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의 한국 산수와 영화에 관한 이야기

한국의 자연, 한국인의 삶, 역사에 특히 관심을 보여온 임권택 감독이 그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 촬영을 거의 마무리 하고 올 4월 중순쯤 개봉한다. 이번 영화에도 한라산의 오름등 한국의 아름다운 산수가 여러 장면 나온다. 그의 한국 자연에 대한 사랑, 영화에 대한 업적 등이 월간 산 2월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그는 개봉을 앞두고 "느낌이 좋다"고 개봉될 예정인 영화에 기대감을 보였다.

100번째 영화 ‘천년학’ 촬영 마무리한

거장 임권택 영화감독의 한국 산수와 자연및 영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월간 산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거장(巨匠) 한사람이 영화 꼭 100편을 만들었다. 그 100번째 영화가 올 4월 중순쯤 개봉될 예정인 ‘서편제(영상으로 보는 판소리가 주 내용)’ 속편 ‘천년학(판소리가 직업인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능할까? 1년에 한편씩만 찍어도 100년이 걸린다. 그러면 도대체 1년에 몇 작품을 만들었단 말인가? 서너 작품, 아니면 다섯 작품? 가능한가? 영화란 기본적으로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예술 활동이다. 인간의 창의력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지속적으로 발휘하긴 무척 어렵다. 이 창의력에 탁월한 상상력과 감수성이 있어야 제대로 된 영화가 나온다. 보통 감독은 1년에 한편씩 찍기도 쉽지 않은데 수편씩이나 촬영하는, 창의력 넘치는 인물은 과연 누구인가?

그가 바로 한국 불세출의 영화감독 임권택(71)이다. 한국영화계에서 그의 이름을 빼면 중량감이 훨씬 떨어지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감독, 한국영화의 대부(代父) 아닌가? 그런데 그는 스스로 아니라고 한다. 지난 2005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아시아인 처음으로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하자, 독일 유력지 슈피겔에서 ‘한국 영화의 대부’라고 표현했다. 당시 임권택 감독은 “그냥 해본 소리겠지. 간지럽기 짝이 없다. 그냥 도태되지 않으려고 끈질기게 노력한 데 대한 예의적 표현이겠지”라고 말했다. 겸손이 넘쳐흐르는 반응이다. 실제로 그를 만나본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얘기가 “후덕하고 어눌한 외모가 과연 이 사람이 세계적인 영화감독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한다. 그의 ‘감추어진 끼’는 겸양으로 발휘되는가 보다.


아시아 첫 베를린 영화제 ‘명예황금곰상’ 수상


실제로 그의 수상내력만 봐도 그가 얼마나 탁월한 감독인가를 금방 알 수 있다.

2005년 아시아 첫 명예황금곰상(베를린 영화제), 2004년 골드메달(국제 저작권관리연맹), 2004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2002년 페데리코 펠리니 메달(유네스코), 2002년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 2002년 금관문화훈장, 2000년 제14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1999년 20세기를 빛낸 예술인(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1998년 제41회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구로사와상, 1998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7년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1992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대한민국 청룡영화상 네 차례, 대종상 아홉 차례 등등.

영화관련 굵직한 수상기록만 정리한 것이다. 어떻게 한 인간이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이렇게 큰 상을 여러 차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이 받을 수 있을까?

어찌 보면 그의 삶 자체가 가난과 고난, 질곡의 과정을 겪어 영화로 표출되는 것인지 모른다. 한편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장면이 그의 삶 곳곳에서 나온다.

36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의 좌익 활동으로 인한 그늘로 자유스럽지 못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당연히 먹을거리도 없이 가난 속에 살아야만 했다. 어느 날 그는 가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가출한다고 해서 그에게 나아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대로였다. 단지 부모품만 떠났을 뿐이었다.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연명했다. 6․25가 끝난 후에는 여기저기서 모은 헌 군화를 파는 일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영화판 일을 하면 밥은 굶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는다.

귀가 솔깃한 그는 그날로 바로 찾아가,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게 바로 1955년이었다. 그에겐 운명의 해였고, 한국영화계로선 행운의 해였다. 물론 행운의 의미란 그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고통을 감내한 결과가 포함된 것이다.

충무로의 신참내기 임권택이 주로 하는 일이라곤 소품 조수, 잔심부름, 식사 배달 등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것이었다. 촬영 내내 현장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누가 부르면 바로 달려가고, 마음 편하게 밥도 못 먹고… 미래의 거장도 신참 때는 다른 사람과 똑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은 있었다. 모든 걸 의문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봤다는 점이다. 그게 나중의 거장과 범부(凡夫)의 본질적인 차이일 것이다.


