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꿀밤나무가 생각난다

한풀꺾이긴했지만무더위가계속되는요즘이면그꿀밤나무가생각난다.

산길옆작은낭떠러지에60도정도로비스듬이누워있었던꿀밤나무.

그나무앞에서면언제나키보다두뼘정도는더높은곳에송진이흐르고그옆엔풍뎅이가있었다.

풍뎅이를당시엔뭐라고달리불렀지만벌써60여년전의유년시절이라생각이나질않는다.

풍뎅이를잡기위해꿀밤나무에오를때면정신을바짝차려야만했다.

자칫나무에서떨어져밑으로굴렀다간대형사고가날수도있었으니까….

1950년대중반열살안팍의유년기를보낸곳은옥봉남동이었다.

내가살았던동네뒷켠엔자그마한야산이있었고사람들은’보리당’이라고불렀다.

이야산은비봉산보다조금낮은금산에서이어졌는데그자락엔옥봉성당,연화사,경로당등이있었다.

보리당의산마루엔큰벚나무가몇그루있었고정월대보름엔그곳에다달집을짓고태우기도했다.

<지난6월고향을찾았을때내가20여년간살았던옥봉의골목안집앞에서찍은사진이다.이대문은그때의대문이아니고당시엔나무로빗장을지른목제대문이었다.>

우리집은보리당서편자락의뚝밑개천옆에있어서보리당으로가려면두길을택해야만했다.

한길은골목을나와개천을타고북쪽으로1백미터쯤가다가우회전하여골목길을따라올라가야만했다.

다른길은골목을나와남쪽으로20미터정도가다가골목길을타고한참꼬불꼬불올라가야했다.

이길을따라산으로접어들면우람한느티나무가있었고돌계단을따라올라가면보리암이란암자가있었다.

이암자의주지는친구M의할아버지였다.어릴적사월초파일에놀러가보면그할아버지는열심히불경을외웠고좁은마당엔연등이주렁주렁달려있었던기억이떠오른다.

초등,중,고등학교를같이다녔던친구M은10여년전유명을달리했다.

내가그꿀밤나무를생각하는건각별한이유가있어서다.

간혹어머님께꾸지람을듣거나회초리로종아리를맞았을때울면서집을뛰쳐나와달려간곳이그꿀밤나무밑이었다.그나무아래서면50여미터건너편아래에우리집지붕이보였다.

나는그나무밑에앉아눈물을닦으며서러운생각들을하곤했다.

내가왜맏이여서꾸지람을독차지로들어야만하는지,분명히동생들이잘못했는데도왜내게회초리를드는지참으로억울하기짝이없었다.

여담이지만,1남5녀의독자셨던아버님은내위로두명의형님과한명의누님을돌전후로잃었다.

내가네번째로태어났고,오래살아라고할아버지께서아명兒名을’바구[‘바위’의사투리,岩]’라고불렀다.

그래서내블로그필명이’바위’가되었다.^^

명색이장손이어서귀염을많이받았지만어머님이여동생밑으로줄줄이세명의남동생을낳고보니내희소가치도반감되었다.그래서인지무슨문제만있으면맏이인내게책임을뒤집어씌웠다.

억울하게(?)당한날이면나는그꿀밤나무를찾았다.

요즘같은무더운날,그나무밑에앉으면시원한바람이불어와억울한맘을풀어주었다.

눈앞에펼쳐진시내의풍경도내맘을어루만져주는듯했다.

멀리보이는남강과철교,왼켠의망경산을보고있노라면어느새내맘은스르르풀어졌다.

그러나무엇보다내맘을끈것은꿀밤나무에서송진을핥고있는풍뎅이였다.

조심조심나무를타고올라풍뎅이를잡았을때무엇보다도기분이좋았다.

풍뎅이의다리를떼고(참으로잔인했다)작은머리를거꾸로돌리면검은갑옷밑의날개를한껏펴고바르르떨었다.

얼마나고통스러운날개짓이었을까.

그때는그날개짓이신기하고좋아서얼굴앞에갖다대고선풍기마냥바람을쏘이기도했었다.

요즘은뜸하지만고향을떠난이후에도부모님생전엔자주고향엘갔었다.

그렇지만한번도,단한번도그꿀밤나무가생각나질않았다.

그런데요즘들어그때그보리당의벚나무며꿀밤나무가종종눈에아른거린다.

이것도나이탓인가.늙으면그리움을먹고산다더니…..

다음번귀향땐보리당그꿀밤나무를꼭찾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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