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이 1981 (12)

어머니의방문

일년뒤,친정어머니가두바이에오셨다.
친정아버지께서외국여행을나가실때도안쫓아가시고,
"나는그돈으로집에서수박이나실컷잘라먹으며지내련다."고하셨던분인데,
딸이산다니까그지글지글끓는중동에오신것이다.

융프라우에서손자를안으신어머니(1982년)

"에어컨이시원하게돌아가한국보다여름나기가더좋구나.그냥너희들얼굴보고딩굴거리기만해도

하나도안심심하고재미있다."

그래도,
어머니를모시고인도양쪽의항구,휴양도시인후자이라에도가고,오아시스마을도보고,주변의모스크와

기도하는아랍사람들,쑥(시장)과시장구석구석들어선금은방들을구경했는데,
"얘,저남자들좀봐라.오마샤리프하고똑닮지않았니?어쩜모두들저렇게잘생겼는지모르겠다.

눈도크고코도크고…"
그때까지우리는아랍사람들을’벙거지’라고불렀었는데(흰벙거지를썼다고),

그후로는영화닥터지바고에나온이집트배우’오마샤리프’로부르기로했다.

내륙에있는오아시스휴양지알라인(1983년)

아이들은강아지새끼들처럼할머니품속으로파고들었다.
묵찌빠,푸른하늘은하수,삿치기삿치기삿뽀뽀,인형오리기등등별별걸다하고놀았다.
무뚝뚝한엄마와는달리할머니는아이들눈높이에맞춰잘놀아주셨다.

"아줌마,나공주머리해주세요."
작은딸은할머니더러종종’아줌마’라고불렀다.
할머니얼굴을잊어버려서그런것이아니라,두바이에는아줌마들만있었기때문에’아줌마’가입버릇이

되었기때문이다.세살반에두바이에온후로할머니들은한번도본적이없었으니…
손녀가’아줌마’라고부르면할머니가오히려몸둘바를몰라하셨다.

오만국경쪽으로가면민둥산들이제법높다.일년에한두번비가올때면이계곡에물이흐른다.

어머니와유럽여행을가기로했다.

우리는막내의기저귀,분유,옷가지,고추장볶은것,김,단무지,생쌀,전기밥솟까지담아큰이민보따리두개를챙겨서유럽여행길에올랐다.유럽의호텔에서저녁밥을해먹고,김밥도싸서다음날점심으로먹고다닐계획이었다.유럽에가면더좋은기저귀와분유가있다는생각은미쳐못했다.
남편은가방담당,나는막내를등에업고,엄마는딸아이둘을챙기셨다.
난민가족처럼하고여행길에나선것이다.

샤르자(사진은위키피디아에서)

두바이바로옆에’샤르자’라는토후국이있다.

(두바이도,아부다비도이런토후국중의하나이다.그래서7개의토후국이합쳐UnitedArabEmirate라는

국가가되었는데,’에미레이트’란바로토후국이라는뜻이다)

샤르자공항에는중국항공이들어왔다.
당시중국은개방이안되었을때였고,한국과도수교가안되었을때였다.
중국에서외국으로나가는항공노선도몇개안될때였다.
북경-샤르자-프랑크푸르트-런던,

남편은그비행기가많이싸다고그걸타자고하는데,나는은근히겁이났다.

만일우리가유럽에서돌아올때,샤르자에서못내리면그무서운빨갱이나라중국으로가버리기때문이다.
어머니께는그런말씀안드리고그냥용감하게탔다.

비행기종은에어버스였다.
승무원들은아주순진하고착했는데,영어가서투른지손님과의사소통이잘안되었다.

그래서인지,

술종류빼고모든음료와스낵을카트에담아화장실가는곳에내놓고아무때나갖다먹게했다.
아이들은신이나서거기에붙어살다시피했는데,

일년전한국서두바이갈때탔던CPA(CathayPacificAirway)에서눈치보던서러움을말끔이씻어버리고

예쁘고친절한중국아가씨들의귀여움을받으며행복하게몇시간비행기를탔다.

히드로국제공항(위키피디아에서)

서유럽을돌고,

어머니는런던에서우리와헤어져미국워싱턴으로가시기로했는데,
난생처음하는해외여행에서혼자영국에서미국으로가시려너무너무떨린다고하셨다.

히드로공항은그때도복잡했다.
그러나당시에도유럽각지에는일본말이다통했는데,어머니는그것하나만믿고비행기를타시기로했다.
마침,
같은비행기로워싱턴으로가는한국젊은이를공항에서만나어머니를단단히부탁하고,

우리는게트윅공항으로향했다.두바이로돌아가는중국항공은거기에서타야했기때문이다.

후에들어보니,
어머니는그젊은이를공항에서놓치고,일본말로물어물어겨우비행기를타셨다고한다.

똑똑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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