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전화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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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소주를 마신 게 탈이었다.

고향에서 밤을 지새운 다음 날 아침, 식사할 요량으로 시장엘 갔다.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시장 안은 고즈넉했다. 환하게 불을 밝힌 식당에서 몇몇 사람이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 달여 전에 왔을 적엔 돼지국밥을 먹었기에 다른 요기거리를 찾았다. 눈에 ‘아구탕’이란 글짜가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홀 안엔 아무도 없었다. 아구탕을 시키고 소주도 한 병 주문했다.

과연 고향의 아구탕 맛은 변하지 않았다. 간밤에 마신 술로 피로해진 속을 풀기에도 좋았다. 게다가 반찬으로 나온 ‘속대기무침’을 대하니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김처럼 생긴 속대기는 간장과 참기름으로 간을 하고 쪽파를 숭숭 썰어넣었다. 여기에 참깨를 슬쩍 뿌리면 그야말로 밥도둑이었다. 오랜만에 맛본 속대기무침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보는 듯했다.

청승맞게 혼자서 술을 마시려니 남새스러워 고교동창 C에게 전화를 넣었다. 친구는 병원 예약으로 시간이 안 된다며 시장 인근에서 빌딩을 관리하고 있는 친구 S를 만나보라고 했다. 내 전화를 들었는지 옆 테이블의 손님이 다가오더니 제가 한 잔 올릴게요하고 술을 딸아주었다.

결국 옆 테이블의 두 손님과 함께 소주 세 병을 들고 일어났다. 시장을 나와 오 분여를 걸었더니 친구 S가 있는 빌딩이 나타났다. 친구는 말년에 5층짜리 빌딩 하나를 장만해서 관리하며 소일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한 동네에 살았고 중,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보니 마음 편한 죽마고우다. 친구는 나를 보더니 한 마디했다. 자슥, 아침부터 한 잔했나? 그래, 임마. 고향와서 한 잔 안 하모 우짤끼고. 친구가 권하는 소파에 앉았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보래, A가 권사가 되가꼬 산다 아이가. 한 번 만내볼래? A가 권사가 됐다꼬?

A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 동네 살았던 세 살 아래의 여자애였다. 둥근 얼굴에 새카맣고 큰 눈을 가져 무척 귀염성 있었던 소녀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나를 오빠처럼 따랐고, 특히 친구 A가 나만 보면 너 낭중에(후에) A한테 장가가라고 농반 진반으로 말하곤 했었다. 그녀도 내게 호의를 가졌지만, 내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난 탓에 둘 사이는 그렇게 정리되고 말았다.

새삼시럽거로 뭐 할라꼬 전화하라 말이고.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친구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교회에 물어보모 전화번호를 안 갤카주겄나. 그러고는 114를 통해 교회에다가 전화를 넣었다. 전화를 받은 사무원은 전화번호를 가르쳐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고는 전화번호와 성함을 가르쳐주면 전해주겠다고 했다.

친구와 인근 식당에서 점심으로 비빔밥을 다 비웠을 때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친구도 미안한 지 괜한 말을 꺼집어냈다며 미안해했다. 전 날의 과음으로 심신도 고단해서 정오에 떠나는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에 타고부터 서울 도착할 때까지 내내 골아떨어졌다. 중간 휴게소에도 내리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하고 지하철을 타면서 집에 전화하기 위해 휴대폰을 열었다. 창에 낯선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아마 잠든 사이에 그녀가 전화를 했겠지.

그렇지만 그대로 덮어두었다. 그게 편할 것 같아서 였다. 소심한 늙은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4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5월 12일 at 12:17 오후

    잘 하셨어요.
    안나봤자 그때의 그모습은 간데 없을테고
    서로 실망만 할거에요.

    그런데 진주 나들이가 잦네요.

    • 바위

      2016년 5월 12일 at 3:24 오후

      제가 생각해도 안 만난 게 잘한 것 같습니다.ㅎㅎ
      고향나들이는 예고없이 이루어졌지요.
      한 달여 만의 방문이었습니다.

  2. 김수남

    2016년 5월 27일 at 8:27 오전

    네,진주가 고향이시군요.사투리가 저의 고향 안동 말과 같아서 너무 반가웠습니다.진주 남강의 물빛이 그려집니다.그 권사님은 어릴적 따르던 고향 오빠 소식에 너무 반가웠을거에요.남긴 번호로 전화 하실 수 있는 것을 보면 궁금하던 오빠 가정을 위해 진심으로 축복하며 기도해 주실 좋은 분이십니다.고향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 바위

      2016년 5월 27일 at 10:00 오후

      안동이 고향이시군요.
      20대 초반 군대생활을 안동에서 했었지요.
      눈이 많이도 왔던 기억이 납니다.ㅎㅎ
      안동 말씨는 끝에 “왔니껴”. “갔니껴” 식으로 ‘~니껴’를 붙이더라구요.
      인정 많은 도시였습니다.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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