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토베, 고려인의 숨결이 머무는 곳
1937년연해주에살던한인들은스탈린의강제이주정책으로중앙아시아로왔다.

첫정착지가카자흐스탄의우스토베.독립운동가홍범도장군도이들중에있었다.

지금의카자흐고려인들의조상이다.

내가살고있는알마티에서자동차로4시간반.천산산맥을따라동북으로계속올라간다.

K선교사.

그는전자침을가지고아픈사람들을치료하며다니는데,그가마침우스토베에간다고해서따라나선것이다.

"이거하나가지고짧은시간에종합검진을하고치료도하는거예요."

그가자랑스럽게말했다.

아무런의학적훈련도안받은선교사가그침으로심장병도관절염도고친다고했다.

선교를위하여하나님은필요할때마다기적을일으키고계시는구나…

대평원을두시간쯤달리니얕으막한산이가로막는다.

산을오르기전,휴게소에서멈추어화장실을쓰고아침을먹었다.새벽5시에떠났으니까배가촐촐할때가

된것이다.

우물처럼생긴화덕벽에반죽을다닥다닥붙여놓았는데,"쌈사"라는빵이다.

한국의찐빵이라고생각하면된다.속에소고기나감자,혹은치즈를넣고,찌는대신굽는것이다.

길다란물긷는통처럼생긴것으로빵을떼어주었다.너무느끼해서빵껍데기만먹었다.

그옆에는송편모양의사탕같은것을잔뜩쌓아놓고팔고있었는데,요구르트에소금을넣어말린것이라고

했다.너무짜서쌀알만큼밖에는먹을수가없었다.

드넓은초원을말을타고며칠씩달리려면이런에너지원이있어야했나보다.

오늘,

한국남자들은내가싸간김밥을먹었다.

산꼭대기에징기스칸이쉬어갔다는바위가있다.거기서부터한시간쯤산꼭대기의분지를달리다

산을내려가면,끄즐오르다라는카자흐의옛수도가나온다.

거기서우스토베까지약30.

기아소렌토는130킬로로미친듯이달렸다.

오전9시쯤도착한고려인목사의집.

카작인유리킴목사는감리교감리사를하다가정년퇴직하고가정교회를하고있었다.

목사부인이한국말을더잘했다.

진찰을받으려는환자들이이미기다리고있었다.

두주일전에치료를받고불면증과신경통이없어졌다는고려인할머니가동네사람들을잔뜩데리고왔다.

쿠르드인불임여성,체첸인할아버지,카프카스인할머니,고려인할머니등

어릴때하바로브스크에서기차를타고이곳으로왔다는80세의할머니.귀엽다.

"생각안나.(처음왔을때)많이죽었데.얼어죽고굶어죽고…"

메이플라워를타고아메리카로온청교도만이어려웠던것은아니다.

우리의동족고려인도원동(극동을여기서는먼동쪽이라는뜻의원동으로부른다)에서이곳으로오면서

많이죽었다고했다.

일본과독일이당시러시아의적이었기때문에이곳으로쫓겨온이들중에는독일인도많다.

그러나카작원주민들은이들이방인들을많이도와주었다고한다.마치아메리칸인디안이청교도를도왔던

것처럼.

시골에갈수록카작말을쓴다고들었는데여기는아니었다.이들은카작말은안쓰고모두러시아말을쓰고

있었다.카작이1991년에소련연방에서독립했으니그때까지이들은소련공화국주민이었기때문이리라.

고려인들은나중에당시의수도였던끄롤오즈다로나가고려사범학교를세우고,극장과신문사도만들어

자리를잡고살아가기시작했다.

점심을먹고우리는동네를거닐었다.햇살은따스했으나바람이심하게불었고거리는한산했다.

한때는고려인이많이살았다고했는데,

교육열이강한고려인2,3세들은지금은대부분도시에나가산다고했다.

가깝게는근처의주도인끄즐오르다와멀리아스타나,알마티등의큰도시로이사가고,

모스크바나우즈베키스탄,기타러시아도시로나간사람도많다고했다.

그래서지금은대부분나이들은사람들이마을을지키고있었다.

이집도,저집도고려인이살던곳이라고일러준다.

지금은카작인들과멀리투르크,우크라이나,카프카스(코카사스)등에서이주한주민들로채워지고있다.

참으로다양한민족이모여사는곳.

고려인만이기막힌역사를지니고있는것이아니라,각종족모두이초원에뿌리를박느라무진장고생한

흔적이얼굴에새겨져있었다.

비록생김새는다르지만,고생의용사들은그들끼리통하는끈끈한무엇이있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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