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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박원순 변호사의 인생과 산 - 마운틴
박원순 변호사의 인생과 산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꿈꾸는 사람. 아니 이 사회를 새롭고 아름답게 디자인하기 위해 스스로 사회 디자이너(social designer)라고 명함에 새긴 사람. 이미지상으론 부드러운 것 같지만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인 사람. 그의 원래 직업은 변호사. 그러나 세속적으로 변호사가 주는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이다. 명함에도 변호사란 직함은 아예 없다. 큼지막하게 사회 디자이너라고 새겨져 있을 뿐이다.

다 아는 얘기지만 아름다운 재단을 만들어 우리 사회 기부문화 확산에 앞장서는 사람. 쓰지 않는 헌 물건, 내게 필요 없는 옷들을 깔끔하게 수선해 아름다운 가게를 열어 재활용문화를 선도하는 사람. 그 수익금은 전액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하는 사람. 아름다움을 넘어 이젠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희망을 불어넣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희망제작소(makehope)를 차린 사람. 다르게 이야기하면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 오늘 주인공이다.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가 이렇게 많다. 그가 바로 우리 사회 인권을 위해서 불철주야 고민하고 움직이는 박원순 변호사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흔히들 말하는 진보주의자다.

아름다운재단 팀장 16명과 함께 북한산 입구 구기동 이북5도청에서 그를 만나 비봉~사모바위~청수동암문~대남문~북한산관리사무소 구기분소로 해서 4시간 남짓 등산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내려와서 식사한 것까지 포함하면 6시간 남짓 된다. 그와 한 끼 식사하는 경매가격이 38만원에 낙찰됐다고 하니 무려 몇 백 만원을 번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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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에서

그를 진보주의라고 칭하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기준에 대해서 물어봤다.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분류 기준은 너무 모호하고 체계도 잡혀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설득력도 없다. 예를 들자면, 인권과 국가안보는 국가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있어야 하는 보편적 가치인데 북한 인권을 얘기하면 보수고, 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면 진보인가? 진보주의자도 북한인권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보수주의자도 보안법에 관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유연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금기가 많고 성장에도 한계가 있다. 차라리 미국과 같이 정책으로 성향을 나타내는 기준이 있다면 그 기준을 따르는 게 더 적합하다.”

그런데 그가 왜 우리사회의 진보주의자가 됐을까? 그것도 검사 출신이.

그의 학생․청년시절 역정(歷程)을 보면 대충 감이 올 것 같다. 그는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공부는 무척 잘 했다. 꿈 많은 소년이었지만 그 꿈을 실현시키기엔 주변 환경이 열악했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학비가 전혀 들지 않는 철도고등학교에 가기를 원했다. 만약 그가 당시 철도고교를 갔다면 지금 뭐하고 있을까? 역무원 모자를 쓰고 있을 박원순을 상상만 하더라고 웃음이 씩 나온다. 글 첫 부분에 언급한 그 많은 수식어도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 순간의 선택에 형님이 있었다. 형님은 그의 자질을 아까워했다. 인문계 고교로 진학했다.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에 입학했다. 공부 잘하는 자식이 역시 효자라고 시골에서는 잔칫날이 됐다.

당시는 학생 데모가 한창이었던 유신시절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너는 공부만 해야 한다. 세 사람 이상 모이는 자리엔 절대로 가지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도 부모님 말씀 잘 듣는 모범생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만 했다. 운동이 뭔지도 몰랐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박원순은 고함소리에 밖을 보니 집회를 가졌던 학생들이 경찰에 구타당하고 있었다. “아니, 이럴수가!” 창녕 촌놈의 의협심에 불이 당겨졌다. 바로 일어나 현장에 나가 경찰을 향해 고함을 쳤다. 딱 한번 세 사람이상 모이는 자리에 간 것이었다. 그것도 모임에 간 것이 아니라 집회후의 흩어진 자리에. 그걸로 그는 긴급조치 9호로 제적당하고 교도소에서 몇 개월 보냈다. 지금 그는 농담 삼아 “부모님 말씀 안 들어서 좋을 게 하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교도소에서도 독특한 경험을 했다. 이제 세상에 뛰어든 촌놈의 눈에는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 모두 아무 죄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그 구속사건이 내 인생의 여러 부분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고 그는 여유 있게 말했다. 그의 따뜻하고 순진한 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결심했다. 내가 검사가 돼서 이런 사람이 교도소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몇 년 지나지 않은 80년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원하던 검사가 됐다.

