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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보수 송복

한국의 대표적 보수논객

미래인력연구원 송 복 이사장

年 60회 산행…“등산이 학문하는 것과 같아”


한국의 대표적 보수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일까? 몇몇 사람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 인물로 꼽아도 손색없는 사람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끊임없이 정권에 대해 할말을 하고, 비판의 글발을 세웠던 송복(宋復, 71)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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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대남문을 배경으로 문수사에서 한컷.

보수하면 보통 낡고 진부하며 변화를 싫어하는 이념을 떠올리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보수는 사회를 유지하는 힘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누구나 기존 사회 가치와 규범을 익히는 사회화(socialzation)과정을 거친다. 이 사회화를 달리 표현하면 보수화 과정인 것이다. 어렸을 때 익힌 가치와 규범은 10대에 인생의 반항기를 거쳐, 20대에 다양한 학문의 접촉을 통해 이념적 반항기 내지는 혼란기를 겪게 된다. 이 시기를 거친 후 비로소 가치를 정립하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따라서 누구나 처음부터 바로 보수가 되는 건 아니다.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거친 후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이념을 선택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사회에서 보수가 많은 이유도 이런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치기 때문이다. 대개 한 사회나 국가에서 보수는 35%, 좌파는 30%, 중도는 40% 가까이 된다. 중도는 보수적 성향을 띠는 경우가 많다.

송복 교수도 이런 과정을 다 거쳤다. 그가 60년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선택한 직장이 장준하 선생이 사장으로 있던 사상계였다. 사상계는 당시로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반체제, 진보 성향의 잡지였다. 박정희 정권에 비판의 칼날을 매섭게 들이대던 시절이었다. 송 교수가 서울대 정치학과 4년 때인 59년 9월, 사상계에서 전국 대학생 현상논문 모집에 ‘한국 지식인의 사명’이란 논문으로 당선된 인연으로 입사한 것이다. 부상으로 상금 3만환을 받았다. 양복 한 벌이 1만2천환하던 시절이었으니 거금이었다. 그는 졸업 몇 달 전부터 출근하기 시작했다. 군에 가기 전까지 1년 여간 열심히 근무했다. 사상계는 그 자신에게 이념 혼란기의 한 과정이었던 셈이었다.

3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그는 “내가 직접 잡지를 만들어보자”는 호기가 생겼다. 청맥이란 잡지를 창간했다. 편집장까지 맡아 1인3역, 4역까지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적자를 면치 못했다. 3년 만에 접었다. 먹고 살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잡지 기자를 했으니 이번엔 비슷한 일을 하는 신문사 문을 두드렸다. 마침 서울신문에서 잡지기자 경력을 인정해줘 수석기자로 입사할 수 있었다. 3년간 청맥지에 매달려 일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였다. 정치부 등 외근 제의도 있었지만 지식을 ‘좀 더 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내근인 외신부 근무를 자청했다. 외신 기사를 볼수록 미국 유학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학문적 호기심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고 싶은 지적인 욕구와 기자적 본능이 동시에 작용했다. 일단 서울대 신문대학원에 입학했다. 투 잡스(two jobs) 같은 투 웍스(two works)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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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교수가 일자로 호를 지은 산악회 일자패 일행과 대남문 올라가는 길에서 잠시 휴식.

정년퇴직 후 제2 저술활동 펼쳐


인생의 전환기는 누구에게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다. 그도 신문대학원에서 큰 충격과 함께 인생의 일대 변화를 맞게 된다. 신문대학원 교수로 대학 동기가 한명 있었다. 서로 마주치기 어색해 수업도 신청 않고 외면하고 있던 터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길에 누군가 하는 말이 그의 귀에 솔깃하게 들어왔다. “오갑환 교수 강의가 귀가 막히더라”는 거였다. 반신반의 하면서 다음 학기 강의 신청을 했다. 그 첫 시간이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가 막연히 동경해왔던 지식에 대한 열망을 그 강의를 듣는 순간 ‘유학에 대한 집념’으로 연결됐다. 유학 갔다 온 그 친구 교수 강의는 한마디로 지식체계가 다르게 느껴졌고, 바로 뇌리를 자극했다. 바로 돌아와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유학 준비까지 했고, 신문사 일을 하는 1인3역을 했다.