한국적인 삶, 산수, 역사에 주로 관심


경험을 쌓기 시작한 그는 이듬해인 56년 신생영화사 영화제작부에서 이론으로도 무장했다. 드디어 그이 나이 26세 때인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그는 70년대 말까지 매년 두서너 작품씩 71편의 영화를 쏟아냈다. 17년간 한해 평균 4편 이상씩 영화를 촬영한 셈이니 작품을 만들었다기보다 단순히 찍었다는 의미가 더 강했을 것이다. 그도 스스로 “감독 데뷔 초기 10여년 정도의 50편은 흥행위주로 찍은 남작(濫作)의 시절이었고,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영화였다”며 “당시의 영화를 보면 누가 저런 저급한 영화를 촬영했나 싶을 정도로 구정물 같은 싸구려 영화, 불태워 버리고 싶은 필름으로 자막에 내 이름이 나오면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고 회고했다. 40줄 넘어서면서 그는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자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만든 영화가 ‘잡초’(73년)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만족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럴까’라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돌아보니 “10여 년 동안 흥행위주의 ‘남작의 때’가 체질화 돼 쉽게 빠지지 않았던 것이었다”고 말했다. “체질개선 하는 시간도 꼬박 10년이 걸리더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그의 70년대 영화를 “한국 사람의 문화적 개성도 없고, 삶도 담겨져 있지 않고, 재미도 없고, 스토리도 뻔하면서, 관객도 없이, 주제만 뚜렷한 영화”라고 규정했다.

‘남작의 때’를 빼는 10여년 세월이 지난 80년대 그는 드디어 완성도 높은 작품성 있는 영화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81년 구도자의 고뇌하는 모습과 한국의 산수를 적나라하게 담아낸 ‘만다라’를 발표했다. 이 영화가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면서 그는 국제영화제 문을 본격 두드리기 시작했다. 86년 개봉한 영화 ‘씨받이’에 출연한 강수연은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물론 감독은 임권택이었다. 그의 작품성과 예술성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한때 ‘우리는 왜 할리우드 영화같이 못 만드나’라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결론은 한마디로 ‘도저히 불가능하다’로 내렸다. 왜냐하면 할리우드 영화의 엄청난 제작비, 우수한 배우 및 인력, 최첨단 기재 및 기술 등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방향으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한국사람 아니면 만들 수 없는 한국적인 삶, 산수, 역사 등을 담아낸 문화적 개성물로 세계적 경쟁력을 가지겠다”고. 여기에 10여 년간 ‘남작의 때’를 빼는 기간과 맞물려 그의 작품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89년), ‘장군의 아들’(90년), ‘서편제’(93년), ‘태백산맥’(94년), ‘춘향뎐’(99년), ‘취화선’(2001년), ‘하류인생’(2004년) 등 명작들이 속속 발표됐다. 특히 취화선은 그에게 칸영화제 감독상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제공했다. 93년 제작된 ‘서편제’는 서울에서만 105만 명의 관객동원이라는 당시 한국영화 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올해 일흔을 넘긴 그에게 “이젠 후학들을 키워야 하지 않나”라고 물음을 던졌다. 돌아온 대답은 “나보다 뛰어난 감독이 많다. 우린 6․25와 가난 같은 고난의 체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소재, 나아가 상상력의 제한이 있다. 치우치지 않은 경험에 뛰어난 상상력과 창의성을 갖춘 감독을 볼 때 한국영화의 미래는 밝다. 다른 한편으로 창의성, 상상력을 배우려면 배우는 사람의 머리를 비워야 가능하다. 즉 고정관념을 없애야 한다는 얘기다. 능력있는 감독들에겐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고, 정작 필요한 사람은 고정관념을 깨뜨리려고 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


한국의 유명한 산은 다 가봐


그의 영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자연미, 즉 한국의 산수를 담아내는 빼어난 영상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자연이 확실히 친숙하다. 스위스와 같이 산이 아름다운 곳에 며칠씩 있어 봐도 금방 싫증이 나더라. 역시 우리나라 산하가 몸에 살포시 와 닿아 뭔가 느낌이 다르더라. 한국의 산수를 광선으로 찍는 게(영화 촬영한다는 영화계 은어) 부담도 없고 담기도 쉽다. 그러나 설악산의 장엄한 경관은 장대한 느낌 그대로 담기 쉽지 않아 아직 못하고 있다. 좀 더 친숙해지면 가능해지지 않겠나” 인간이 자연과 완전 동화가 되어야만 자연의 진정한 모습을 느끼고 담을 수 있다는 의미 같았다.

사실 영화 외 그의 인생은 등산매니아 수준은 아니지만 산과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등산도 설악산, 오대산, 지리산 등 웬만큼 이름난 산은 다 가봤을 정도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훈수했다. “사람들이 영화에 나온 멋진 곳이 실제와 다르다고 실망하는 건 영화의 극적현상과 자연이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영향이 크다”며 “사람들은 자연과 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느끼면 되고, 그렇지 못할 땐 마음으로 아름답다고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관심을 가지면 친숙해지고, 친숙해지면 사랑하는 마음도 생긴다”는 현자(賢者)적인 말도 덧붙였다.

올 4월 개봉하는 천년학에 대해서도 “한라산 오름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가득 담겨 있다”며 “개봉을 앞두고 느낌이 좋다”며 촬영 마지막 작업을 했다.

그에게 자연과 산에 대한 사랑을 한마디로 개념화하면 무슨 말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한참 고민을 하다 “인간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고, 자연을 벗어나 살 수 없는 것 아니겠냐”고 마무리했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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