르면서   그때

그 시절,  배고프고  서럽던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

 

열살,  초등학교   3학년의  나의 6,25는   이렇게  배고팠던

기억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 하고  있지만   연령에 따라

기억하는것이  다르다  해도   전쟁의 비참함을   느낀건

다  같으리라.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 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뜬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나라  이 겨레

 

 

 

 

 

8 Comments

  1. 참나무.

    2017년 6월 25일 at 10:27 오전

    저는 당시 3살이라 아무기억도 없고
    직접 겪은 어른들께 실감나게 들은 게 전부지만
    이런 개인적인 기록 좋습니다
    전쟁을 겪지않아 무모한 행동하는 젊은세대들이
    이런 사례들 읽고 좀 자제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교회가는 차 안에서 급히 씁니다

    • 데레사

      2017년 6월 25일 at 3:01 오후

      그럼요.
      배고픈것만큼 서러운 일이 또 있을라구요.
      이렇게 편한 세상을 살게 만들어 주신분들께
      감사 해야죠.

  2. 김 수남

    2017년 6월 25일 at 12:57 오후

    네,언니! 정말 6.25를 새로이 맞으면서 언니의 전쟁 때의 그 기억이 저의 일처럼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그 어려운 시절을 잘 견뎌내시고 이겨오신 언니와 그 시대를 슬기롭게 살아오신 모든 어르신 분들께 깊이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자려다가 언니 글을 보고 잠자리에 들면서 지금 저희들이 이렇게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힘든 시절을 잘 살아 와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배고팠던 그 시절을 저희도 그리고 저도 잊지 않겠습니다.
    잠자고 일어나면 저도 토론토서 6.25맞습니다.
    내일 맞는 주일은 더욱 의미가 있는 감사한 주일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조국을 위해 기도하며 자랑스런 내 조국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다시 이런 전쟁의 아픔이 없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어린 시절의 언니의 6,25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데레사

      2017년 6월 25일 at 3:03 오후

      오늘은 특집 프로가 많네요.
      그때 참전하셨던 분들께 감사 드리며
      정부가 마땅한 대접을 해주셨으면
      하고 바래 봅니다.

  3. 초아

    2017년 6월 26일 at 5:50 오전

    전 어린나이라 전쟁의 기억은 없어요.
    그러나, 그 후 전쟁의 참사는 잘 알지요.
    보고 듣고, 자랐기에 껶은 것 못지 않게…
    요즘 철없는 아이들은 북침이라 우긴다니 기가 막힙니다.
    교육을 잘못 시킨 어른들의 탓인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 데레사

      2017년 6월 26일 at 8:34 오전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도 북침이라 우기는 사람이
      있다더군요.
      이러다 이 나라 어디로 흘러갈지 요즘은 더욱 걱정이
      태산입니다.

  4. 산고수장

    2017년 6월 26일 at 6:24 오전

    이제 전쟁이라는 것이 어떤것인지
    알고있는 사람들이 자꾸 줄어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모르고 허둥대는 자들이 늘어나고
    북은 6.25때 먹은마음 버리지 않았는것같고…
    저는 1학년이었어요.

    • 데레사

      2017년 6월 26일 at 8:29 오전

      그러셨군요.
      1학년이었지만 기억은 남아 있을 거에요.
      이제 우리 세대가 가고 나면 6,25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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