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이야기-1

내가 가진 책들이라고 해봐야 이젠 얼마 되지 않는다. 젊은 시절엔 꽤 많은 책들을 가졌고, 게다가 엘피 음반까지 수백 장에 이르러 이사 다닐 때면 아내로부터 구박께나 받았다. 하지만, 요즘은 단출하다. 책도 내가 챙기는 음악관련 서적이거나 몇몇 작가들의 전집이 있을 뿐이다. 엘피 음반도 처분한 지 오래 되었고, 씨디만 있다.

음악 서적들은 대개가 60년대에 간행된 것들이다. 그때만 해도 돈만 생기면 고전음악 책자들을 겁도 없이 사모았다. 꽤 많은 분량이었지만 수 차례의 이사로 내다버렸거나 아니면 분실했다. 지금 갖고 있는 책들은 50여 년이 넘다 보니 더러는 노랗게 변색 되었고 조금씩 닳아가고 있는 책들도 있다. 간혹 책을 뒤지다 보면 그나마 모조지로 만든 책들은 괜찮지만 거친 갱지로 만든 책들은 변색 되어 글씨를 알아보기 힘든 것들도 있다. 오늘도 그 빛바랜 책들을 뒤적이다가 문득 삼십 년도 훌쩍 넘긴 어떤 사연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때가 80년대 초반이었고 벌써 35년쯤 흘렀다. 시절이 요맘 때였으니 이른 여름이라고 해야겠다. 당시 경남 지역 모 협동조합연합회에서 근무했는데, 사흘 일정으로 거제도 장목에 출장을 갔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끝나 사흘 째 되던 날 아침 돌아갈 채비를 했다. 고현 가는 버스를 탔는데 차부까지 배웅나온 조합 상무가 한마디 던졌다. 혹시 죽순 좋아하시모 가는 길  하청에서 많이 나오거든예. 거게 한 번 들리모 괜찮을 낍니더.

장목에서 하청은 버스로 30여 분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쪽빛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출장 끝날이라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급한 일도 없어 하청에서 내리기로 했다. 차표는 고현까지 끊었지만 그깟 몇 푼보단 싱싱한 죽순이 눈에 아롱거렸다. 어린 시절, 유독 죽순을 좋아했던 아버님 덕분에 일찍부터 죽순맛을 보았다. 5월 중순께면 시장엔 죽순이 지천으로 나왔고 어머님은 그걸 사다가 통째 가마솥에 삶았다. 충분히 삶은 죽순을 찬물에 넣어 식히고는 껍질을 벗겼다. 그 밑에서 나타나는 여린 황색의 죽순은 기름이라도 바른듯 짜르르 윤이 흘렀다. 그걸 결따라 찢어 고추장과 된장을 섞은 막장에 찍어 먹는 맛은 별미였다. 어른들은 막걸리를 곁들였지만 그냥 먹어도 사글사글 씹히는 갓 삶은 죽순의 맛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맛과 멋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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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에서 내려 바닷가 쪽으로 걸었다. 차부 인근에도 죽순요리를 해주는 식당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푸른 바다가 보이는 곳이 좋을 것 같아서 였다. 마침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얕으막한 언덕에 선술집 서너 곳이 보였다. 제 철이어선 지 가게마다 ‘죽순요리 있음’이란 종이딱지가 출입문에 붙어 있었다. 그 중 후덕한 인상의 50대 아줌마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아침나절이어서 서너 개 되는 탁자도 채 정리가 되지 않았고 음식 준비하느라 주인 아줌마도 정신 없어 보였다. 아줌마, 장사합니꺼? 하고 들어서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아줌마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무데나 편한 데로 앉으이소. 가방을 옆자리에 놓고 앉으며 물었다. 아직 아침인데 죽순요리가  됩니꺼? 아줌마의 대답은 순순히 나왔다. 되고 말고예. 우찌 잡술라 쿱니꺼? 죽신(죽순) 삶아 그냥 막장이나 초장에 찍어묵는 것도 되고예, 반지락 여서(넣어) 무치묵는 것도 됩니더.

죽순바지락무침을 시켜놓고 막걸리를 한 잔 들이켰다. 눈 앞에 바다가 있어서인지 죽순맛이 기가 막혔다. 연거푸 석 잔을 사발로 들이키고서야 파란 초여름의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때 그 여인이 나타났다. (계속)

5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5월 16일 at 6:29 오후

    침넘어 갑니데이.
    하청 장목 고현… 다 그리운 동네입니다.
    거제, 젊은날 인연 닿았던 곳입니다.

    • 바위

      2016년 5월 16일 at 6:55 오후

      죽순 생각하니 침 넘어가시지요.ㅎㅎ
      제목이 시원찮아 좀 자극적인 걸로 바꿨습니다.^^
      저도 거제도 동쪽이 자주 생각납니다.

  2. 바위

    2016년 5월 16일 at 7:27 오후

    제목을 바꿨다가 다시 원위치했습니다.ㅎㅎ
    너무 속 보이는 것 같아서지요.
    그냥 담담히 써겠습니다.

  3. 막일꾼

    2016년 5월 16일 at 7:38 오후

    속편이 궁금해지네요.
    거제는 동부면과 남부면쪽이 고현 쪽 보다 훨씬 정감이 가는 곳이지요.

    • 바위

      2016년 5월 17일 at 3:06 오후

      시작은 했지만 어렵습니다.ㅎㅎ
      거제는 동, 남부 쪽이 아름답고 정감이 가지요.
      몇 년 전 가거대교로 가봤는데,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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