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이야기-2

주인 아줌마가 만들어준 바지락죽순무침을 한 젓갈 입에 넣는데 누군가 내 앞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쳐드니 눈 앞에 어떤 여자가 서있었다. 금방 목욕이라도 한듯 물끼가 축축한 머릿결에 수수한 옷차림이었지만 그런대로 단정하게 보였다. 얼핏 보았지만 나이는 50대 중반을 넘긴 아줌마였다. 예고 없는 출현에 잠시 당황하고 있는 내 귓전에 주인 아줌마의 날카로운 음성이 날아왔다.

보레, 찬식이 애미야, 우리집 마수걸이 손님인데 니가 거게 서있어모 우짜노. 내가 커피값 줄긴께네 요 밑에 다방 가서 한 잔 묵어모 안 되겄나. 그러면서 물묻은 손을 닦으며 낯선 여인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그 여인이 큰소릴 쳤다. 치아라, 고마. 내가 커피 묵고주바 왔나. 커피는 내도 집에서 한 잔 타묵고 왔다. 그러면서 여인은 내가 앉은 건너편 자리에 스스럼 없이 앉았다. 여인은 내게 오래 전부터 알았던 사람인 것처럼 살짝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보이소, 손님. 본께 조카뻘 겉은데 한 잔 얻어묵어도 괜찮지예. 그러고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소릴질렀다. 여게 잔 한 개 퍼뜩 갖고온나. 여인의 고함소리를 듣고 주인 아줌마가  날 쳐다봤다. 어쩔 거냐는 눈짓이었다.

그렇잖아도 혼자서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었다. 아줌마, 요게 잔 한 개 갖다주이소. 가져온 잔에 여인은 스스럼없이 혼자서 잔을 채우곤 거침없이 마셨다. 손으로 입가를 닦은 여인은 죽순 한 점을 먹었다. 그러고는 주인 아줌마에게 타박을 했다. 와 이리 죽신이 떱노. 덜 쌀만 거 아이가. 좀 더 푹 쌀마라. 그러자 주인 아줌마가 득달 같이 왔다. 손님 봐서 참았는데 이기 밸 소릴 다하네. 좋기 말할 때 고마 가라. 사람 좀 살자. 이기 하루 이틀이가. 주인 아줌마가 끌어내는 시늉을 했지만 여인은 태평이었다. 그러곤 한마디했다. 엊저녁 꿈자리가 좋더만 이리 얌전한 사람을 만났네. 니는 가마이 있어라. 오늘 이 손님하고 이야기 좀 할란다. 여인은 내게 막걸리 잔을 채워주었다. 손님, 오늘 내하고 이야기 좀 하입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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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만히 있었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흥미도 있었다. 주인 아줌마는 내 눈치를 보더니 모른체 주방으로 갔다. 가면서 내게 눈짓을 했다. 조심하란 뜻이리라. 주인이 자리를 떠자 여인은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보이소, 내가 본께 안죽도 나이가 마흔도 안 된 거 겉은데 내 말이 맞제.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예, 인자 서른 여섯 됐십니더. 그러자 여인이 반색을 했다. 아이구, 그라모 내 조캐(조카)뻘이네. 여인은 잔을 비우더니 호기롭게 소리쳤다. 봐라, 여게 막걸리 한 개 더 갖고온나.

잔을 비우고 죽순 한 점을 깨물며 여인이 말을 걸었다. 손님이 우리 동네 사람은 아이고 우찌 왔노? 여인은 아예 말을 놓았다. 예, 저 옆에 장목 출장 왔다가 잠시 들맀십니더. 아, 그랑께 요게 촌놈들 메이로(처럼) 안 생깄구나. 그래, 사는 데는 오덴데? 일부러 거짓말 할 필요가 없어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J시에 집이 있십니더. 그러자 여인이 깜짝 놀랐다. J시라꼬. 우짜모 좋노. 나도 거게 살았는데. 여인은 직접 술을 부어마셨다.

한 잔 비운 여인이 잔을 내 앞으로 놓았다. 술을 딸으며 한마디했다. 본께 공부도 좀 한 거 겉고 해서 내 이야기 좀 들어줄 사람을 만낸 거 겉에서 엄청시리 기분이 좋네. 그랑께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오늘 내하고 이야기 좀 하모 안 되겄나. 나도 궁금증이 생겨 물었다. 무신 이야긴데예? 그래, 들어보모 알끼다. 내 한 맺힌 이야길 할라캐도 이 동네는 들어줄 사람이 없는기라. 불알찬 뱃놈들은 내 이야기보담도 손목이나 잡을라쿠고 걔중에 같잖은 놈들은 이야기보다 내 아랫도리를 쳐다보는 작자들이 더 많더라꼬. 그래서 내 가심(가슴)에 맺힌 이야기를 하도 몬 하고 살았다 아이가.

그래서 여인의 뜬금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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