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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유교에 밀려 절이 산으로 갔다고? - 마운틴
유교에 밀려 절이 산으로 갔다고?

절이 왜 산으로 갔을까? 아니 왜 산에 있을까?

누구나한 번쯤 가졌을 법한 의문이다. 으레’산에 있으니까 있겠지’ 라고하면글도 여기서 끝이다.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안 읽어도 된다. 난 궁금해서 쓴다.

흔히 사람들은 조선시대 유교 이념에 밀려 고려시대 절정을 이뤘던 절들이 일제히 산으로 올라갔다고 말한다.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반도 안맞는 지적이다. 그럼 언제, 왜 산에 있게 됐나?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건 삼국시대 초기인 3~4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일제히 불교가 들어온다. 국가 설립 초기라 통치이념이 필요했던 지도자들은 불교의 의식을 통치이념으로받아들였다. 들어오자 마자 바로 꽃을 피운 셈이다.

수리사.JPG

신라시대 창건된 수리산의 수리사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올당시엔 절이 산과 사람이 몰려 사는 곳 구분없이 자리잡았던 것같다. 사실 지금 한반도는 근대와 현대이후 그렇게 개발하고도산지가약 70% 가량 차지하고 있다.전혀 개발되지 않았던 3~4세기 경엔90% 가까이 산지였을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90%가 산이라도사람이 다 살 수 있는 지역은 아니다.강과 하천 등 사람이 살 수 없는 곳도 빼야 한다. 그러면 실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불과 1~2%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좁은 주거지역에 사실 산과 주거지역을 따로 구분하기란쉽지 않다.일찌감치 주거지역에 자리잡은 절은계속 있었고, 나머지는 산으로 갈 수 밖에없었을 것이다. 절이 산에 있을 수 밖에없는 첫째 이유다.

다음으로 유명 사찰의 건립연도와 누가 건립했느냐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직전자장율사의 사례를 보자. 자장 율사는 신라 불국토사상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불국토사상을 주장하면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절을 창건한다.그가 만든 절은 한국의 대표적인 사찰들이다. 오대산 월정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소백산 부석사, 지리산 단속사 화엄사 실상사 쌍계사, 속리산 법주사, 모악산 금산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대건사, 금정산 범어사, 팔공산 동화사, 강릉 사굴산의 굴산사, 영월 백덕산의 흥녕사, 문경 희양산의 봉암사, 금강산의 유점사 등 지금도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사찰들은 자장율사에 의해 일찌감치 산에 터전을 잡았다. 조선시대훨씬 전부터 산에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다.산에 절이 뿌리를 내리며 오히려 산길이 개발되는 영향까지 가져왔다. 절에 가기 위해 산길을 닦고, 주변에 사람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한 산사에 터전을 잡은 절의 스님들은수도생활에 더욱 정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참선을 주로 하는 종파에서는 산사만한 수도처가 어디 또 있었겠나. 한때 ‘산에 간다’고 하면 머리 깎고 중이 되는 걸로 받아들인 적도 있었다. 지금은 원체 등산인구가 많아져 ‘산에 간다’고 하면 으레 등산가는 줄 알지만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산에 간다는 말은 ‘중이 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했다. 조용한 산사에서의 수도. 속세에 찌든 인간이 한번쯤은 생각해봄직한 그림이지 않을까 싶다.여하튼 시끌벅쩍한 곳보다는 산에서 수도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절이 산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조선시대 유교에 밀려 산으로 간 절들도 일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원래 산에 절이 더 많았다는 이유를 시대적으로, 지리적으로,종교적으로 알 수 있는것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20 Comments

  1. 오 두

    03.26,2009 at 2:08 오전

    주거문제가 아니다. 불교 이전의 산신신앙과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약하다. 신선은 산이며 불승은 그 영향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칠성당, 산신각에 이어 지어진 불사는 산일 수 밖에 없었다. 한국 불교는 산신신앙과 융합(Syncritism)되어 출발했다.    

