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김시습의영혼이깃들어있는수락산
오늘(3/15)은조금늦은시간에전철7호선수락산역에서내려바로우측아파트앞을지나수락산기슭에서산길을걷기시작하였다.날씨는봄을재촉하는포근한봄기운이밀려왔다.멀리수락산연봉을바라보면서바로앞쪽에우뚝서있는귀임봉을올려다보면서오르막길을걷고또걸었다.오르막길을열심히오르니몸에서땀이흐른다.땀이흘러야산행하는기분을느낄수있다.땀은그만큼운동량이증가하였다는신호이므로기분을좋게만들어준다.많은사람들이산을오르고,벌써12시가다되어가는시간이어서그런지하산하는분들도많았다.거의1시간동안걸어서수락산상계능선에올라설수있었다.귀임봉과도솔봉중간지점쯤의능선삼거리이다.
상계능선길은수락산산행길중에서도가장걷기편한길이다.오랫만에이길을걸었드니도솔봉우회로의암벽길에튼튼한계단길이설치되어있어서산행하기가무척쉬워졌음을반가워하면서걸었다.우회길을지나치마바위로올라가서하강바위우회길로들어서서하강바위아래이르니하강바위위에서바위타기하는사람들이로프를타고내려오고있었다.코끼리바위앞을지나언덕위에올라가수락산의전경을앞뒤로관망해보고종바위아래암벽길에도예쁜계단길이넓직하게설치되어오르고내려가는데불편함이없었다.그리고철모바위를오르는길은돌아가지않고바로오르는암벽을타고올라갔다.수락산철모바위는그모습이친근감을느끼게해준다.
철모바위봉에서수락산정상정상을가면장암역으로하산하든가.내원암으로해서마당바위쪽으로하산을하는것이불편하여정상에는가지않고정상봉사진만한장찍고는암벽능선으로하산을하였다.이능선에서바라보는수락산의아름다움도만끽할수있는코스이다.수락산배낭바위의모습은참으로일품이다.철모바위와하강바위가수락산의암벽미의수려함을자랑하는바위들이다.내려오면서건너다보이는매월당정자봉은그아름답기가봄에피는꽃처럼예쁘기만하다.매월당과수락산의역사가전설처럼엮겨있어수락산산행의의미를더감명깊게해준다.매월당팔각정이산정상에세워져있다는것은김시습의영혼이수락산에깃들어있다는증거이기도하다.
O김시습은어릴때부터천재였다.
매월당(梅月堂)김시습은아홉번이나과거시험에장원을차지했을정도로천재(天才)였다고한다.시습(時習)은세상에나온지불과8개월만에스스로글을알았다.최치운(崔致雲)이이를보고서기이하게여겨이름을‘시습(時習)’이라고지어주었다.시습은말은더디었으나정신은놀라워서글을보면입으로읽지는못했지만뜻은모두알았다.”’시습(時習)’은유학의최고경전인『논어(論語)』의첫구절인‘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취한이름이다.김시습의타고난자질을보고유학을크게빛낼대학자가될것임을예견하고붙여준이름이다.김시습은세살때시를짓고,다섯살때『대학(大學)』과『중용(中庸)』을통달하는등보통의사람으로서는이해하기힘든천재적자질과행적을숱하게보여주었다.이때문에사람들이신동(神童)이라고극찬했다.당시이름높은명사(名士)들이앞다투어이어린천재를보기위해찾아왔고,급기야세종대왕(世宗大王)의귀에까지김시습의명성이전해졌다.
학문잘하는사람을누구보다아끼고귀하게여겼던세종대왕은김시습을승정원으로불러시(詩)로시험해보았다.그런데김시습의시는빨리지으면서도아름다웠다.김시습의재주에탄복한세종대왕은크게칭찬하면서훗날나라의큰재목으로크게쓰겠다는말까지했다.그리고김시습에게비단을하사하고집으로돌려보냈다.“내가친히보고싶지만세상의풍속과이목을놀라게할까염려된다.마땅히그집안에권하여재능을감추어드러내지말고잘가르치고기르게하라.그의학업이성취되기를기다렸다가장차크게쓸것이다.”[『율곡전서』김시습전(金時習傳)]
세종대왕의진심어린충고에도대궐을다녀온이후김시습의명성(名聲)은이미온나라에퍼져‘오세(五歲)’라는별명이생겨날정도였다.김시습의이름은몰라도‘오세(五歲)’하면누구나“아!그천재아이”하고알아들었다.어쨌든임금의칭찬과훗날에대한약속까지들은김시습은나라와백성을위해자신의재주를펼칠원대한뜻을품고학업에힘썼다고한다.
