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주남강 1

내나이가낼모레면70이된다.

아직은기억이생생할때내가살았던그때그모습의진주를그려보고싶다.

하지만그일도만만치가않다.

할이야기가많았는데,막상PC앞에앉으면금새’글문’이막히니말이다.

진양호가건설되기전인5,60년대의남강풍경부터이야기하는게순서일것같다.

지금의남강은나름대로정리가되어자연미는없어졌지만제법깔끔하게보인다.

진주를처음찾거나,진주사람이라도1970년이후에태어난사람은본래부터진주남강이깨끗하게정리된줄로알것이다.그러나아니다.

내가서울로떠났다가언젠가고향을찾았을때달라진남강의모습을보고참으로황당했던기억이난다.

말끔히단장된남강은요즘유행하는성형수술로얼굴을뜯어고친것처럼부자연스럽게받아들여졌었다.

물론도시가발전하자면옛모습만고집할수는없다.

그렇지만뜯어고친남강의모습은한동안어색했던게사실이다.

우선진주남강의옛모습부터그려보자.

5,60년대의남강은봉래초등학교앞의개천(도랑)에서시작된길이옥봉북,남동을거쳐진주교에까지이르는뚝(당시’섬뚝’이라고불렀다)을경계로이루어졌다.

섬뚝밖은시내였고,안쪽은밭이있었다.남강쪽으로인가가있었지만그리많지않았다.

인가는뒤벼리입구까지이어졌는데,기억나는건뒤벼리입구(옥봉청과시장부근)에고구마로전분을만드는갈분(葛粉)공장이있었다.

공장을제외한나머지땅은배추,부추등을재배하는밭이었다.

밭은굉장히넓었다.특히채소를거둬들인겨울엔그밭이우리들의놀이터가되었다.

겨울이면그공터는연날리는장소가되었는데,수십명의사람들이모여’연싸움(연을날려실을끊어먹는놀이)’을벌여북새통을이루기도했다.

이’연싸움’을위해우리는손이부릅트도록’사구’를먹였다.

‘사구’란실에유리가루를입히는것으로,우리는유리를가루로만들고약탕기에아교(혹은민어부레)와찹쌀을넣어끓인후유리가루를실에입히는작업이다.

어릴적겨울은’사구’를먹이는큰작업이몇번이나있었다.

이’사구’먹인실로연싸움을벌였다.

연싸움의고수가자세(혹은얼레)로연줄을풀었다가되감으면연이높이날아오르기도하고급하게내려가기도하면서장관을이루었다.

싸움하던연이실이끊겨날아가면아이들은그연을주우려고달음질하기도했다.

그러다가채소밭곳곳에파놓은오줌통,인분통에빠져곤욕을치르기도했다.

아,지금도눈에선한그모습들-.

진주남강의예전그채소밭이그대로눈에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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