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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3대회장 지낸 정명식 회장

포스코 3대 회장 지낸

정명식 전 한국산악회 회장

“산이 그냥 너무 좋았다…후회 없는 삶 살아”


60년 이상 산을 다녔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산은 다 올랐다. 가고 또 갔다. 10대 때부터 암벽도 했다. 북한산, 도봉산 암벽은 숱하게 탔다. 인수봉 암벽엔 그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올랐다. 대학 들어갈 때 좋아하는 산에 계속 오를 수 있을 것 같아 지질학과를 선택하려고까지 했다. 그렇다고 세계의 고산에 도전하는 전문 클라이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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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뒤 조그만 숲속에서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한국의 철강 왕’ 박태준 회장을 20여 년간 보좌하며, 포스코 3대 회장을 지낸 정명식(丁明植 ․ 77) 전 한국산악회 회장 얘기다. 포스코 회장을 지내기까지의 스토리는 무궁무진하다. 지나고 나서 들으면 ‘아, 그렇구나’ 정도로 느껴지지만 실제의 삶은 누구나 그렇듯 도전으로 점철돼 있다. 정 회장은 그 도전을 성공으로 이끈 주인공이다.

그의 삶은 한국의 노년 세대들이 대개 그렇듯 대한민국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6년제이던 중학시절에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았다. 미군정 시절엔 고교를 다녔다. 시대의 어지러운 상황을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모두 겪었다. 산에 다녔다. 경기중학 산악부 창립자에 가까울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대학 입학해선 아버지의 사망과 6․25 전쟁을 겪는다. 서울대 공대 산악부를 창립한다. 피난생활 후 서울로 올라와 대학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이것만 하더라도 일제, 해방, 미 군정, 한국전쟁 등 격변의 한국 현대사를 전부 몸소 체험한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의 인생 첫 전기는 유학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가 1955년. 전화(戰禍)로 초토화된 대한민국 복구에 모두가 힘쓸 때다. 진학한 공대 대학원은 실험실이나 실험 기자재라곤 찾아볼 수 없고, 강의실만 덩그러니 있던 시절이었다. 미국 주도의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국제협력기구, 지금의 AID)가 한국 부흥을 위해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빠른 시일 내 체계를 잡기 위해 교육기관은 공대, 의대, 농대를 집중 지원했다. 공대는 사회시설을 복구하기 위해서였고, 의대는 전염병 방지 등 의료기관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고, 농대는 시급히 식량을 자급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이와 더불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해서 미국의 시스템을 교육받게 유학을 보냈다. 교수와 대학원생 거의 전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2~3년까지 공부했다.


한국 철강왕 박태준 회장 20여년 보좌


그는 가장 젊은 사람에 속해 미네소타 대학원에서 토목공학 석사공부를 했다. 한달 180달러를 받았으니, 일당으로 치면 6달러에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GNP가 100달러가 채 안되는 시절이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학생신분으로서 그만하면 만족할만한 수준이었다. 물론 학비와 책값 등은 모두 따로 지원 받았다. 중 ․ 고 시절에 산을 그렇게 좋아했지만 제대로 된 등산화나, 발에 맞는 등산화를 신어본 적이 없었지만, 미네소타에 유학 가서 처음으로 발에 맞는 등산화를 신어봤다. 등산화에 발을 맞추다 난생 처음 발에 맞는 등산화를 신은 것이다. 그러나 미네소타엔 산이 없어 등산을 할 수 없었다.

3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고 59년 귀국했다. 학교에 자리를 잡기 위해 시간강사를 했다. 바로 위 선배까지 교수로 쉽게 임용됐다. 그도 ‘쉽게 나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주위에서도 ‘조금만 더 참아라’고 격려했다. 생활은 힘들었지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참았다. 일은 많았다. 시간강사 하느라 강의준비를 해야 했고, 미국 유학 갔다 왔다고 수당도 거의 없는 미국의 복구지원팀 고문관 통역 일까지 떠맡겼다. 교수 증원 승인허가는 쉽게 나지 않았다. 정부 예산 자체가 절대 적었던 시절이라 한번 중단된 예산이 다시 늘지도 않았고, 조금 늘었다 하더라도 워낙 쓰일 때가 많던 시절이었다. 언제 다시 승인 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생활은 점점 더 힘들었다. 그새 결혼해서 아이는 셋이 됐다.

마침 그 때 한국의 첫 설계사무소가 59년 문을 열었다. 엄청난 사회 간접시설 공사가 잇따르자, 이전까지 주먹구구로 하던 설계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내무부 토목국장을 했던 김해림씨가 개업한 것이다. 민간에서 국가 주요 사업에 처음으로 설계 공급을 시작했다. 임시 생활방편으로 설계 주임으로 일을 시작했다. 시간강사에 고문관 통역에 설계사무소 주임까지 1인3역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설계사무소 일은 생활비를 벌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이후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주요 수단이 돼 버린다. 아마 대학교 전임강사로 발령이 났다면 그의 인생은 교수로 정년퇴직하고 끝났을 것이다. 운명의 방향은 그의 의도와는 다른 곳으로 흘렀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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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하고 있는 정명식 회장.

