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가 익을 무렵

1960년대초6월중순.

우체국옆빵집은초저녁인데도한산했다.당시고교생들은교복을입지않아도금새표가났다.

남학생은머리를빡빡깎았고여학생은단발이어서어딜가나학생티가났다.

그러다보니학생들이공개적으로만날수있는곳은도너스나찐빵,단팥죽을파는빵집밖에없었다.

"오늘와이리조용하노."홀안을둘려보며소년은맞은편소녀에게눈길을주었다.

"글쎄,너거학교중간시험땜에그렁가?"소녀는컵을들어물을한모금마셨다.

"아인데…시험은보름이상남았다아이가."

잠시후단팥죽과하얀설탕을끼얹은찐빵이왔다.빵을한입물며소년이말했다.

"그래,우짠일로연락했노?생전잘만나주지도않더니…"

"응,그럴일이좀있어서…"소녀는말끝을흐렸다.

"와?무신(무슨)일이있나?""그래,빵부터묵으라.아직도시간은있다."

"무신일인데?궁금해서묵을수가있나.""성질이급하기는…"희미한미소를입가에띤소녀가말했다.

"아무래도…오늘이니하고마지막이될거겄다.""뭐라꼬?그기무신말이고?"

"아부지가전근을가게됐다아이가.고향쪽으로발령이났다."

소녀의얼굴을멀뚱하게바라보던소년은힘없이포크를내려놓았다.소년의얼굴이핼쓱해졌다.

"그라모(그러면)니도전학가겄네."소녀는말없이고개를끄덕였다.

소년이소녀를처음만난건3년전중2학년늦가을이었다.

학교에서문예반활동을했던소년은지방예술제의백일장에나갔고거기서소녀를만났다.

둘다입선은못했지만소년은소녀를만나는행운을건졌다.소년은첫눈에반한소녀에게데이트신청을했지만소녀는냉정했다.

중간에다리를놓아소녀의이름과공무원인아버지를따라1년전전학왔다는걸알아냈다.

음악을좋아했던소년은모차르트의’터키행진곡’과소녀의체취가닮았음을알아냈고소녀를"터키’라고불렀다.

소녀가만남을거절하자가까스로집주소를알아내어편지공세를벌였다.

<친구’터키’에게…..>로시작하는소년의편지는응답없는메아리가되었다.그럴수록소년은전의戰意를가다듬고매주편지를보냄으로뜻을굽히지않았다.

심지어는그해성탄절전야촉석공원계단에서만나자는편지를일방적으로보내고칼바람을맞으며두시간씩이나기다리는열성을보이기도했다.

해가바뀌고봄이되어서야소녀는마음의문을열었다.

빵집을나온두사람은나란히거리를걸었다.초여름이어선지오후8시가넘었지만완전히어둡진않았다.

두사람은말없이중앙로터리를지나남강쪽으로발걸음을옮겼다.날씨탓인지사람들의왕래가드물었다.

다리위로들어서자물비린내를실은바람이얼굴을덮쳤다.강건너대나무숲에는둥지를튼새들의비상飛翔이어지러웠다.강물은유유히흐르고뒤돌아본촉석루의자태도의연했다.

다리를건너자둘은왼쪽으로발길을돌려농고農高가는길목으로들어섰다.대나무숲길이어서향긋한대나무향이격해진마음을조금풀어주었다.

"어이,터키.그라모이애칭도오늘이마지막이라말이가?"아쉬운듯소년이말문을열었다.

"그래.아까빵집에서말안했나.인자(이제)전학가모고향에서학교다닐거라꼬."

한동안침묵이흐른후소녀가말했다."저게강가쪽으로가보자."

둘은강변의풀밭에앉았다.강변에는인적이없어고즈넉했다.

강건너뒤벼리의위용偉容이한눈에들어왔다.아래를지날때마다떨어질까봐조바심을냈던흔들바위도이밤은낯설게보였다.누군가자전거를타고가는지작은불빛하나가강가를스쳐갔다.

소녀는들고있던작은보자기를풀었다.편지봉투며종이들이우루루쏟아져나왔다.

"니가내한테보낸편지들이다."소녀는담담하게말했다.

"내한테보내준니맘을정리해야안되겄나."소녀는바지주머니에서성냥을꺼냈다.

"니가보낸편지니가정리해야지."소녀는성냥을소년에게넘겼다.

"우짜라꼬,내보고태우란말이가."소년의목소리가떨렸다.

"그래."소녀의목소리도떨리는듯했다.

6월의강바람은이내불길을키웠다.하얗던종이들은까맣게타들어갔다.

매캐한냄새가퍼졌다.소년도소녀도아무말없이너울거리는불꽃을보고있었다.

빨갛게타오르는불꽃을보며소년은집마당한켠의앵두나무가떠올랐다.

‘앵도’가익었을긴데….

소년은생뚱맞은생각을지우기라도할듯이고개를흔들었다.

대나무숲에서이름모를새들의울음소리가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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