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박사 윤무부 교수
“어릴 때 산․바다 찾아다니며 호기심․모험심 키워”
사람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산다. 그 꿈을 이루기도 하고, 그러지 못해서 평생 미련을 안고 후회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다. 설령 꿈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계속 정진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중간에서 좌절한 경우도 많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그 소년은 바닷가에서 꿈을 키웠다. 그의 고향은 거제도. 앞은 탁 트인 바다, 뒤는 빼어난 산이 있는 곳이다. 바다는 그에게 무한한 꿈을 줬고, 산은 원대한 희망을 제공했다. 소년은 산으로 바다로 마음껏 뛰어다녔다. 자연이 그의 놀이터였다. 그 놀이터 모든 것들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숲, 새, 나무, 생태, 곤충, 물고기 등등 어느 것 하나 눈길 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나무는 왜 봄마다 새싹이 나며, 새의 부리는 왜 전부 다르게 생겼을까?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호기심과 모험심은 날로 쑥쑥 커갔다. 그중에도 유달리 새가 눈에 쏙 들어왔다. 그의 고향 거제에선 바다새와 산새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 그렇게 그 소년은 새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그가 새였고, 새가 곧 그였다. 후투티, 머리 깃털이 곡괭이같이 생겨 눈에 띤 그 새와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그 소년은 평생 떼려야 뗄 수 없는 새의 세계에 빠져든다. 후투티의 색깔과 모양, 깃털과 부리는 영원한 그의 화두였다. 그 화두는 아직도 계속 된다.
새박사 윤무부 교수가 유명산으로 탐조여행을 갔다왔다. 그는 지금 약간의 뇌경색으로 활동이 다소 불편한 상황이지만 수십년 동안 탐조여행 다니느라 자연과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유명산 정상으로 탐조여행을 떠나보자.
이번 호 명사산행은 일생동안 한번도 후회나 미련 없이 우직하게, 일편단심으로, 초지일관 등 모든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새 연구에 일생을 바친 윤무부 교수 이야기다. 윤무부, 그의 이름 세 글자는 이젠 고유명사가 아니라 새박사라는 보통명사가 돼버렸다. 그의 이름이 바로 ‘한국의 새’인 것이다.
한국엔 약 400여종의 새가 있다. 텃새는 10% 남짓 되는 58종에 불과하다. 그는 이 400여종의 새를 보고, 찾고, 새소리를 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 밤낮 구별 없이 누볐다. 그의 말, 표현 그대로 옮기자면 “4계절 24시간 내내 새와 함께 있었다”고 자신했다. 대가다운 일성이다. 그의 탐조여행에 얽힌 일화는 수없이 많다. 그 중 몇 개만 들어보자. 이 일화를 보면 그의 새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산과 들 누비며 “4계절 24시간 새와 함께 있었다”
67년 대학원 시절, 지금은 국립 수목원이 된 광릉 수목원에 탐조여행을 갔다가 불귀의 객이 될 뻔한 사건이 발생했다. 새를 관찰하기 위해 개울가에 발을 담그는 순간 미끄러졌다. 마침 그 때는 경기지역에 쏟아진 폭우로 급격히 물이 불어나고 있던 시점이었다. 물은 순식간에 불었다. 섬에서 자라 수영엔 자신 있었지만 폭우에 휩쓸려 내려갈 땐 소용없었다. 통나무를 잡았지만 그냥 떠내려갔다. 6시간을 떠내려가 남양주 교문리에서 시체 12구와 함께 발견됐다. 급류 속에 6시간을 휩쓸렸으니 다들 죽었다고 판단했다. 그 자신도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나 천우신조였던가? 이승에 할일이 남았다고 판단한 하늘의 배려였던가?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혼자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이었다. 그런 후에도 그의 모험심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광릉 수목원을 찾아 탐조여행을 즐겼다. 자기 일에 대한 열정과 정열, 우직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두 번째 일화도 만만찮다. 