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사선死線을 넘었다 (2)

1969년봄,군복무중폐결핵에걸렸던나는그해11월6개월여만에의병제대했다.

제대당시상당한보상금도받아병원치료를받으며약도착실하게먹었다.덕분에건강도많이회복되었고,사회생활하는데아무지장이없을정도였다.의사도그만하면완치된것으로봐도된다고했다.

그즈음진로문제로좀고민을하긴했지만큰도시로나가는것보다는고향에서안정적인직장을가지는것으로결론내렸다.해서방송국작가로생활비를벌면서음악감상활동도꾸준히벌여나갔다.

1972년봄,교회목사님의중매로아내를만났고선본지두달만에결혼을했다.

그해가을지방신문사에취직했지만방송국에취직하는것이희망사항이었다.그래서신문기자로재직하면서회사의배려로방송국에서너개의프로를맡아작가까지겸했다.

결혼다음해에아들도낳아고향에서오손도손살아가던차에서울로가게되었다.’10월유신’직후였던당시고향국회의원이장관직에있었고뜻밖에별정직공무원으로낙점된것이었다.

1974년봄,상경하여화곡동변두리에방한칸짜리전셋집을얻고고단한서울생활을시작했다.

근무처는중앙청이었고아침마다통근버스가태워다주었다.다른글에서이미얘기했지만,나는1급관리관(실장)과3급갑서기관(과장)두분을상사로모시고대통령특명사항이었던몇가지사업들을거들었다.

그때정부의지상과제였던중화학공업육성에관련된일들이많았다.

그렇지만내가겪은공무원생활은참으로고단했다.

당시공무원의급여는박봉이어서늘전전긍긍해야만했다.슬라브단칸방에서여름이면비지땀을흘렸고겨울이면외풍으로방안에서외투를껴입아야할지경이었다.

옛어른들말씀에’물을바꿔먹으면탈이난다’더니그해11월감기에걸렸는데약을먹어도쉽게낫질않았다.

해가바뀌어75년초,심하게기침을했는데혈담이나왔다.순간군복무당시의폐결핵이떠올랐다.

아내에게얘기했더니곧장병원으로가자고나섰다.화곡동에서버스를타고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갔다.

엑스레이를찍고몇가지검사를하더니담당R교수가폐결핵중증이라는진단을내렸다.그러면서그날부터매일동네병원에가서스트렙토마이신주사를맞고약을먹으라며처방전을주었다.

75년1월부터눈물겨운투병이시작되었다.

마침동네에소앗과병원이있어얘길했더니매일주사를놓아주었다.물론약도함께먹었다.

사무실에얘길했더니R실장이내일부터몇달간점심먹고오후부터출근하라는호의를베풀어주었다.R실장은그후경기도모지역에서국회의원으로당선되어5공시절여당원내총무를지냈고모부처장관을역임했다.

내겐은인과도같은분이었다.

내가결핵에걸렸다고하니장모님이개소주에다가보신탕을수없이끓여왔었다.아마도결핵은영양이중요하기에고단백음식을해주신것으로생각된다.

추운겨울아침,얼어붙은개소주를그릇에부어데워주었던아내의수고도잊을수가없다.그래서요즘다리를다쳐깁스를한아내의뒷바라지를불평없이잘해나가고있다.ㅎㅎ

투약과영양보충으로두번째의사선死線도무난히넘을수있었다.

그때지나친영양섭취로오늘의비만이온게아닌가하는생각도든다.

한가지잊을수없는기억이있다.아파서두어달교회엘못갔더니목사님이심방을오셨다.목사님은그냥오시지않고사택에서기르던개를끌고왔다.잡아서영양보충하라면서.

그일이아직도잊히질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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