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逸脫 후의 스산함

운동 다니는 아내가 보채는 통에 투표는 아침 일찍 마쳤다.

요즘 케이블방송에서 보내주는 중국, 일본의 역사 드라마에 푹 빠져 시간을 보낸다. 솔직히 우리나라 드라마는 전혀 보질 않는다. 너무도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극 전개에 흥미를 잃은지 오래 되었다. 여기 비하면 오히려 중, 일 드라마들은 현실적이고 낭만적이다. 극 진행도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다.

뱃살 빼느라 점심도 굶고 도너츠 두 개와 커피 한 잔으로 때웠다. 아들이 베트남 출장 다녀오면서 사다준 봉지커피를 즐겨마신다. ‘카푸치노’와 맛이 비슷하다.

유투브에서 음악을 찾아 들었다. David Lanz의 피아노로 듣는 ‘A Whiter Shade of Pale(창백한 그녀의 얼굴)’이다. 연이어 몇 곡 나오더니 Michele Mclaughlin의 피아노 연주로 ‘The Lonely Ballerina(외로운 무희)’가 흘러나온다.

이런 음악이 흐르면 한 잔이 땡긴다. 전 같으면 석류주라도 한 잔했겠지만 오늘은 참았다. 그러고 보니 한 잔 안 한 지도 일주일째다. 지난 주의 일탈로 인한 스산한 마음 탓이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지난 주의 행보行步는 지금 생각해도 스산하기만 했다.

몇 주 전부터의 약속으로 고교 동창 넷이 지난 주 화요일, 신정사거리역에서 만났다. 점심을 먹자는 약속이었지만 밥은 뒷전이었고, 인근 대구볼탕 집에서 소주를 흠뻑 마셨다. 택시로 동네까지 왔지만 스시 집에서 다시 한 잔 더 걸쳤다.

그 여파로 다음 날 출근도 못 하고 점심 먹으며 다시 해장술을 마셨다. 마침 전 날 만났던 친구 하나로부터 전화가 왔길래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고향 이야기가 나왔다. 그 순간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향수鄕愁가 취중에 폭발했다. 마침, 아내는 운동하러 가고 없었다. 내심 절호의 기회라고 환호하며 부랴부랴 옷을 챙겨입고 택시를 탔다. 물론 아내에겐 간단한 쪽지 한 장만 남기고.

남부터미널에서 진주 행 오후 7시 버스를 탔다. 대전을 지나 통영 가는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비가 뿌렸다.

오후 10시 반쯤 도착했는데 엄청 굵은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선 지 터미널 내 가게들도 문을 닫았고 그렇게 즐비했던 택시 한 대 보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인근 편의점에서 우산을 샀다.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가 오질 않아 10여 분을 걸어 시내 중심가로 갔다.

빗방울은 제법 굵었지만 두어 달 만에 온 고향의 공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비 탓인지 점포들도 거의 문을 닫아 거리는 을시년스러웠다. 고즈넉한 가로등 불빛 속에 잠든 고향. 내 젊은 날의 추억이 묻힌 낯익은 거리들을 하염 없이 걷고 싶었지만 그럴 수 만은 없는 일. 택시를 타고 S동 실비집 골목으로 갔다.

평소 같으면 환했을 골목도 컴컴했고, 불을 밝힌 집들도 드문드문했다. 비 내리는 날 밤에 혼자서 들어서는 늙은 남자를 주인여자들은 별로 달갑게 여기질 않았다. 그런 집들은 호젓히 한 잔하고 싶은 내 취향에도 맞지 않았고. 얼핏 보니 ‘막걸리가 맛있는 집’이란 간판이 보였다. 창 너머로 보니 손님들도 많았다. 몇 번 망설이다가 지나쳤다. 보나마나 왁자지껄한 술집에 노인 혼자 들어서면 다들 외계인처럼 볼 게 뻔해서였다.

곡절 끝에 해산물이 주로 나오는 집을 찾았다. 그것도 문 앞에서 여자 주인장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받아주었다. 자정이 가까와서였는지 손님도 없었다. 주인장 말로는 문을 닫으려는 참이었다고 했다. 술값은 좀 센 편이었다. 안주는 공짜지만 소주 한 병에 얼마씩 계산했다. 해삼, 멍게와 간재미회, 조개 등등 맛깔스런 안주도 좋았지만 그곳 술 ‘좋은데이’는 부드러워서 마시기 수월했다. 손님 혼자만 빤히 보고 있는 주인장과 주방 아줌마까지 불러 매상을 단단히 올려주었다.

다음 날 아침은 중앙시장에서 돼지국밥으로 시작했다. ‘좋은데이’와 함께.

이런저런 사연들을 남기고 서울 행 버스에는 오후 3시에 올랐다. 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내 나이또래 기사에게 1박2일의 일탈을 얘기했다. 그 기사왈, 그 나이에 돈 좀 썼기로 그렇게 건강하게 한 잔 마시고 다니는 걸 복으로 생각하시오. 덧붙여 한마디 더 했다. 이젠 눈치 안 보고 돌아다닐 나이 아닌가요?

그 말은 처연한 내 맘을 위로해주려고 했거니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눈치 안 보고 다닐 나이’란 말이 왠지 솔깃하게 들렸다. 글쎄, 이젠 진짜 늙은 걸까.

일탈 후의 마음은 언제나 스산하기만 하다.

6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4월 13일 at 6:03 오후

    진주경기가 안 좋은 모양입니다.
    어디나 그렇다고 하지만 마음이 짠하네요.

    좋은데이는 소주 이름입니까?

    한번씩의 일탈은 좋지만 너무 자주 그러시지는 마십시요.
    사모님께 잘 보여놔야 더 나이 드셨을때 편하다는것, 잊지 마세요.

    • paul6886

      2016년 4월 14일 at 4:48 오전

      데레사님, 그곳 경기도 안 좋겠지요.
      택시기사 말로는 비도 오고해서 일찍 문을 닫았답니다.
      ‘좋은데이’는 마산 무학소주에서 나온 소주이름이지요.
      참이슬보다 도수가 낮아 마시기 편합니다.ㅎㅎ
      좋은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2. 영지

    2016년 4월 13일 at 6:36 오후

    아무래도 진주에 조그만 거처라도 마련하시는게 ? ㅎㅎㅎ
    그런데 일탈 후의 마음이 왜 스산하셨을까요? 집에 알려 놓으셨는데…
    오히려 기분전환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나의 행복이 또한 가족의 행복이 아닌가요?

    • paul6886

      2016년 4월 14일 at 4:44 오전

      영지님, 고향 다녀오면 삶의 활력소가 되지요.
      그렇지만 아내가 혼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단 말을 듣고 ‘심쿵’했습니다.
      사실은 그곳 언론사의 지인으로부터 좋은 제안이 있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접었습니다.

  3. Lavigne

    2016년 4월 28일 at 2:34 오후

    Wow, your post makes mine look feblee. More power to you!

    • 바위

      2016년 4월 28일 at 5:36 오후

      Thank you!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