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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계의 Mr. 쓴소리’ 좌승희 경기개발연구원장

경제계의 Mr. 쓴 소리

좌승희 경기개발연구원장

“등산만큼 만족 ․ 성취감 높은 것도 없어”


“평등주의 과감히 버려야” “차별화 정책 펴야 성장 이뤄” “성공한 사람과 잘 사는 사람이 대접받아야 선진사회 진입” “남들과 다른 게 변화와 혁신의 원동력” “균형발전은 이론적으로 불가능” “국가 균형발전 정책은 국민들 경제 발전의욕 떨어뜨려” “개혁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 “결과의 평등 지향은 열심히 사는 사람을 역차별 하는 것” “시장은 게으른 자를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돕지 않아” “능력과 노력의 차이에 따라 차별과 서열이 생기는 게 세상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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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희 원장이 인터뷰를 마치고 경기개발연구원 바로 뒷산인 청계산 끝자락에 올랐다.

시장경제 전도사에서부터 경제계의 Mr. 쓴 소리, 재벌의 앞잡이, 가진 자만 옹호하는 이론가까지 온갖 호평에 악평까지 동시에 받고 있는 좌승희(左承喜 ․ 62) 경기개발연구원장 겸 서울대 초빙교수가 경제정책에 대해서 던진 화두만 간추렸다. 그가 새 정권이 들어서자 경제발전을 위한 충정어린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시장의 본질은 차별과 차등을 만드는, 대단히 불평등한 장이다. 경제발전을 위해선 시장에서 성공이 많이 나와야 한다. 성공은 집적과 집중이 되어야 가능하다. 자원과 활동의 집중이 바로 발전의 원동력이다.”

이는 슈퍼스타가, 1등 기업이, 1위 대학이 밑으로 내린 시너지를 통해 전체 수준을 끌어올려 발전을 이루고, 동반성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슈퍼스타, 1등 기업은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키울 수 없으며, 어느 날 돌연변이가 갑자기 등장하듯이 불현듯 나타난다. 사회는 돌연변이가 자주, 많이 등장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돌연변이는 금산분리 완화, 출자총액제한 폐지 등과 같은 제도와 대기업 제조업의 수도권 진입 규제완화를 통해 가능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고 소신이다. 지금과 같이 청년실업이 많은 것은 수도권 규제로 인해 대기업 공장 증설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자릴 창출이 안 되니 실업이 늘어나는 건 당연하고, 경제성장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균형발전은 그의 차별화와 성장전략과 반하는 정책이다. 수도권이 발전해야 지방을 더 높은 수준으로 이끌고, 다 같이 더 높은 수준으로 성장한다는 게 그의 논리다. 이에 반해 평등주의는 성장의 가장 저해요소다. 특히 교육 평준화가 가장 문제라고 지적했다. 세계 1위의 대학이 나와야 우리 대학의 전체 수준이 올라가고, 우수한 인재가 나와 국가발전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그가 이같이 시장경제 전도사가 된 배경은 그의 성장과정과 활동경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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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희 원장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도 철저한 자유주의자라고 강조


그의 고향은 제주도다. 어려서부터 드넓은 바다와 우뚝 솟은 한라산을 보면서 자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 품에 떨어져 커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제주도의 유명한 해녀와 결혼했다. 바다가 주는 넓은 포부와 한라산이 주는 드높은 기개를 가지고 태어난 그는 태어난 지 열 달 만에 아버지와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는다. 그가 태어난 바로 이듬 해 제주도 4․3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관련 없었지만 제주도 사람이라는 멍에 하나로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산에서 숨어 지내다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생이별이란 의미도 모르는 갓난 애기 때 이야기다. 어머니는 일본에 있는 아버지와 겨우 연락이 닿아 초등학교 입학 전인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했다. 경찰에 붙잡혔다. 한 달 만에 본국에 송환됐다. 어머니는 다시 아들에게 아버지가 있는 일본으로 가자고 했다. 그는 겁이 나서 못가겠다고 버텼다. 그의 어머니 혼자 건너갔다. 생이별은 이렇게 시작됐다. 가슴 아픈 기억이다.

그는 이때부터 고모 품에서 컸다. 누가 그에게 간섭하는 사람도 없었다. 자신의 행동은 철저하게 자신이 져야 했다.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그에 따른 무한 책임은 스스로 혹독하게 체화됐다. 나중 자유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에 따른 생존경쟁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얻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본인은 철저한 자유주의자라고 강조할 정도다. 고교 졸업 때까지 제주도에서 고모집에 얹혀 생활했다. 서울대에 합격했다. 육지로의 유학생활이 시작됐다. 서울에서의 생활도 그에게는 제주도에서와 별반 차이 없었다. 어차피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쩌면 그의 생존경쟁은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면서 이미 시작됐는지 모른다.

그의 인생의 첫 전기는 대학 2학년 때 조순 교수를 만나면서부터 맞았다. 조순 교수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뉴햄프셔대학에서 조교수로 있다 68년 서울대로 부임했다. 두 사람 인연의 시작이었고, 대학생 좌승희는 유학에 대한 포부를 키운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까지 그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고, 그냥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놀던 학생이었다. 조순 교수의 강의를 듣고,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미국 유학의 기회를 알게 됐다. 졸업 후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근무했지만 77년 미국 유학을 위해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장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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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재벌개혁과 관련해 전문가 좌담을 벌이고 있다. 왼쪽부터 제프리 존스 주한 미상의 명예회장, 서울대 경영학과 조동성 교수, 좌승희 원장.

