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윤씨와 어우동의 공통점

폐비윤씨와어우동의공통점…성리학이념확립본보기로여성처형

조선시대폭군의대명사로인식되는연산군(1475~1506년).연산군이폭군으로바뀐가장중요한원인으로평가받는것이생모윤씨의비극적인죽음이다.성종의후궁으로들어와한때는시어머니인수대비와성종의총애를받은여인.성종은왜그녀에게사약(賜藥)을내릴수밖에없었을까.["모정에흔들린조선조10대왕연산군"에이어"연산군의어머니패비윤씨"에대한이야기를옮겨본다.]

1479년6월13일성종은윤씨를왕비자리에서퇴출시키는파격적인결정을하고이를종묘에고했다.세종시절,세자빈이연이어폐출된사례는있었지만현직왕비가폐출된것은초유의사건이었다.성종이내린교서(敎書)에는윤씨가폐출된이유가구체적으로명시돼있다.

“왕비윤씨는후궁으로부터중전의자리에올랐으나내조하는공은없고,도리어투기하는마음만가져지난정유년(1473년)에는몰래독약을품고궁인(宮人)을해치고자하다음모가분명히드러났으므로내가이를폐하고자했다.그러나조정대신들이함께청해개과천선하기를바랐으며,나도폐출하는것은큰일이고허물은또한고칠수있으리라고여겨,감히결단하지못하고오늘에이르렀다.그럼에도뉘우쳐고칠마음은갖지아니하고,덕을잃음이더욱심해일일이열거하기가어렵다.그러니결단코위로는종묘를이어받들고아래로는국가에모범이될수가없으므로,성화15년(1479년)6월2일윤씨를폐해서인(庶人)으로삼는다.”

성종의교서에서는투기죄와궁인을해치려한죄,실덕(失德)등이언급됐지만사실오래도록성종과시어머니인인수대비한씨와갈등을빚어온것이크게작용했다.차기대권을이어갈아들(연산군)을낳은왕비에게이토록극단적인결정을내린것을보면왕실의윤씨에대한혐오가얼마나컸던가를짐작할수있다.

폐출된왕비윤씨는성종의계비였다.성종의첫번째왕비는한명회의딸인공혜왕후한씨로,성종은장인의후광으로형님인월산대군을제치고왕위에오를수있었다.공혜왕후는1467년12세의나이에세자빈으로책봉되고,1469년성종이왕위에오르자왕비가됐지만1474년(성종5년)에사망했다.이때빈자리를메운사람이후궁으로들어왔던제헌왕후윤씨(~1482년)였다.1474년8월9일왕비의자리에오른윤씨는11월에원자연산군을낳음으로써가치가절정에이른다.

윤씨의출생연도는정확히알려져있지않지만성종보다는연상이었던것으로추정된다.또한실록기록을보면그녀는성격이매우강했던것으로나타난다.여러측면에서윤씨는왕인성종에게도만만치않은존재였다.

더구나어린성종은누나뻘인왕비보다는후궁들을좋아했다.소용정씨와엄씨를찾는발길이잦았고,윤씨는이를그대로두지않았다.후궁을제거하기위해민간요법을쓰기도했고,후궁들이자신과세자를죽이려한다는투서를돌리기도했다.그러나투서의실질적인작성자가윤씨로밝혀지고,윤씨처소에서비상(砒霜)이발견되자성종은왕비의폐출을심각하게고민하기시작했다.

거듭되는며느리의파행에시어머니인인수대비도분노했다.인수대비는언문교지를내리면서“지금주상의사랑을받고있는데도행동이저모양인데,혹시뜻대로되지않는다면이보다더한행동도할수있다”며자신이애초에사람을잘못봤다고후회했다.

윤씨의투기에대해인수대비까지나서자,성종은윤씨의출궁을결심했다.이때마다윤씨를변호한것은‘원자의생모’,즉차기왕위계승자인연산군의어머니라는무기였다.신하들의거듭된요청에성종역시어쩔수없이일정기간그녀를지켜볼수밖에없었다.

이후에도성종과윤씨의갈등은계속됐고,대비가나무라면성난눈으로노려볼정도로윤씨는며느리의도리마저포기했다.그러다어느날성종이후궁을찾은것에반발해윤씨가성종얼굴에손톱자국을낸사태까지벌어지면서두사람의파국은시간문제처럼보였다.며느리의과격한행동을참다못한인수대비는마침내성종에게윤씨를폐위할것을요구했고,조선역사상처음으로왕비가쫓겨나는사건이발생했다.