산을 내려오면서 왜 검사를 그만두었냐고 물어봤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나에겐 검사들이 마시는 폭탄주가 사약 같았다. 지금은 그래도 뇌관이 양주고, 나머진 맥주였지만, 당시엔 입구 넓은 물 컵에 양주만 가득 따라 마시는 게 폭탄주였다. 난 한두 잔만 마시고 바로 뻗었다. 끝날 때 깨워서 겨우 집에 가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내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돈도 많이 벌었다. 어느 날 갑자기 미련 없이 공부하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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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이사이 상을 받았을 때.

영국 런던대 정경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게 91년도였다. 곧바로 92년에 미국 하버드법대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그는 그 이후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문구를 만난다.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가장 아름다운 영어’(the most beautiful english sentence)란 제목 밑에 기부란 의미의 ‘수표 동봉’(the check enclosure)이란 말을 보는 순간 ‘그래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거다. 시쳇말로 완전 필이 꽂혔다. 여기서 그는 ‘아름다운’이란 말을 벤치마킹해서 아름다운 재단, 가게를 만들었다.

아름다운 가게를 만들기 전 일화 한 가지.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 오너인 친구에게 재활용 사업을 하려고 하니 지원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업성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더란다. ‘되는지 안 되는지 외국 나가서 더 보고 올 테니 여비만 지원하라’고 재요청했다. 돈을 받아 17명을 데리고 미국 곳곳을 훑고 다녔다. 돌아와서 바로 아름다운 가게를 열었다. 벤치마킹의 대상이 된 미국 자선 기부단체는 바로 굿윌(Goodwill)이다. 영국의 세계적인 자선단체 옥스팜(Oxfam, 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도 모델로 삼았다. 이 두 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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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재단 팀장과 가게 직원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지금은 아름다운 가게가 얼마나 성공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영국의 옥스팜에서 직원을 파견할 정도가 됐다. 일본에선 ‘아름다운 가게’를 본떠 ‘에코 메세’라는 재활용업체를 세우기도 했다. 그는 우리 사회에 기부문화를 확산시킨 공로(공공봉사부문)를 인정받아 2006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그 해 한국에서도 실천부문 만해대상을 받았다.

한때 그는 운영이 잘 안될 때 “내가 그냥 변호사하면서 돈 벌어 사업체를 운영하며 이웃을 도와주는 게 훨씬 빠르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고도 했다.

무엇이 그를 이처럼 가만두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는 관심을 두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다. 그의 일정은 30분 내지 1시간 단위로 짜여져 있다. 어떤 사람은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자리를 옮기는 틈새에 그와 독대를 노린다고 한다.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럴 필요 없이 그가 좋아하는 산에 같이 가면 간단히 해결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6시간이나 북한산에 같이 있었는데….

그는 이 모든 원동력이 상상력이라고 했다. 상상력의 원천은 세상을 많이 보고 느껴야 생긴다고 강조했다. 이 상상력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그러면 무한한 생각을 하게끔 하고 사색하게 만드는 산은 어떠냐고 질문을 던졌다.

“산은 혼자 가지 않는다. 산은 화합을 다지는데 좋은 역할을 한다. 산은 마치 마약과도 같다. 올라갈 땐 가기 싫고 왜 왔느냐는 생각이 들지만 한참 걷다보면 잘 왔다는 생각과 하산했을 때 몸의 상쾌함을 다시 잊을 수 없어 계속 찾게 되는 것 같다.”

누구는 인수뽕이 히로뽕이라고 하던데….

매년 수차례 지리산에 가며 연말이면 지리산 일출을 보러 떠난다. 작년에만 북한산에서 잠시 일출을 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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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에서 아름다운 재단 팀장들과 함께 했다.

"91년쯤 지리산 첫 종주를 했는데 너무 고생했다. 와이프는 임신 7개월이었는데 많이 걸어서 발톱 몇 개를 뽑을 정도였다. 앞서 가던 일행이 전혀 배려않고 강행군한 탓이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았지만 아직도 찾고 있지 않은가.”

그는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트레스 받기 전에 스트레스를 없앨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쏟아낸다. 지역발전, 교육개선, 사업 추진 등에 대해서 고민한다. 출범한지 1년밖에 안된 희망제작소가 벌써 일본에 사무소를 열었다. 첫 해외사무소다. 현지 후원회 결성과 일반인 소액기부자도 모집한다. 장기적으로 런던, 뉴욕, 워싱턴 등 세계 곳곳에 두뇌 연구소도 설립할 계획이다.

국내에선 연말까지 소규모 기업 사회연대운동도 펼치겠단다. 장기적 과제로 1인 1기업운동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와 엮이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엮고 묶는 데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다. 한국인의 세계인화 작업의 일환인가?

그의 최종 목표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게 꿈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그는 산을 좋아한다. 그를 통해 결론이 나온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1 Comment

  1. 쏠비치

    02.25,2009 at 6:39 오후

    좋은글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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