  2. 권영호

    03.26,2009 at 8:34 오전

    예를 들은 사찰들이 지장율사에 의해 더를 잡았다고 전해져 온다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인지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전국 절 어디를 가더라도 원효대사니 의상대사니 하고 나오는데 다 정확하지 않을겁니다.   

  3. 박정원

    03.26,2009 at 9:37 오전

    한국의 산신에 대해서 다음에 한번 쓸게요. 권영호님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자장율사나 원효대사가 평생 절 짓느라고 전국을 누비지는 않았을 터인데, 한국에 절엔 전부 자장율사나 원효대사 등 유명 스님들만 등장하고 있죠. 저 짐작으로는 절을 짓고 난 뒤 유명한 스님들의 이름을 그냥 빌렸지 않았나 합니다. 이름 빌려준 스님도 별로 나쁠 게 없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그 부분이 궁금합니다.    

  4. 홍우진

    03.26,2009 at 12: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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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하정훈

    03.26,2009 at 1:30 오후

    예를 들면, 이런 가정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삼국시대에 절집이 100개 있었고, 그중 90개는 사람이 사는 마을에, 나머지 10개는 산에….그러던 것이 조선을 거치면서 90개 있던게 1~2개만 남았다. 그러나 산에 있던 10개 중에는 9개가 남았다.
    만약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면, 유교에 밀려 절집이 산으로 갔다는게 7~80% 정답에 가까운게 아닐까요?
    유교에 밀려 산으로 갔다는 말이, 원래 산에는 절집이 없었는데 유교 때문에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의미하지는 않지요. 유교때문에 마을에는 절집이 들어서는게 어려워졌다, 새로 짓는 절은 산에 지어야만 했다…이정도를 의미하는게 아닐가요?   

  6. 하정훈

    03.26,2009 at 2:44 오후

    몰라서 물어봅니다만….트랙백이 왜 안되는거죠? 제 블로그에 물어봐야 되는건가…트랙백이란 말…무지 어렵슴다…   

  7. 저 하늘아래

    03.26,2009 at 2:58 오후

    절이 산으로 간게 아니라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산에 있는 절만 살아남은거지요!   

  8. 박정원

    03.26,2009 at 2:59 오후

    하정훈님의 가정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부분의 유명 사찰들이 조선시대 이전 원래 산에 자리를 잡았던 절들입니다. 당시 평지나 마을에 있었던 절이 없어진 경우는 황룡사 등과 같이 불과 몇개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조선시대에 불교가 그렇게 박해를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엔 왕궁내에 내불당이라고 해서 법당을 두기도 했습니다.
    트랙백 안되는 이유는 운영자에게 물어보시고,,, 여하튼 좋은 지적 남겨줘서 감사합니다.    

  9. 서민영

    03.26,2009 at 6:24 오후

    오두/권영호님 의견에공감합니다 가야까지포함한 사국시대의 초기, 왕권이 지방토호세력에 눌릴때 토호세력의 종교인 선교를 누를 수입종교인 불교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선교도량(성황당/소도 등)이 있던 명당(?)에 사찰을 건립하고 그일을 자장같은 불교의 국승이 앞장섰다고 봅니다 현대에도 자장이 세웠다는 그절들을 돌아보면 천혜의 요지이자 오지도 있는데 그옛날에 어떻게 답사를해서 자리를 잡았겠습니까? 지금도 성황당이 있던 터는 홍수 등의 재해에서 안전한 편입니다 수천년 이땅에 살던 사람들이 믿던 종교의 도량이 있던 자리르 뺏아 절을 세워 왕권 강화와 함께 토호들의 반발 무마와 민초들의 신앙을 유지 시키는 무마책으로 산신각이나 칠성각을 지어준거라 봅니다
    결국 명산대철 터는 먼 조상들이 믿던 선교(仙敎)의 도량이 있던 자리였고 그래서 절은 산에 있는거겠죠
    발해 신라시대의 절이나 고려때의 절은 왕궁 옆이나 시가지에 지어졌었으나 조선 때는 폐찰되거나 서원으로 빼앗겨서 결국 남은건 산사 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10. 山 江村