석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드디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동서문화센터 장학금을 지원받았다. 신문사에서 받던 월급의 4배가 더 됐다. 네 식구가 미국에서 풍족하게 생활했다. 유토피아가 따로 없었다. 송 교수에겐 미국이 바로 유토피아였다. 마음먹은 대로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또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번엔 미국 대학 학위다. 73년 귀국했다. 74년까지 신문사에서 근무하다 마침 연세대 사회학과에 자리가 생겨 정착했다. 대학 졸업 후 잡지사 기자, 편집장, 신문사 기자 등을 거쳐 15년 만에 교수라는 자리에 둥지를 턴 것이다. 남들은 그냥 공부만 해서 자리 잡은 교수 자리를 송 교수는 이리저리 둘러왔다. 어쩌면 이 다양한 경험이 그의 교수생활 동안 많은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됐는지 모른다. 그도 실제로 기자생활에 대한 경험이 좋은 밑천이 됐다고 자랑삼아 얘기하곤 한다.

송 교수 개인의 이념적 내홍은 신문사에 근무하던 시절 크게 겪었다. 그는 60년대 국민소득 100달러도 안되는 한국의 기아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처음엔 분배와 평등이 우선시되는 사회주의가 최고의 방법으로 여겨졌다. 신문사 근무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글도 썼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 사회주의에 대한 공부도 계속 했다. 할수록 회의가 들었다. ‘과연 사회주의로 기아를 벗어날 수 있을까’였다. 그의 가치의 결론은 산업화가 민주화의 기초이고, 기아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내렸다. 그의 이념적 혼란에 종지부를 찍는 결론이었다.

그는 이후 보수적 가치에 대해 내공을 쌓아갔다. 그 내공은 좌파라고 평가받는 DJ정부 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신문 칼럼, 저서 등을 통해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협박과 위협도 많았다. 담담히 받아들였다. 반대편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가 좌파만 공격한 건 아니다. 보수라고 평가받는 YS시절에도 가만있지 않았다. YS정권 탄생에 일조했고,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입바른 말을 숨김없이 했다. 회유도 받았고, 장관제의도 받았지만 정부 비판과 견제가 학자의 양심으로 여겨 사양했다. 아마 장관을 했다면 이후 정부 비판에 조금은 거리낌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자유주의 가치 중의 하나인 개인의 자유에 의한 선택으로 송복이라는 인물이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20대부터 등산해라” 학생들에게 가르쳐


한국의 대표 보수 논객이자 학자인 송복 교수는 한마디로 등산 예찬론자다. 讀書人說遊山似(독서인설유산사, 사람들은 독서가 등산과 비슷하다고 설명하는데) 今見遊山似讀書(금견유산사독서, 이제 보니 등산이 독서와 비슷하다). 퇴계 이황의 청량산 유산기에 나오는 독서보다 등산의 가치를 더 평가한 문구를 그대로 인용해서 등산을 극찬했다.

