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계곡에서의 하룻밤

장마가끝나자마자더위가기승을부리니시원한피서지생각이난다.

고교시절국어선생님은’인자는산을좋아하고(仁者樂山)지자는물을좋아한다(智者樂水)’고했었다.

취향으로따진다면나는바다[물]를동경하지만,더위를피해서라면아무래도산이좋을것같다.

눈이시리도록울창한삼림사이로차갑고깨끗한물이흐르는계곡이있고,수줍은듯고개를내민야생화와이름모를산새들의노래가끊이질않는곳-.

아무래도바다보다는산이나을것만같다.

지금부터42년전인1970년,갓제대한나는진주에정착하기위해머물고있었다.

그러다가우연히몇이모여동호회를만들었다.나이는물론하는일들이전혀다른사람들끼리의모임이었다.

이모임에서피서가자는제안이나왔고,목적지는지리산내원사계곡이었다.

태양이작열하는7월말이나8월초쯤이었을것이다.

일행10여명은먹을걸한짐씩지고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산청삼장으로가는버스에올랐다.

당시만해도삼장으로가는길이비포장도로여서에어컨없는버스라창문을열고달렸으니먼지깨나마셨을게다.

그렇지만삼장버스종점에내리니공기가더없이맑고깨끗했으며초록으로뒤덮인산들은별세계와도같았다.

한여름의오후2,3시무렵이라머리위의태양은따가왔다.

버스종점에서하룻밤지낼내원사아래민박집까지는거의한시간여를걸어야했고,짐을진채산길을걷기가만만치않았다.모두들기진맥진해서숨을몰아쉬고있는데산길아래계곡엔시원한물이기분좋게흘러내리고있었다.

이를본누군가가"우리이럴게아니라저계곡에잠시내려가서발이라도담그고가는게어떻겠느냐"고제안했다.

가히’불감청고소원’이라,모두들짐을진채벼랑을타고내려가계곡에이르렀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쓴유홍준교수가내원사계곡을가리켜’남한제일의탁족처’라고했던가.

요즘과달리그때만해도피서객들이많질않아자연경관이잘보존된내원사계곡은한마디로절경이요별천지였다.

모두들신발을벗고시원한계곡물에발을담그는데,성질급한한사람이아예옷을벗고팬티차림으로물속에들어갔다.물은제법깊어배꼽까지물이찼다.

이를본일행들은너,나할것없이팬티차림으로물에첨벙뛰어들었다.

아,그시원함이란-.오히려살갗에소름이돋고추위를느낄정도였다.

그쯤했으면좋으련만,일행중누군가가"야,거무거운짐지고고생할거있나.여기서한잔씩하고가지"하며계곡에서한잔할것을부추겼다.

이역시’불감청고소원’이었던가.

무언의동의하에모두들술병을꺼내고안주꺼리를풀어때아니게계곡에서술자리가벌어졌다.

어떤이는물속에들어가목만물밖으로내놓고연거푸술잔을기울이며"카~,좋다,끝내준다"를연발했다.

가지고갔던술의절반가량을계곡에서비운일행은약간은비틀거리는걸음을재촉하여내원사아래민박집에도착했다.향긋한풀내음과맑고시원한공기에취한일행이짐을풀고저녁식사준비를하는데한쪽에서고통스런비명소리가났다.목을물밖으로내놓고연거푸술을비우던이가식은땀을흘리며오한이든다고턱을달달떨었다.

금새얼굴이하얗게변하고입술이파래지며추워죽겠다고하소연을하는것이다.

놀란우리는민박집주인께솜이불을달라고부탁했다.

솜이불을두겹으로덮고방에군불까지지폈는데도추워죽겠다는비명은그치지않았다.

거의자정이되어서야비명은수그러들었다.

요즘이야길도좋고119도있으니그깟소란이야별거아니겠지만,당시첩첩산중에서는어떻게손을써볼도리가없었다.소란으로인해지리산계곡에서의흥취는진작물건너갔지만,한여름인데도추위를느낄정도의상쾌함은지금까지도잊을수없다.

깊은산중이어선지파리,모기한마리구경할수없었다.

다음날,다행히소란을피웠던이도회복되어인근의내원사(內院寺)를구경할수있었다.

신라말기무염국사가창건한이절은처음이름은덕산사(德山寺)였는데,1609년화재로소실되었다고한다.

그로부터350년이지난1959년폐사지에오늘의내원사를창건했다.

경남산청군삼장면대포리에소재한이절에는보물로지정된3층석탑과석조여래좌상이있다.

특히이절은지리산장당골과내원골의합류지점에위치하고있어주위풍광이뛰어나다.

그후로는이절과내원계곡을찾질못했다.

지금도눈에선한건내원사약수물통에띄워져있던노란색참외의그선명했던색깔이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