결혼 후 아들을 데리고 전국을 탐조할 때다. 차량으로 떠날 때도 있었지만 그 당시엔 주로 오토바이를 이용했다. 오토바이가 편하고, 탐조하기에도 좋았다. 아들도 아빠와 함께 탐조 다니는 걸 좋아해서 곧장 따라나서곤 했다. 원체 먼 거리를 이동하고 탐조하다보니 아들은 피곤에 지쳐 아예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다. 아스팔트 거리에선 자는 데 지장 없지만 포장 안 된 산길에선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아들은 절묘하게 잘도 잤다. 아예 이력이 나 있었다. 그 날도 아들을 뒷자리에 태우고 탐조여행을 떠났다. 비포장 산길을 한참을 달리다보니 왠지 뒷자리가 허전하고 가벼웠다. 돌아보니 아들이 없었다. ‘이럴 수가!’ 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가보니 아들이 산길 옆 길가에 쳐 박혀 울고 있더라는 거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고, 타박상과 긁힌 상처만 있었다. 응급처치하고 겨우 달래서 계속 탐조여행을 떠났다. 한다면 하는 우직함은 그의 인생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그 아들이 지금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미시간 주립대에서 새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알래스카에서 조류 탐사활동을 하고 있다. 부전자전이라 했던가.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새에 관한 연구를 하려고 할 때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그의 아들이 박사논문을 새에 관해서 쓰려고 하자 담당교수가 그의 아들에게 “한국엔 윤무부라는 유명한 새박사가 있으니 자리 잡기가 힘들지 모르겠다. 그러니 전공을 바꾸는 게 어떻느냐”고 권했다고 한다.
세 번째 일화. 제주도로 철새 연구를 떠났을 때의 일이다. 그는 한 번 집을 나서면 한달이고 두 달이고 옷을 갈아입지 않는다. 속옷을 일주일 내내 입은 적도 많다. 그러니 부인이 좋아할 리 만무하다. 이번엔 단단히 요일별로 갈아입을 옷에다 표시해둘 정도였다. 그러나 웬걸 집 떠나면서 부인의 말과 당부는 속옷과 함께 깡그리 가방 속에 묻어둬 버렸다. 제주도에서 머무는 10일간 옷보따리는 아예 풀지도 않았다. 대충 어떤 상태인지 짐작 갈 것이다. 새 탐사를 마치고 부산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옴짝달싹 못할 만큼 꽉 들어찬 승객들이었지만 그 주위엔 사람들이 접근을 꺼렸다. 덕분에(?) 편하게 부산까지 왔다. 부산에서 서울행 기차를 탈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약을 하지 못해 입석으로 기차를 탔다. 피곤에 절어 타자마자 남의 좌석에 드러누웠다. 누구 하나 접근조차 하지 않았고,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거지가 따로 없었고 ‘인간 스컹크’였다.
그 외에도 일화는 수없이 많다. 새 찾으러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다 보니 불심검문에 걸려 군부대와 경찰서 단골손님이었고 철창에서 하룻밤 보내는 건 예사였다. 아침이슬 맞으며 산을 어슬렁거리다 간첩으로 오인받기도 했다.
불편한 몸에도 기어코 산 정상까지 올라
웃지 못 할 광경도 많이 봤다. 그가 자주 얘기하는 ‘청바지 아가씨와 땡벌’사건은 누가 들어도 귀가 솔깃하고 재미있는 얘기다. 그가 수도권 인근 산 전망대에서 탐조하고 있을 때, 청바지를 입은 아주 날씬하고 멋진 여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등산을 시작했다. 망원경 초점을 새 대신 아가씨에게로 방향을 돌렸다. 계속 유심히 관찰했다. 이윽고 아가씨가 좌우를 살피더니 으쓱한 숲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볼일을 보기위한 것 같았다. 일순 더욱 궁금했다. 들어간 쪽을 향해 망원경을 정조준해서 살펴보니, 갑자기 여자가 고함을 지르며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새보다 사람 목숨이다’ 싶어 바로 뛰어 내려가 여자를 살펴보니 땡벌에 엉덩이와 허벅지 등을 쏘여 기절해 있었다.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다 겨우 차로 이동시켜 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지만 그에게 들으니 그럴 듯하게 들렸다.