등산 통한 정신적 희열 무엇과도 비교 안돼


설계사무소에서 그가 처음 맡은 일이 식수를 제대로 공급하는 상수도 사업이었다. 지금의 남산 1호 터널 옆에 있는 보광동 취수장이 그의 첫 작업 결과였다. 부산까지 지원했다. 낙동강 물을 끌어다 쓰는 상수도 사업도 그의 작품이다. 공사비가 없어 차관신청도 그가 직접 했다. 사업계획도 냈다. 문서도 직접 작성했다. 북치고 장구 치고 ‘원맨쇼’하듯 바빴다. 그의 인생에 가장 바쁜 시기가 세 번 있었다. 처음이 49년 고교시절 1년에 100번 이상 산에 다닐 때였고, 두 번째가 설계사무소 일을 한 시기였고, 세 번째가 이후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에 있을 때였다. 설계사무소에서 바쁘게 일을 할 때도 학교에서 교수로 발령 내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65년까지 끝내 안 났다. 절망적이었고, 자존심도 무척 상했다. ‘대한민국에서 못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와중에 두 번째 인생 전환기가 다가왔다. 마침 그 때 영국에서 독립한 자메이카에서 외국인 공무원을 대대적으로 채용하는 공고를 우연히 보게 된다. 또 다른 운명은 이렇게 그와 만난다. 자메이카와 3년 계약으로 그 당시 받고 있던 연봉의 10배 이상 되는 금액을 제시받았다. 집과 차 등 모든 비용까지 부담한다고 했다. 조건도 좋고 “에라, 모르겠다, 가보자”라는 생각으로 자메이카 보건성 위생기술국 차석으로 자메이카로 향했다. 한국의 1인당 GNP가 100달러도 안되던 당시 자메이카는 1,600달러가량 됐다. 영국이 자메이카에 구축해놓은 인프라도 많이 보고 느꼈다. 나중 귀국해서 일 하며 도움도 됐다. 돈도 제법 벌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날 때 몸이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상태가 더 나빠졌다. 3년 계약 마치고 귀국했다. 더 있을 생각이었지만 일단 한국에 가서 다시 생각해보자고 했다.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 그냥 한국에 살기로 결정했다. 그게 69년이다. 짐도 다 가져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까지 짐이 거기 있을지 모르겠다며 씩 웃으며 회고했다.

한국에서도 60년대 후반부터 본격 투자가 이뤄졌다. 토목, 건축에 많은 수요가 생겼다. 일자리 걱정은 없었다. 정부는 한국인 근로자 해외파견을 통한 외화획득을 위해 해외개발공사를 만들었고,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던 설계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한국기술개발공사를 설립한 상태였다. 그의 경기고 동기이자 대학 동기였던 김수근씨가 책임을 맡고 있었다. 김수근씨는 한국 현대건축의 1세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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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근씨는 그에게 “나는 건축을 맡을 테니, 토목을 책임지고 맡아 둘이 한번 해보자”고 제의했다. 자메이카에서의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됐다. 김수근씨는 사장으로, 그는 부사장으로 일을 했다. 토목과 건축이 만났으니, 개발현장에서 못할 일이 더는 없는 듯했다. 경인고속도로를 놓고, 경부고속도로 기초 작업과 초기 주요 항만시설 등 사회기반 시설 확충에 손이 닿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무리한 탓에 김수근씨는 병이 났다. 사장 사표를 냈다. 부사장이 자동 사장 승계했다. 그러나 그는 사장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기술자로서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느껴지던 상황이었다. 사장 후임자를 물색했다. 백선진 장군을 추천했다. 우연인지 포항제철에서 인재를 찾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마침 포철에서 입사 제의가 왔다. 박태준 회장이 직접 전화를 걸었고, 면접도 봤다. 입사하기로 했다. 미국 유학, 자메이카 사회 인프라 경험, 개발공사 부사장 등은 그가 박태준 회장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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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70년 포철로 출근했다. 박태준 회장을 도와 포스코가 세계적인 철강회사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한다. 광양제철소 1단계 작업을 마무리하고, 포항 본 공장 시설을 더욱 확대한다. 박태준 회장이 가는 곳, 지구촌 어디든지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부장, 본부장, 이사, 부사장, 사장, 부회장 등으로 승승장구 했다. 마침내 93년 회장에 취임했다. 재임기간 24년 1개월. 박태준 회장 다음으로 장수했다. 포스코에서 아마 가장 많은 감투를 썼을 것이라고 했다. 박태준 회장은 사장, 회장을 했지만 그는 부장부터 시작했다. 포스코에 있으며 많은 훈장도 받았다. 동탑 산업훈장(76년), 은탑 산업훈장(81년), 금탑 산업훈장(90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상(92년), 대한민국 특허기술대전 금상(98년),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2006년). 이게 그의 인생이다. 누구 못지않은 경력에 훈장도 많이 받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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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의 사회경력이 화려한 만큼 산에 대한 애정도 끊이지 않았다. 중학시절 시작한 등산은 클라이밍 수준으로까지 높였다. 바쁠 때도 틈만 나면 산을 찾았다. 포항 있을 땐 경남북의 산은 거의 전부 찾았고, 광양 있을 땐 지리산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 토요일 저녁 노고단에서 출발해서 일요일 천왕봉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포스코 회장 퇴임 후에 그동안 못 갔던 해외 산을 수차례 다녀왔다. 네팔, 파키스탄, 타미르 등지로 트레킹 했다. 한국산악회 회장도 맡아 96년까지 임기를 채웠다. 한국 산악회 회장 땐 발전기획위원회를 구성하여 산악회 발전을 위한 전기를 마련하고, 재정 자립에 역점을 두기도 했다. 자립만이 산악회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산을 그렇게 좋아할까? 무조건, 그냥 좋다고 했다.

“육체적 운동하면서 느끼는 정신적 성취감과 희열은 다른 어떤 운동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공포감을 느껴야 할 절벽에 매달려 안정감을 느끼며 기쁨을 맛보는 건 다른 운동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마디로 그에겐 산이 모든 것이었다. 여자에게 필(feel)을 받아 그냥 좋아하게 되듯이, 그는 산에 필이 꽂혀 그냥 좋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화려한 사회생활보다 훨씬 더 긴 그의 산사랑은 영원할 것 같아 보였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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