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고향생각을 접으련다

내게 있어 고향은 참으로 껌딱지처럼, 아니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곳이었다. 내가 1974년에 상경했으니 고향에 산 지는 불과 28년이었다. 하지만 고향과 나는 끈질기게 씨름을 벌였다. 휘영청 달 밝은 가을 밤이나, 시원하게 쏟아붓는 여름철 장대비만 봐도 내 가슴엔 고향생각이 스멀스멀 묻어나왔다. 해서 그 향수를 달래려고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도 수없이 들었고, 때로는 취기에 혼자 울다가 아내에게 ‘못난 사람’이란 타박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내 가슴의 향수, 고향생각을 비웠다. 물론 일주일간 꿍꿍 앓고 나서였다. 나 혼자서.

이 일의 발단은 쉽게 이루어졌다. 지난주 목요일, 구기동 이북5도청 앞 음식점에서 사단이 일어났다. 그날 요즘 만드는 책 관계로 담당자를 만나 대낮부터 술잔을 기울였다. 6.25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12월 23일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타고 탈북한 1만4천 명의 피란민을 기리면서. 그날 둘은 소주에 흠뻑 취해 북한 ‘김가3대’를 규탄했다가 어떤 사람을 포함한 종북 좌파들을 안주삼았다.

그러다가 집에 와서 ‘병’이 도졌다. 저 사람들은 가고 싶어도 못가는데, 그래도 나는 갈 수 있는 고향이 있지 않느냐. 갑자기 밀려든 고향생각에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결국 오후 7시 사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말았다. 그날 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고향을 찾았지만 늘 그랬듯이 결국은 실망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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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그 밤 고향에서의 1박을 취소하고 심야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고향에서 바이바이를 하듯 터미널 앞 괜찮은 우동집에서 혼자만의 결별식을 가졌다. 물론 고향과. 다시는 이런 행태로 고향을 찾지 않겠노라고 다짐히면서. 우동은 참으로 맛이 좋았다. 고향과의 이별주도.

이젠 고향에 대한 정서를 몽땅 비웠다. 고향에서 28년, 서울에서 43년의 살이였는데도 서울에서의 삶보다도 고향에서의 ‘어슬픈’ 추억에 목을 매달았던 내 자신을 꾸짖어면서 말이다.

이젠 고향생각을 접으련다. 답답하면 매주 화요일 만나는 고교 동창들과 산행을 하며 풀어야겠다.

그래, 고향이여 안녕.

2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10월 7일 at 3:17 오전

    오랜만입니다.
    그 먼 진주라 천리길을 비행기로 갔다
    고속버스로 도로 돌아 오셨군요.
    고향이란 우리에게 늘 그리움 그 자체죠.
    마응만 먹으면 갈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것에
    위안을 삼아야죠.

    • 바위

      2016년 10월 21일 at 12:56 오후

      데레사님,
      오랫동안 블로그에 들어오지 않았다가 뒤늦게 주신 글 읽엇습니다.
      앞으론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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