그의 등산은 미국 유학 갔다 온 73년부터 시작됐다. 거의 매주 산에 올랐다. 지금은 연 60회 정도 산에 오르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이상인 셈이다.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 산악회도 조직했다. 그가 일일이 일자(一字)를 넣어 호를 붙여줬다. 그래서 탄생한 산악회가 일자패다. 구범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김성우 한국일보 전 주필, 박화진 서울신문 전 논설위원실장, 한영탁 세계일보 전 논설위원, 정호근 전 국회의원, 김택득 박사, 김재혁 전 삼성 중국 총괄사장 등과 송 교수의 친구인 인치택, 박상봉, 이태근씨 등이 그 멤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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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서예전을 연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일요일 되면 어김없이 산을 찾는다. 그의 철학이다. 그는 등산의 네 조건으로 지(指), 극(克), 정(定), 성(省)을 들었다. 첫째 조건인 지는 등산은 반드시 리더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학문도 마찬가지로 스승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혼자 공부하고 스승에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것이다. 현실과 맥이 닿는 부분이다. 극은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은 원숭이 같고 의식은 말(馬)과 같은 속성이 있어 마음을 붙들어 맬 줄 알아야 한다. 중심을 잡는 그 힘이 바로 극이다. 정은 목표가 뚜렷해야 등산이나 학문이 제대로 된다는 의미다. 학생들에겐 특정학교가 목표로 정해져야 공부에 더욱 매진할 수 있고, 등산도 가려는 산이 정해져야 헤매지 않는다. 성은 동료나 경쟁자, 반려자가 있어야 쉽게 갈 수 있으며, 발전이 있다는 뜻이다.

정년퇴직하기 전까지 학생들을 데리고 산에 자주 갔다. 그들에게 “20대부터 산에 다녀라”, “20대가 안되면 30대부터라도 꼭 다녀라”, “40 넘기 전에는 반드시 산에 다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돼서 돌아온다.”고 학생들을 독려했다. 송 교수는 등산의 힘은 병을 예방할 뿐 아니라 창의적 사고에 엄청난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경제적으로 봐도 생산성이 너무 뛰어난 작업이 등산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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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스승에 길을 묻다에 함께 나온 제자 김호기 교수와 함께.

그의 생활은 주말과 주중이 확연히 다르다. 주중 5일간 있는 힘 다해서 공부한다. 주말엔 머리를 완전히 비우고 산에 간다. 이런 생활을 그는 지금 30여년을 하고 있다. “아마 북한산이 없었다면 책이나 논문도 못 썼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분명 등산예찬론자는 예찬론자다. 그는 산을 이용만 하지 않는다. 산을 이용한 만큼 꼭 시산제와 종산제로서 한해를 마무리하고 감사한다. 이용만 하고, 오만하면 꼭 보복당하는 원리를 산을 통해서 이미 깨치고 있는 그다.

정년퇴직하고 일자패들과 매주 등산하는 재미에 빠진 그는 지금 제2의 인생을 즐기고 있다. 퇴직 때 송 교수는 동료 4명과 결의했다. 노병들이 결코 학교 근처에 얼쩡거리지 말자고.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제자들 강의 시간을 뺐을 이유 없고, 젊은 교수들이 부담 느낄 테고, 노 교수들이 학교 나타나면 스스로 공해라고 생각한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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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이면서 50년 지기 고건 전 총리와 함께.

결의와 동시에 다짐도 있다. 외국 유학 갔다 와 현대학문에 뛰어난 젊은 교수들이 잘 할 수 없는 분야가 무엇일까라고 고민한 끝에 고전을 재해석하기로 했다. 이도 결국 제자들을 더 깊고 넓은 학문으로 이끌기 위한 작업의 일환일 수 있다. 첫 작업의 결실이 지난 2007년 12월에 나왔다. ‘위대한 만남, 서애 유성룡’<지식마당>이다. 유성룡이 7년간 올린 상소 549건을 내용분석해서 임진왜란의 현대적 의미를 해석한 책이다. 80세 될 때까지 우암 송시열과 석파 이하응(대원군)에 대한 책도 내놓을 작정이다.

그 힘의 원천은 물론 산이다. 산에서 받은 원기를 후학들을 위한 지식으로 대물림 하고 있다. 산에서 무한한 에너지를 받아 창의적 사고를 얻고, 엄청난 생산성을 올리는 산이야말로 송 교수에게 없어서는 안 될 보배인 것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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