    03.26,2009 at 9:19 오후

    불교를 지금의 잣대로 보아선 안됩니다.물론 유교의 영향이 있었습니다만 . 불교는 지금과 같은 믿음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스님들은 지금 처럼 먹고 살기 위해 출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대부분이 상류층이나 귀족들이었습니다. 먹고 살고 남아서 세상에대한 궁금증을 풀기위한 방법이 유일하게 불법 공부 였습니다. 그 공부의 도량이 산속에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우리불교는 선불교인데 禪이란 고요함을 말합니다. 산속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됩니다.그리고 수행에서 얻은 법으로 불쌍한 국민들을 구제하고 자기 스스로 부처가 되려고 했지요. 한국은 불교가 오기전에는 토속적인 어떤 우상이나 신을 믿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이였습니다.
    종교라는 말도 일제이후에 들어온 말입니다. 으뜸되는 가르침이라는 말인데 실제 으뜸되는 가르침은 불가에서는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엔 답이 없습니다. 답이 없으니 답을 찾아나선 것이 불가입니다. 그러다보니 답을 찾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자유 평등 평화를 내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견성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상인데 이것이 내려오면서 퇴색되고 지금처럼 인간들이 조직을 만들고 단체를 만들어서 우상과 신을 믿는 과거의 종교로 도로 돌아간 것이 지금의 불교입니다.예전에는 대부분 절에서 촌락으로 내려와서 법보시를 했습니다 .
    그리고 불교는 아직도 믿음을 강조하거나 남의 종교를 부정하지 않는 유일한 종교입니다.그리고 종교의 진정한 자유는 어느 종교나 마음먹은데로 왔다갔다 할 수 있어야 종교의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한군데에 빠지면 다른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진리도 부처도 법도 모두가 변합니다.진리가 유일하고 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늙어 죽지 않고 유일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생물이 태어난 후 아직도 그런 일은 전무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유불선 사상은 정말 우리 한국인의 유전인자에 심어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상들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승승 장구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유전인자가 있는 이유입니다.이것을 미래에도 어떻게 잘 활용하는냐가 우리들의 미래를 좌우할 것입니다.   

  11. 김현채

    03.26,2009 at 9:31 오후

    그게 아니고 고려시대 풍수지리가 발달해서 터가 쎈 곳엔 불상을 짓고 터가 약한 곳엔 절을 짓고 탑도 그런 의도로 지어 진 것이다~~자연과 더불어 백성을 좀 더 평화롭게 잘 다스리려는 의도였다~~   

  12. 박미자

    03.26,2009 at 9:57 오후

    위에 산진설명중 수리산 수리사라고 돼 있는데 정확한 명칭은 견불산 수리사가 맞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다해서 볼견자를 써서 견불산으로 불리웠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로 전 견불산 및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으며 지금도 친정이 그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리산으로 알고 있지만 견불산으로 불리워 져야 할거 같네요~~   

  13. 돌멩이

    03.27,2009 at 5:02 오전

    오두씨의 산신신앙에 관해서: 글쎄요 제 소견으론.닭과 달걀의 문제가 아닐까요? 절을 "거의" 불가피하게 산에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 기존의 산신(산에서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 터를 잡은)신앙을 끌어안고(불교의 위계질서의 하위개념으로… 마치 사대천황처럼…) 갈 수 밖에 없는 처지가 아니었을까요?    