김시습이스물한살때발생한한‘사건’이천재의운명을‘광인(狂人)의삶’으로바꾸어버렸다.그사건이란다름아닌수양대군이어린조카단종을몰아내고옥좌에오른‘왕위찬탈사건’이었다.당시삼각산(三角山:북한산)에서글을읽다가이소식을들은김시습은즉시방문을닫아걸고사흘동안바깥으로나오지않았다고한다.그리고크게울부짖고통곡한다음읽고쓰던서책들을모조리불살라버리고광기(狂氣)를일으켜뒷간에빠졌다가도망나와곧바로방랑길에올랐다.천재김시습의운명을‘광인(狂人)의삶’으로바꾸어버린‘왕위찬탈사건’의주인공인세조의어진.권력을빼앗기위해자신의친조카까지죽인것도모자라나라의동량과인재들이모인집현전의학자들까지몰살한수양대군(세조)과그수하들의패악(悖惡)에분개하고불의(不義)한권력에침묵하는세상에분노한김시습은스스로사람들과어울려살수없다는사실을깨닫고마침내육신(肉身)에구애받지않고평생세속밖을떠돌아다녔는데,우리나라산천(山川)치고그의발자취가닿지않은곳이없을정도였다.가슴가득쌓인울분을풀어내기위해글로나타내고드러낸세상만물중에서도김시습이특별히좋아했던것이있었다.그것은다름아닌‘매화(梅)’와‘달(月)’이다.김시습은이두가지사물을취해우리가잘알고있는‘매월당(梅月堂)’을자신의호(號)로삼았다.그가이호를사용한때는경주금오산(金鰲山)에정착하기로마음을정한31세(1465년.세조11년)무렵으로짐작된다.
O수락산과매월당의인연
전국을떠돌던김시습은성종이왕위에오르자1471년(성종2년)37세에서울로올라와이듬해수락산동봉(東峰)에폭천정사를짓고10여년을생활하였다하나자세한기록은남아있지않아확인할수는없다.’간폭정기’라는고서에수락산옥류동에있는옥류폭포앞에간폭정을지었는데,그위5리쯤에매월당김시습이옛살던터가있다’라고기록되어있는데,이곳이지금의수락산내원암인근으로추정된다.주요저서는최초의한문소설인금오신화(金鰲新話),매월당집(梅月堂集),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등이있다.
그러나김시습이정말로사랑했던산은수락산이었다.이것은그가수락산동쪽봉우리인만장봉(萬丈峰)을애호(愛好)하여‘동봉(東峯)’이라부르는것도모자라자신의호를‘동봉(東峯)’으로한사실을통해쉽게알수있다.김시습은처음수락산에터를잡아집을짓고운둔하기로결심한배경을금오산에서지낼때지은시들을모아엮은「유금오록(遊金鰲錄)」의끝부분에이렇게적어놓았다.“금오산에거처한뒤로멀리유랑하는것을좋아하지않았다.이로인해차가운기운속에서질병이잇달아발생했다.
다만바닷가에서하는일없이한가롭게지내며시골장터에서거리낌없이놀다가매화를찾고대나무를물어항상시를읊조리고취해스스로즐거웠다.신묘년(辛卯年:1471년.성종2년)봄에서울에와달라는청을따라한양에들어갔다가임진년(壬辰年:1472년.성종3년)가을에도성(都城)동쪽의폭천정사(瀑泉亭舍)에은둔해터를잡고집을지어일생을마칠마음을먹었다.계사년(癸巳年:1473년.성종4년)봄에쓴다.”[『매월당집』,‘유금오록(遊金鰲錄)]
수락산은한양도성에서동쪽으로30리쯤떨어진곳에자리하고있다.이산은삼각산(三角山:북한산)과도봉산(道峯山)과정족(鼎足:솥발)의형세를이루고있다.비록깎아지른듯한산세는삼각산과도봉산보다못하지만수석(水石)의아취는두산보다더빼어나다.수락산이라는이름또한이때문에얻어진것이라고말하는사람도있다.김시습은수락산폭천(瀑泉)부근에폭천정사(瀑泉亭舍)라이름붙인거처를짓고직접농사를일구며살았다.그리고이곳에유가(儒家)와불가(佛家)그리고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등5000여권의서책을쌓아놓고뒤적이며지냈다.그러다가싫증이나면따뜻한햇볕아래누워한가롭게낮잠자는것을즐겼다.또한김시습은자신의호로삼았던‘동봉(東峯)’,즉수락산의만장봉에자신의다른호인‘매월당(梅月堂)’이라는이름을붙인처소를짓고거처하였다.
김시습이세상을떠나고200년이흐른뒤에수락산에들어와그의유지(遺祉)를찾아복원하는데힘을쏟았던서계(西溪)박세당은“수락산동쪽에는예전에매월당(梅月堂)과흥국사(興國寺),은선암(隱仙庵)등몇개의절이있었다.매월당은곧김시습이거처하던곳이다.그런데세월이오래되어이미없어져버렸다.김시습은‘동봉(東峯)’이라고자호(自號)하였을정도로이산을매우사랑했다”는기록을남겼다.200년이라는긴세월이흐른후에도후세사람들에게생생하게전해졌을만큼김시습의‘수락산사랑’은유별났던것이다.그러나수락산을아무리사랑한다고해도김시습은자신의방랑벽을완전히버리지는못했다.수락산에거처한지10여년이흐른1483년(49세)홀연히두타(頭陀:머리를깎은승려)의행색을하고다시관동(關東)지방으로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