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추억나들이 (4)

친구정식은영호와중,고등학교6년을함께다녔다.

고향은인근산청군이지만중학교때부터진주로나와고교졸업할때까지방을얻어자취를했다.둘은중2학년에올라와서만났고고교시절에는같은문과반이어서더욱가깝게지냈다.고1때는옆자리에나란히앉아두터운우정을나누었다.

정식은학교인근봉래동에서자취를했다.가끔영호가찾아가면정식은고향에서가져온고구마나감같은과일들을내놓곤했다.그의고향은예로부터감이유명했고겨울이면귀한곶감까지가져와서영호를즐겁게만들었다.

방학이되면정식이고향으로놀러가자고권하기도했지만심심산골이란말이걸려따라가지않았다.도회적이며샌님같은영호에게정식은놀리는투로말하고는했다.

영호야,니덕산유독골이란말들어봤제?

그래,들어봤다.그게가우리나라에서젤로깊은산골이란말아이가.

하모,내는몬봤지만호랭이도살았다쿠더라.그게가내고향인기라.함놀러가자.

아이쿠,됐다고마.호랭이한테잡아믹히모우짤라꼬.

에레기자슥아,요새호랭이가오데있노.말이그렇타말이지.

고교졸업후영호는서울로진학했고정식은지역에있는대학에들어갔다.그대학을졸업하고중학교교사로임용된정식은중학교교장을끝으로얼마전정년퇴직했다.아들둘에딸하나를둔정식은모두결혼까지시켰고이젠부부가연금을받으며유유자적한삶을살고있다.

저녁일곱시,옛진주극장앞에서영호는친구를기다렸다.

진주극장은시내중심가에자리하고있어많은추억을남겼던곳이기도했다.영호가어릴때이여서말로만들었지만50년대후반에는고향이낳은대가수남인수선생이진주극장무대에서’내고향진주’나’산유화’같은노래를부르기도했다고한다.

60년대만해도극장앞의중심도로가휑하니뚫여간간히차들이오갔다.그래서사람들은쓸데없이길을넓게뚫어거리만썰렁하게만들었다며투덜댔다는것이다.그렇지만인구40만을넘긴요즘은휑하던도로가차들로넘쳐났고길거리는오가는사람들로북적댔다.

그런데재미있는것은인파의대다수가젊은이들이다.사람들은진주를’교육도시’라고불렀다.이곳이서부경남에위치하고있어인근사천시를비롯한산청,함양,거창,합천,하동,남해,의령,고성군등지에서유학생들이몰려왔다.그곳에서국민학교를졸업한학생들중공부좀한다는애들은진주로나와중학교를다녔다.

요즘은잘모르지만7,80년대까지만해도진주인구의절반은학생이라고할만큼중,고교,대학들이많았다.지금도경상대학교를비롯한진주교육대학,경남과학기술대학교등국립대학교만세곳이나되었다.

인구50만도채안되는중소도시에국립대학교가세곳이나돤다는건이곳이교육도시란걸증명하고도남는일이다.

그래서그런지길거리에나온사람들은거개가젊은사람들이었다.

오래기다렸제.

정식이환한미소로다가와덥석손을잡았다.그옆으로잘아는친구명수와춘길이까지서있다.두사람도고교동창이다.이제환갑을맞다보니머리들이하얗다.

야,명수야,춘길아.오랜만이다.그래,잘있었제?

하모,우리야인자퇴직하고백수가됐싱께삼시세끼밥만축내고잘있다아이가.

몇년전공무원으로있다가퇴직한명수가한마디했다.

이사람아,놀고있어도국가에서따박따박때되모통장에돈넣어준께울매나편하고좋노.

그래,니말마따나편하고좋기는한데날마다마누라얼굴만디다보고있을라쿵께죽을맛이다.그렇타꼬매일같이낚싯대매고남강에고기잡으로갈수도없고지리산까지등산가기도그렇코말이다.

고등학교교사로있다가정년퇴직한춘길이까지거들고나섰다.그러자정식이제동을걸었다.

자,고만하고예약한데로가자.가까운일식집에예약을해놨다.

친구넷은얼마떨어지지않은일식집으로향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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