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철 교수의 산사랑

前 KDI 원장이었던 박영철 교수의 산사랑 이야기 입니다.

월간 산에 실렸던 기사 전문을그대로 옮겼습니다.

전KDI원장이었던 박영철 서울대 초빙교수가 요즘 산에 흠뻑 빠져있다. 2005년엔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오더니, 2006년엔 지리산 우중산행, 대둔산, 한라산을 등산했다. 한라산은 비록 정상을 밟지 못했지만 노년의 산행이 각별하게 느껴진다. 새해엔 꼭 설악산에 가보고 싶다고.

v 유동성 위기에 시달려오던 인도네시아와 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잇달아 모라토리엄(Moratorium, 국가 채무 지불유예 또는 연기)을 선언한다. 한국은 한보그룹 부도와 삼미 및 기아사태가 터지면서 국가경제에 타격을 가한다. 이들 국가에 차관을 제공한 한국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재에 시달린다. 불길한 징후들이 여기저기서 터지면서 한국경제에 이상(異狀)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심한 자금난에 허덕인다. 대외신인도는 떨어졌고, 외국투자자들은 한국에 더 이상 투자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자금을 회수해 갔다.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거덜나고 있었다.

외신들은 연일 한국이 곧 IMF(국제 통화기금) 구제금융을 신청할 것이라고 보도했지만 정부에선 “한국경제의 펀드멘탈(fundamental)은 튼튼하다. 태국과 한국의 경우는 다르다”며 공식 반박성명을 냈다.

한국의 국가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이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던 1997년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한국 정부는 여태까지의 말을 뒤집고, 그 해 11월 구제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30년 가까이 성장만 보고 IMGP0023.JPG달려왔던 한국경제의 신화가 무참히, 그리고 하루아침에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망연자실 했다.

이 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 인물이 있었다.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고, 기회는 준비한 자에게 온다고 했던가. 두 속담 모두 그에게 해당될지 모르겠다.

박영철 교수(68).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68년 첫 직장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조사관으로 5년 가까이 일했다. 이 때 맺은 인연으로 20여년뒤 한국 외환위기 당시 협상 창구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97년 금융연구원장 시절 강경식 부총리의 특명을 받아 IMF 관계자들을 수시로 접촉했다. 스탠리 피셔 수석부총재와 만나 구제금융 지원 규모와 우리 정부가 이행할 조건 등에 대해 막후 협상을 하기도 했다.

국민들의 금모으기와 같은 뜨거운 나라사랑과 각계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한국은 IMF 구제금융 신청 2년 8개월여만인 2000년 8월, 600억달러에 가까운 차입금을 전액 상환하기에 이른다. IMF 공식 졸업을 선언한 것이다.

한국의 운명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이 막후 주역이 바로 박영철 교수였다. 국제금융, 거시경제정책에 탁월한 연구업적을 남긴 세계적인 경제학자 미국 컬럼비아대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교수조차 그의 논문에서 “한국에서 외환위기를 제대로 예측한 학자는 박영철 교수 밖에 없다”고 밝힐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한국경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대처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IMF 전후해서 그가 맡은 직책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한국경제에 깊이 관여했는지 알 수 있다.

고려대 교수(1972년~2005년), 한국 개발연구원(KDI) 원장(86년), 대통령 경제수석(87년), 한국 금융연구원 원장 및 금융제도개편연구위원회 위원장(92년~98년), 신경제계획위원회 공동위원장(93년), 신경제 전문위원회 위원장(93년), 금융발전심의회 위원장(97년), 상업-한일은행 합병추진위원회 위원장(98년), 공적자금 관리위원회 민간 공동 위원장(2004~2006년), 서울대학교 국제학 연구소 국제통상금융센터 소장(2005년), 현재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막후에서 활동했고, 국내에서 몇 안되는 국제 금융학계의 권위자로 통하는 그가 요즘 산에 푹 빠져있다. 지리산 우중산행(雨中山行) 뿐만 아니라 한라산 설산 등산에 히말라야 트레킹까지 다녀왔다. 이 정도면 등산 매니아 수준이다. 이론과 실물을 두루 거치며 한국경제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던 그가 왜 산에 빠졌을까? 산과 경제, 무슨 상관이 있을까?

단순히 건강 때문인지 물어봤다. 그는 단연코 아니라고 말한다.