사가로쫓겨난윤씨는폐출에그치지않고,3년뒤인1482년성종이내려준사약을마시고죽는비극적인최후를맞이한다.‘연려실기술’에는그과정이이렇게표현돼있다.

“윤씨는폐위되자밤낮으로울어끝내는피눈물을흘렸는데궁중에서는훼방하고중상함이날로더했다.임금이내시를보내염탐하게했더니인수대비가그내시를시켜,‘윤씨가예쁘게단장하고자기의잘못을뉘우치는뜻이없다’고대답하게했다.왕은드디어그참소를믿고죄를더줬던것이다.”

폐출된후에도반성의빛이없었던것이윤씨가사약을받게된결정적원인이었던셈이다.조선전기왕실여성으로서학문적식견이높았던인수대비는여성들이지켜야할성리학윤리서인‘내훈(內訓)’을직접저술하면서,조선사회가성리학을이념화해야한다고믿었던이다.이런인수대비에게왕인남편의행동을투기하고손찌검까지하는며느리는결코용납될수없었다.‘고부갈등’은왕비의폐출과사사(賜死)라는극단적인선례를남기게됐다.

폐비윤씨가사약을받을무렵인1482년,당시연산군은7세밖에되지않은왕자였다.게다가연산군은생모윤씨의죽음직후성종의두번째계비인정현왕후아들로입적됐기때문에어릴때는정현왕후를어머니로알고지냈다.1494년성종은죽으면서까지100년동안폐비의일을거론하지말것을유언으로남길정도로사건의후폭풍을대비했지만,성종의불길한예감은그대로적중한다.

‘연산군일기’에는연산군이성종의묘지문(墓誌文)에왕비아버지가윤기견(폐비윤씨의아버지)이라쓰인것을본후,비로소생모윤씨가폐위돼죽은것을알고수라(水剌)를들지않았다는기록이있다.왕이된후생모의죽음을알게됐고,연산군이이에대해깊이갈등하고있었음을알수있는대목이다.

1504년마침내이뇌관을터뜨리는자가등장하니,바로임사홍이다.자신의정치적입지강화를위해온갖정치적술수를기획하고있던임사홍.그는성종때폐비논의를주도한폐비정청(廢妃庭請)에참여한인사들을구체적으로거론하면서연산군이이들에대한복수를하도록유도한다.이것이바로연산군이생모를위한복수극을시작한갑자사화(甲子士禍)의서막이다.폐비윤씨의죽음은연산군대에다시발화돼조선시대선비들을유배와죽음으로몰아갔다.

폐비윤씨가폐출되기직전인1480년,조선에는한창시끄러운사건이발생했다.바로‘어우동(於于同)스캔들’이다.어우동은영화나드라마의이미지때문에기생으로알고있는경우가많지만,실제어우동의아버지는승문원지사를지낸박윤창으로양반가규수였다.어우동은왕실후손인이동(李仝)과혼인했다.그런양갓집규수가양반은물론,천한신분의사람들과정을통하다가물의를일으키면서사회문제가됐다.성리학이념에입각해남성중심의사회를지향하는성종은어우동사건을용납하지않았다.

“지금풍속이아름답지못해여자들이음행을많이자행한다.만약에법으로써엄하게다스리지않는다면사람들이징계되는바가없을텐데,풍속이어떻게바로되겠는가?옛사람이이르기를‘끝내나쁜짓을하면사형에처한다’고했다.어우동이음행을자행한것이이와같은데,중한형벌에처하지않고서어찌하겠는가?”

성종은이같이명하며어우동을극형에처했다.남성과간통을한죄에대해극형을가하는것은무리라는반대의견이많았지만성종은그대로형을집행했다.성종의처형명분은조선의사회풍속과기강을바로잡는데있었다.

조선의건국이념으로수용된성리학은성종이이끌던15세기후반까지도사회에완전히정착하지않았다.

성종은누구보다성리학이념을수용하고전파하려노력했던왕이다.이런상황에서터진폐비윤씨의투기와어우동스캔들은성리학의이념전파에걸림돌이되는사건이었고,결국성종은어우동과폐비윤씨를극형으로처벌하는강수를뒀다.조선의여성들에게두사건을반면교사로삼게해성리학이념으로나아가는국가의취지에적극부응하라는왕의의지를담았던것이다.


[신병주건국대사학과교수]-[신병주의‘왕으로산다는것’](6)

[본기사는매경이코노미제1806호(2015.05.06~05.12일자)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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