  14. 황학

    03.27,2009 at 5:20 오전

    삼신이 산에 있었고 특히 환인,환웅,단군 그림은 모두 산과 호랑이를 담고 있다. 즉 신선도와 관련이 있고 무술과 관련이 있다. 즉 산사란 불교를 숭배하던 곳이 아니라 삼신을 숭배하고 무술을 단련하며 호연지기를 양성하면서 호국군이 주둔하던 군부대이다    

  15. 한상면

    07.22,2010 at 11:21 오후

    유교에 밀려 산으로 간것도 맞죠 , 삼황신의 자리를 불교가 차지한것도 맞고요, 우리 선지자들이 그때의 현상에서 좀더 지적이고 교육적이며 또 통치이념에 부합한 종교를 택해 간것이라보죠, 우리 선지자들은 종교도 필요한 대로 체질속에 넣는 것 같습니다. 속된말로 스님들께서 서로 말씀하시길 ‘중을 누가 말려’라고 하십니다. 밀려서 가실 분들이 아닙니다. 대중들이 많이 바뀐 것이지요 지금 불교 유교가 기독교가 탄압해서 밀려서 기독교가 인구가 2천만입니까 우리 님들 종교 확확바꾸는 것은 지구상 거의 유일한 대단한 종족입니다. 그러나 조상은 바로 알고 살았으면 합니다.    

  16. 김양운

    01.08,2011 at 9:23 오후

    원래 민간에 절이 많았습니다. 이는 신라의 서울 경주의 옛지도를 봄변 압니다… 거의 지금의 교회 수준으로 있었죠… 이런것은 좀만 들여다 보고.. 혹은… tv만 봐도 아는 것인데… 추측을 해서 쓰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명산에 절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이는 수도정진을 위해 세워진것이죠… 지금은 각 도시에 절들이 대부분 없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는 현실만 보는 것이죠..

    간단히 말해.. 지금 봉은사처럼.. 도심안에 절이 차고 넘쳤다가…
    조선시대 박해를 받고 사라지고…
    산에 있는 절만 남은 것입니다….
    이는.. 정설입니다…   

  17. 카레

    09.02,2011 at 4:52 오후

    이게 또 설왕설래의 꺼리가 되는군요. 유명 사찰을 비룻해 현재 절의 대부분은 산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변화가 있겠죠. 유명사찰은 그대로 산 속에 있고 도심내에 새로운 형태의 사찰이나 선수행, 기도, 공부를 위한 도량이 지어지고 그게 하나의 추세가 되겠죠.    

  18. 김준

    11.25,2011 at 1:06 오후

    조상님들 제사 지내기 싫어서 화-악 종교도 바꾸는 이현실….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19. 엄지와 검지

    12.13,2012 at 12:50 오전

    도를 닦는데는 역시 조용해야하고 그래서 산으로 들어간 것 아닐까요?

    경치가 종은 곳은 다 절이잖아요   

  20. 山 江村

    12.24,2012 at 12:31 오후

    물론 불교가 있기전 풍수지리설이 선불교와 합해져서 산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조선시대엔 중들이 500년간 성내에 내려 오지를 못했습니다.고려말의 승려들이 정치에 참여한 죄값입니다.지금처럼 중들이 성내에 내려온 것은 대원군의 허락이 있었습니다. 아이니컬 하게도 일본의 일연승들이 대원군에게 로비를 했다는 것입니다.로비라고 하면 뇌물이 아니라 설득을 시킨 것이지요.일본은 유불선 모두 허락을 해도 이렇게 발달을 한다. 그러니 조선도 중들을 산속에 가두지만 말고 활용을 하라는 것이었답니다.물론 이것은 일연종을 조선에서 선점을 하기위한 로비였습니다. 그 일연종의 신도들 모임이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많은 창가학회 즉 SGI 쇼까 인터네셔럴이지요.일본의 공명당이 정치 모임이었구요. 지금은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손을 뗐답니다. 어떤 종교던지 정치에 관심을 보이면 종교의 임무는 사라졌다고 보면 됩니다.현실 참여 아니냐고 변명하는 종교인들은 모두 날라리 들이지요. 정치는 정치인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단체와 조직을 위한 압력일 뿐 종교의 근본교리와는 멀기에 정치에 기웃거리는 종교인들은 무조건 배척해야 하는 이유입니다.중세 암흑기에 이런일이 있어 엄청나게 많은 인명들을 헤쳤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헌법은 정교 분리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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