“산에 오르면 집중력이 좋아진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내려올 때의 쉬운 길일수록 자만에 빠지지 않고 정신을 집중해서 조심조심해서 내려오면 그 순간 완전 무념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몇 시간 동안의 그런 상황을 겪고 나면 머리가 그렇게 맑아질 수가 없다. 여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경지에 다다르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일상생활에서 집중이 필요할 때 등산할 때의 그 경험이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등산의 맛을 제대로 느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와 함께 지난해 12월 9일 대둔산(878m)을 등산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도립공원 주차장에서 오전 11시 30분 오르기 시작했다. 승전탑 관리소를 지나 화랑폭포, 비선폭포를 거쳐 540고지까지 55분만에 도착했다. 잠시 쉬면서 그가 말했다. “여기까지 약 1시간 정도 걸렸겠다” 시계를 봤다. 12시 25분을 지나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시간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난 내 호흡만 봐도 걸린 시간을 알 수 있어. 내가 이 정도 맥백이 뛸 정도면 정확히 1시간 걸린다는 걸 짐작으로 느낄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호흡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새로운 등산시간 계산법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어 마천대 정상을 거쳐 거치른 내리막 비탈길이 나왔다. 그는 조심조심 또 조심해서 내려갔다. “아휴, 난 내리막길이 휠씬 더 힘들어. 지난 번 지리산 백무동 하산 길도 남들은 2시간 30분정도 걸리는 걸, 난 5시간 넘게 걸렸어. 거의 2배이상 걸린 셈이지. 어디 쉽게 내려가는 방법이 없을까” 그가 몰라서 물었을까? 알면서도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그의 하산 길은 그의 말 그대로 몰입이었고 집중, 그 자체였다. 잠시 곁눈질도 없이, 앞만 주시하며 조심조심 한 발짝 한 발짝씩 발걸음을 내려 놓았다. 아니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는 표현이 더 적확한지 모르겠다. 실제 그의 등산 소요시간은 오르막길에선 일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내리막길은 확실히 차이가 났다.

산(山)이 주는 교훈을 깨달은 걸까? 인생의 의미를 느낀 것일까?

인생과 경기(景氣)와 산은 모두 순환 사이클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분명한 진리다. 인생의 오르막에서 보이지 않았던 각종 모습들이 내리막에선 후회와 회한으로 떠오르곤 한다. 이게 인간 본연의 나약한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산을 오를 때에도 잘 오른다고 만용 부리지 말고, 내리막에선 더 조심스럽게 자만심에 빠지지 말라는 교훈을 평소 자연은 인간에게 가르치고 있을지 모른다.

그도 아마 인생의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IMF 과정에서 그는 어떻게 보면 악역을 주로 맡았다. 은행 구조조정과 합병, 각종 공적자금 투입의 적절성 등이 그가 맡은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실업자들은 한국사회, 아니 정부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지만 그는 인간으로서 항상 짐을 지고 있는 느낌일 것이다.

그는 말한다. “조직엔 발전적 측면을 먼저 볼 수도 있고, 인화(人和)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도 있다. 조직 발전을 우선시하면 인화를 해치고, 인화만 강조하면 조직 발전이 지체되는 양단의 측면이 있다. 두 가지 요소를 적절히 상응시켜 시너지 효과를 얻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만, 사실 그런 역할을 할 인물은 100년에 몇 명 나올까 말까할 정도라고 본다. 조직발전 보다 인화를 중시한 인물은 은퇴한 후에도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경향이 있지만 현재의 조직발전을 외면할 수 없는 게 또한 리더의 역할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국사회엔 지연 및 학연 요소, 즉 동양적 가치인 정적(情的)인 요소가 워낙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조직발전 못지않게 인화를 중요시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산을 통해서 얻은 그의 정서는 한때 그를 지배했던 서양적 가치인 합리주의적 사고를 동양적 가치인 정(情)과 인화로 상당부분 대치시키고 있다. 그는 지난 해 12월 16일 한라산에 또 다녀왔다. 산의 매력에 흠뻑 빠진 사람 같다. “난 산을 잘 모른다. 그러나 한번 갔다오면 다시 가고 싶은 게 산이다. 히말라야 트레킹도 다녀왔지만 역시 우리 산이 포근하고 좋다. 새해엔 설악산에 꼭 한번 가고 싶다”

그는 아직도 대외활동에 적극적이다. 지난 해 2월 500년이 넘는 출판역사를 가진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를 통해 영문판 저서 ‘동아시아 경제자유화와 경제통합(Economic Liberalization and Integration in east asia)’을 펴냈고, 8월 한국경제학회 세미나에선 “부동산 시장이 침체한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면 물가도 못잡고, 부동산 시장에 미치는 효과도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현 정책에 대해 훈수를 두기도 했다. 마치 “노병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듯 했다.

이 노교수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뒤늦은 산사랑, 언제까지 계속될지 두고볼 일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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