그가 박사과정으로 선택한 대학은 UCLA였다. 이 대학도 경제학에선 상당히 자유주의적 학풍이었다. 그의 학문적 토대가 된 주류 경제학에 비판적인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경제학을 주로 연구했다. 그의 취향과 딱 들어맞았다. 한편의 짜여진 각본같이 그의 삶이 흘러갔다. 그의 성향과 그의 선택이 순조롭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미네소타 연방준비위(Federal Reserve Bank)에서 2년간 근무하다 85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KDI(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그는 안 해본 분야가 없을 정도로 다방면으로 연구했다. 국제경제, 금융연구, 거시경제, 법경제 세계화 등등 두루 섭렵했다. 재벌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연구하기도 했고, 자유시장적 관점에서도 살펴봤다. 기업들이 그의 연구 성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97년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원장으로 올 것을 제의했다. 못갈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비판적 관점에서 보던 재벌에 대한 시각을 거시적으로 다시 한번 보자는 학문적 호기심도 생겼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재벌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다. 경제는 진화한다. 재벌도 하루아침에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고 내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유 경쟁을 통해 이긴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그의 성향과도 맞았다. 요즘말로 비즈니스 프랜들리(친기업적) 연구결과를 잇달아 내놨다. 규제와 평균화 등 반기업적 정책에 대해 여지없이 비판을 가했다. 지난 노무현 정권에서 눈엣가시같이 보였다. 전경련이지만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노무현 정권에 지나치게 비판적인 그를 거북해 했다. 마침 그 때 경기개발원에서 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왔다. 그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게 지난 2006년 때의 일이다. 경기개발원 8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정권이 바뀌자 내심 경제회복과 일자리 창출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지난 10년간은 성장의 동력인 집적과 집중의 해체과정이었다고 혹평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은 차별화를 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평등주의로 일관했다. 노 전 대통령이 가진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노력한 결과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로, 가난하고 못 사는 계층을 잘 설득했으면 국민들에게 훨씬 더 어필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좌 원장이 볼 때 차별화의 적임자였던 셈이다. 열심히 해서 대접 못 받으면 열심히 안하고, 열심히 안 해도 대접받으면 마찬가지로 열심히 안 한다. 오직 하나 열심히 하는 사람을 대접하면 그게 바로 성장 동력이고 차별화 전략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발전하려면 모든 사람이 변화해야 한다. 변화는 차이를 말하고,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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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연구원과 국제통화기금이 공동 개최한 ‘IMF 정책 평가’ 국제 세미나에서 참석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맨오른쪽이 좌 원장.

또한 앞서가는 사람 많이 나와야 발전이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앞서가는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한다. 그래야 시너지가 밑으로 내려간다. 이게 우리가 이미 경험한 1+1=2+∝이고, 하면 된다는 정신(Can do spirit)이다.

마지막으로 성공한 사람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야한다. 이러한 정책과 동시에 수도권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 청년 실업 문제도 자연 해결되고, 성장률도 덩달아 올라간다는 논리다. 그의 머리 속엔 이와 같이 이미 발전 전략이 내재돼 있다. 기회만 오기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내공을 쌓고 있다. 그의 말대로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는 자세다.


등산 전 스트레스, 내려올 때 희열로 바뀌어


그는 인생을 산에 비유했다. 등산만큼 성취감과 만족감을 크게 주는 것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등산 출발하기 전에 한번도 스트레스를 받아보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일어나기 싫고, 가기 싫고 해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나 정상까지 올라간 후 내려올 때의 성취감과 만족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컸다. 인생도 무슨 일을 할 때 힘들고 하기 싫지만 막상 그 일을 끝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 것과 비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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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자유지식인선언 포럼에 참석해 주제발표를 한 좌 원장.

그가 산을 다니기 시작한 건 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스승 조순 전 총리와 거의 매주 등산했다. 그만큼 조순 전 총리는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다. 조순 전 총리도 그를 그만큼 아꼈다. 두 사람은 거의 10년 가까이 매주 산에 올랐다. 수도권 산은 거의 안 가본 산이 없을 정도다. 올라갈 때 힘들었지만 내려올 때를 생각해보면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는 게 등산이다.

그러나 지금은 산행 친구도 없다. 스승 조순 전 총리는 너무 연로해서 등산보다는 걷기를 주로 하고 있다. 또 하나, 그에게 시간이 너무 없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그를 놓아주지를 않는다. 책과 영문 논문 포함 그의 저작물이 100권이 훨씬 넘는다. 그의 자유주의적인 사고는 그 스스로에 대한 무한 책임의 전화된 형태인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나타났다. 지금은 사실 산에 대한 열정은 조금 식었다. 힘닿는 데까지 학문에 대한 성취와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기여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의 꿈은 제주도 바다만큼 넓고, 한라산만큼이나 높다.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경제학을 국제경제학회에 꼭 인정받다 큰 족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그는 느끼지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산이 주는 큰 포부를 그의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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