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따뜻했던 사람들

오늘이추분이다.이제본격적으로가을에접어든다.

오늘밤부터태풍의간접영향으로비까지뿌린다니이젠날씨도쌀쌀해지겠지.

가을이되니지난날들이되새겨지고많은사람들의얼굴이눈앞을어지럽힌다.

요즘가톨릭교회는일부친북성향의사제들로인해사람들의가슴에상처를주고있다.

그렇지만7,80년대내가만났던많은사제들은참으로가슴이따뜻했던사람들이었다.

지방신문사에서일했던나는74년별정직공무원이되어3년여세종로에서근무했었다.

당시만해도공무원은보수도약하고적성에도맞지않아주위의권유로훨씬조건이좋았던모협동조합중앙회로옮겼다.처음에는홍보업무에종사하며기관지를만들었고후에는지방연합회의사무국장으로몇년일했었다.그때나는수많은사람들을만났고,가슴벅찬경험들을했다.

나는가톨릭신자가아니다.그렇지만내가일했던직장이가톨릭교회와많은연관이있어성직자들과신자들을만날수있었다.그가운데기억나는몇분들을생각해본다.

80년대초,경남연합회에서근무하며가톨릭마산교구장병화주교님을만났다.

처음주교님을만난곳이산청성심원이었다.그곳은나병환자들과음성환자들이있는곳이었다.

그곳에있는조합의이사장이연락을해와서달려가주교님을뵈었다.인사를마치고점심식사를하는데난생처음음성나환자들과식사를하게되었다.주교님과신부님들은아무렇지않게잘자셨지만나는도저히식사를할수가없었다.밥한숟갈입에넣고삼키는데애를먹었다.

그후마산에가면종종창동에있는교구청에가서주교님을만날수가있었다.

주교님과커피를마시며보니양말도기워서신었고입고있는까만수단도여러군데다른천으로기운것이었다.주교님의검소함에저절로고개가숙여졌다.

당시우리는농촌지역의조직확장을위한사업을추진하고있었는데독일모재단에자금지원을요청했다.

출장나온한국책임자에게지원을부탁했더니좋은방법이있다고했다.그것은교구주교님의추천서를받으면된다는것이었다.주교님을뵙고말씀드렸더니선선히서류에싸인을해주셨다.

덕분에재단으로부터거금을지원받아3년간두사람을채용하게되었다.주교님은교구청내에사무실까지마련해주시며그사업을지원해주셨다.

그때만났던신부님한분이생각난다.진해모성당의주임신부님이셨다.

3공시절농민운동을지도하다가고초를겪었고그후본당신부님으로조용히지내셨다.성당인근에조합이있어가끔신부님을만나러갔다.

사제관에가면신부님은향을피워놓고목탁을두드리곤했다.신부님께사제관에서목탁을치면신자들이아무소리안해요하고물었다.신부님은껄껄웃으며이보시오,가톨릭이나불교나다착한일하고좋은사람되자는건데신부가목탁친다고누가뭐래요하며대수롭지않게대답했다.

한번은그조합의감사를했는데신부님이상당한돈을대출받아갚고있었다.전무에게신부님이뭣땜에이런큰돈을대출받았는지물었다.전무는머뭇거리더니어떤할머니신자의손자가대학에합격했지만등록금이없어포기한다는소식을듣고신부님이대출받아등록금을마련해주었다는것이다.그후매월활동비를받아상환하고있다고했다.

이밖에도가슴이따뜻했던많은사람들을만났었다.

조합에감사를갔더니본당신부님이아껴둔양주를들고와서권하기도했고,서울강남의모성당신부님은소개교육을갔더니강론시간에교육을해달라고했다.아니신부님이강론을안하시고교육을하면신자들이항의할것아니냐고했더니걱정말아요,내강론이나당신교육이나다잘살자고하는말인데똑같은것아니요하며껄껄웃었다.참으로통큰신부님이었다.

만일개신교교회에서그랬다간난리날것이다.ㅎㅎ

내가모셨던K총장이이런말을했다.내가왜가톨릭신자가되었는지알아?

이세상엔아무도내탓이요하는사람들이없잖아.전부남의탓이지.그런데가톨릭미사에가면시작하면서내탓이요,내탓이요,내큰탓이로소이다하며세번가슴을치거든.그게진심이든아니든그래도자기입으로내탓이요하고말하는사람들은가톨릭신자들밖에없단말이야.그래서가톨릭신자가되었지.

아,이가을날.가슴따뜻했던그사람들이생각난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