그와 함께 지난 6월6일 유명산 갔다 오는 길 7시간 동안 들은 얘기는 무궁무진했다. 그의 50여년 탐조여행 동안 생긴 에피소드 몇 가지만 들었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의 인생 자체가 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쌓은 업적이 지금 하나 둘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게 그의 고향 거제도에 세계 최초로 조류 영상 사이버 박물관이 건립되는 것이다. 그의 작업 모든 것이 그 곳에 전시된다. 그가 76년부터 채집한 새소리가 지금은 100여종이나 된다. 우리나라에 사는 철새와 텃새 4분의 1이상 소리를 담았다. 그의 집은 온통 ‘새판’이다. 새소리와 새 필름과 새에 관한 책자들로 가득하다. 4,000여장에 이르는 새 사진도 TV방송이나 교육용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조류 영상 사이버 박물관에서 관람객과 만나게 된다.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궁금증들도 새들과 함께 있으면서 해결했다. 어릴 때 산과 들과 바다를 누비며 키운 그의 호기심과 모험․탐험심 덕분이었다. 기러기는 왜 줄을 서서 갈까? 골똘히 생각해 보니 추운 날씨에 공기의 저항을 덜 받기 위해 대각선으로 줄지어 나는 거였고, 깃털이나 배설물이 눈과 귀, 코에 들어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는 거였다. 머리 나쁘거나 기억력 좋지 않은 사람보고 ‘까마귀 고기 먹었나’라고 하는데, 사실 확인을 위해 그는 직접 까마귀 고기를 먹어봤다고 했다. 까마귀 고기를 먹고 대학원 때 시험을 봤는데, 전혀 문제없었다. 까마귀는 지구상의 조류 8,600여종 중 가장 똑똑한 새이며, 앵무새나 구관조와 같은 무리에 속한다. 이와 같이 그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속설도 직접 체험해보거나, 궁금증을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다.
새를 사랑하다보니 그의 인생은 항상 산과 더불어 있었다. 그는 지금 몸을 거동하기 힘든 상태다. 지난 1월 영하의 거친 날씨에 야외에서 탐조여행을 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그 날도 항상 하던 방식으로 심야까지 작업했다. 갑자기 소화가 심하게 안 되는 불편함을 느꼈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고집대로 작업을 계속하다 야식 먹고 야외 침낭 속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몸을 혹사했으니 쉬어라는 하늘의 뜻인지 모르겠다. 그날로 바로 뇌경색이 왔다. 두 달여간 병원 신세를 지다가 퇴원한지 불과 3달 정도밖에 안됐다. 그런 사정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는 함백산에 가자고 했다. 새 탐조는 함백산이 제격이란다. 가장 높은 곳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으니 그의 불편한 몸으로 무난했을 성 싶기도 했다. 함백산은 너무 머니 가까운 북한산이나 도봉산에 가자고 하니 대꾸도 않고 유명산이나 용문산으로 가자고 했다. 대가(大家)가 그러니 따랐다. 유명산에 갔다. 기어코 정상에 가자고 했다. 산에 왔으면 정상에 가야 한다고 했다. 산을 사랑해서 그런지, 그의 성격 때문에 그런지, 아님 둘 다 때문인지, 어쨌든 정상까지 올랐다. 그는 내려가기 싫어했다. 이미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된 상태였다. 어찌 보면 그의 인생이 자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와 자연과 더불어 한 그의 인생, 이제는 후손들에게 그 가치를 평가받고 편안히 쉴 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