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놀러 온 친구
벤조야,알라바마에놀러가도되니?”

그럼,그런데바쁘지않아?”

바쁘지그러나너랑딩굴거리며쉬고싶어.”

1971졸업하고40년이지나만난친구다.

내가사는알라바마를편안하고조용한장소로생각하는것이고마웠다.

나를보러오겠다는것은더욱고마웠다.

알라바마가50여년전에는민권운동으로복잡하고슬픈역사의현장이었지만

지금은그저평온한남부의마을인것은맞는다.

거기서나는한국식으로살고있는할매.

떡만두국을끓이고빈대떡을부쳤다.고사리와취나물도볶았다.

그리고동네친한친구들도불렀다.

동네친구들이묵을쑤어오고과일과케잌을사왔다.

필라델피아에서온친구는처음만나는알라바마친구들과낮가리지않고얘기를했다.

우리그런나이가되긴했지

거기다서로가미국에오래살아오면서공감이되는부분이많아서인지

이야기가많이솔직했다.

엘리스아일랜드(EllisIsland).

100여년,유럽에서오는이민자들이심사를받았던섬이다.

뉴욕과뉴져지사이를흐르는허드슨강에있다.

1892,이곳이민심사대를통과한최초의입국자는15소녀,

1954년,마지막입국자는노르웨이상인이었다.

그리고나서문을닫았다.

당시이민자심사에서는정착금을얼마나가져왔는가하는질문도했다고한다.

그때미국땅에서자립할있는액수는평균$18-$25달러라고보았다하니

20달러가당시로는제법돈이었나보다.

1970년대영국히드로공항의파키스탄이민자

80년이지난,

친구는15가지고홀홀단신미국에왔는데,

오는도중일본에서8불짜리선글래스를샀다고했다.

말을듣자,

알라바마친구들이그녀를경이로운눈초리로보았다.

내가지금까지들은바로는한국에서이민자지참금최소액수는200불인데요…

“100가지고왔다는사람은봤어요!

돈에서어떻게선글래스를있어?”

그녀가

지금은살고있으니까,일을하고있으니까,마음놓고물어볼수있었.

그땐그게너무갖고싶었었어.”

그렇게철부지이고용감했던친구는2013,

엘리스아일랜드(EllisIslandMedalofHonor)’받았다.

이민자최고의영예로운.

클린턴대통령내외도받았고,헨리키신져와예술가들이름도명단에있다.

위의2012년시상식동영상에는부룩실즈의모습도보인다.

엘리스아일랜드에서이민국을통해들어온이민자의후손들이퍼져서

지금은줄잡아1억쯤으로보는데,현재미국인구의삼분지일이다.그러니,

미국을이끌어가는힘은뭐니뭐니해도이민자다.그래서이민정책이중요하다.

친구가알라바마로잠시쉬러오겠다고했을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라,

멀리서친구가찾아오니이또한즐겁지아니한가.!

조카들이찾아와주어도고마운나이인데,친구가오니더욱반가웠다.

우리는부엌브랙퍼스트테이블에앉아젊었던시절을이야기했다.

아직도

그때영이와철수가사귀는사이였어…’하는화제는여전히재미있었다.

기억력이무척나쁜나는,그래?그랬어?하면서도

소설가누구,시인누구우리와무관하지않다는소릴듣자갑자기

머리‘탁’밝아지는느낌이었다.

그녀가일깨워주는어릴적이야기가그동안닫아두었던내감수성을자극했다.

그녀가오는,그녀동네에는눈이많이와서전기가나갔다는데

그녀가떠나는,눈이나리기시작해서비행기걱정을했다.

우리동네도눈경보가내렸다.

남편과나는미끄러워지기전에동네를한바퀴돌자고나갔다.

여전히고요한동네,알라바마

친구와빈대떡부쳐먹기좋은날씨였다.

그러나

필라델피아의오랜격동의역사를몰고왔던친구의흔적은

이미멀어져가고있었다.

(일부사진은구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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