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이야기-3

보래, 조카야. 그 여인은 이제 대놓고 나를 조카라고 불렀다. 예, 말씀하이소. 조카 소리가 싫지 않아 나도 살갑게 대답했다. 그 여인은 막걸리 한 사발을 물 들이키듯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니 혹시 ‘솔베지의 노래’ 아나? 알지예. 그리그가 작곡한 모음곡 ‘페르귄트’ 중에 나오는 마지막 곡 아입니꺼. 앗따, 대기(매우) 유식하네. 오늘 내가 사람을 잘 만난기라. 첫 눈에 본께 말이 통하겄더라꼬. 하모, 그 곡을 노래로 부른 거 말이다. 그 겨울이 가고 봄이 지나고, 또 여름이 가고 한 해가 지나고, 또 해가 지나가고 당신은 제게 돌아오겠지요. 이 가사가 참말로 맘에 들었는기라. 그 여자는 먼 바다를 쳐다보며 잠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자 주인 아줌마가 금새 달려왔다. 아이, 아침부텀 이기 무신 노래고? 재수없거로. 고마 치아라. 그 여인은 버럭 소릴질렀다. 무식한 예펜네가 시방 무신 소리하노. 니가 이 노래가 우떤 노랜지 알기나 하나? 가마이 있는 사람 자꾸 와서 찝잭이지 말고 니는 장사나 하란 말이다. 마뜩찮은 얼굴로 주인 아줌마가 주방으로 가자 여인은 혀를 끌끌찼다. 그러고는 잠시 허공을 쳐다보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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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조카가 살고 있는 J시에서 가까운 남해라네. 그 섬의 한 어촌에서 무남독녀로 자랐지. 아부지는 고깃배를 세 척이나 갖고 있었던 선주船主였다네. 거게다가 할아부지 한테서 물리받은 전답도 있고 해서 군郡 내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였지. 그런 집안에서 무남독녀였신께 내가 울매나 호강시럽게 컸겄노. 생각 좀 해봐라. 내 어릿을 때 기억에 할무이는 손자가 없다꼬 아부지 한테 대를 이을라모 첩이라도 들이라꼬 닥달을 했제. 그란데 아부지는 그랄 수 없다쿰서 끝까지 조강지처인 우리 어무이를 감싸더라꼬. 맹색이 왜정 시대 땐데 그때는 아들 볼라꼬 작은 마누라를 얻어도 숭(흉) 안 됐던 세상 아이가. 지금 생각해도 울 아부지가 참말로 가정적이고 좋은 아부지였던기라.

참, 훌륭하신 아부지를 두셨네예.

하모, 그뿐 아이라 여자도 배와야 된다쿰서 면面에서 국민학교를 마치자 낼로 J시에 있는 중학교로 유학을 보낸기라. 생각해봐라. 40년대 당시에 섬에서 대처에 있는 중학교까지 자식을 유학보낸다는 게 울매나 애럽은 일이었겠노. 그것도 기집애를 말이다. 그때 아매 내 나이가 열네 살인가 그랬지. 마침 J시에 작은 아부지가 살고 있어서 밸 애러움 없이 학교에 댕긴기라. 지금 생각해도 우리 아부지가 고마왔지.

그 말 끝에 그 여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 가슴이 복받쳐 오르는지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순간 꼭 감은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왠지 나도 숙연해져서 아뭇소리 없이 막걸리를 한 잔 딸아마셨다. 먼 바다에서 갈매기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아이고, 내가 와이리 샀노. 참, 밸시럽네. 여인은 소매끝으로 눈가를 쓱 훔치더니 빙긋 웃었다.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로 할라쿵께 가심(가슴)이 좀 메이네. 아부지 생각한께 눈물도 나고 말이다. 자, 조카야. 맘도 그렇고 한께 술이나 한 잔 딸아봐라. 나는 막걸리를 다시 주문하고 죽순무침을 집어주었다. 그 여인의 눈물을 봐서일까. 홍조를 띤 얼굴을 보자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그 시절에 중학교까지, 그것도 여자를 공부시킸다 쿠는 거는 대단한 일이라예. 아주무이도 복을 타고 났심니더. 짐짓 명랑한 내 말투에 여인은 픽 웃었다. 뭐라꼬, 복이라캤나. 하모, 복은 복이제. 그래도 그 복을 끝까지 몬 지킸신께 내 복을 내 발로 찬 기라. 아니, 복을 차다니예? 함 들어보모 내가 와 내 복을 내 발로 찼는지 알 거 아이가.

그 여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계속)

2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5월 23일 at 1:20 오전

    재미있는 아주머니네요.
    낯선 사람앞에서 술술 자기가 살아온 얘기를 꺼낸다는건
    쉽지않은 일인데….

    암튼 다음편 기대할께요.

    • 바위

      2016년 5월 24일 at 10:31 오전

      진도가 잘 안 나가는 작업이지만,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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