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WP_Widget에서 호출한 생성자 함수는 4.3.0 버전부터 폐지예정입니다. 대신
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현신규 박사, 산림학계와 과학계 명예전당에 동시에 오른 유일한 인물 - 마운틴
현신규 박사, 산림학계와 과학계 명예전당에 동시에 오른 유일한 인물

임학계와 과학계의 명예전당에 동시에 오른 유일한 인물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임목육종학자인 현신규 박사다.

4월 5일 식목의 날을 맞아 숲의 명예전당에 오른위대한 인물 중 두 번째로 현사시나무를 만든 세계적인 임목육종학자인 현신규 박사의 업적과 활동을 보자. 현신규 박사는 특히 임학계뿐만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명예의 전당에 동시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산림업계의 명예전당에 대해선 Carl Ferris Miller 즉 민병갈 원장에 대해 언급할 때 이미 설명했다.

과학기술부에서도 지난 2002년 전국의 대학교와 연구소로부터 추천을 받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우리나라를 빛낸 대표 과학자 14명을 선발했다. 고려시대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 조선시대 자동물시계를 발명한 장영실, 한의학의 전통을 세운 허준,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 등이 해방 이전의 역사에서 뽑혔다. 대한민국 출범이후 생명과학 분야엔 씨 없는 수박을 국내에 소개한 우장춘 박사, 유행성 출혈열의 병원균을 찾아낸 이호왕 박사, 그리고 현신규 박사였다.현 박사는 농업분야에서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과학계와 임학계 동시에 명예에 전당에 오른인물이었다.또한 현 박사의 아들인 서울대 농생대 현정오 교수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부를 하고 있다.

245R.jpg

현신규 박사의 살아 생전 포근했던모습. 현 박사는 임학계와 과학계 명예전당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향산 현신규 박사(1912~1986)의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생장과 재질이 우수한 리기테다 소나무를 육성 보급하고, 외국의 개량 포퓰러 330여종을 도입 시험해서 목재자원 보급에 공로를 인정받아 62년 문화훈장 국민장, 64년 3.1문화상, 78년 5.16민족상 학술부문 수상, 8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했다. 또한 산림청 초대 청장을 지냈으며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이 땅에서 산림녹화사업에 매진했다.

연구실에서_조직배양묘를_보시며.jpg

연구실에서 조직배양묘를 관찰하시는 현 박사.

그의 어릴 적 꿈은 철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왜소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는 일찍이 일본 유학 갔다 온 형에게 큰 감동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형은 일본 릿꾜(立敎) 대학 철학과에 다니며, 문학과 운동에까지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내성적이었던 동생은 형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철학과 문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도 마찬가지로 일본에 유학 가서 철학자가 되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휘문고보 졸업 즈음에 일본의 야마구찌(山口) 관립 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고,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도 허락을 받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전혀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가세가 기울어 일본 유학을 보낼 수 없다고 했다. 대신 총독부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전문학교로 변질된 수원 고등농림학교에 입학하라고 했다. 그가 여태까지 키워온 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갈들을 겪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입학하기로 했다. 그의 성적은 우수했다. 휘문고보 졸업성적은 78명의 졸업생 중에 거의 수석에 가까웠을 정도였다고 그의 아들 현정오 서울대 농생대 교수와 주변인들은 전했다.

1930년 쉽게 입학했다. 수원고농에 들어갔지만 제대로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꿈을 저버린 데 대한 갈등으로 거의 1년 가까이 허송세월을 보냈다.

식목행사_박대통령과함께.jpg

직접 식목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인생에 전기가 되는 책을 접하게 된다. 그 책은 일본의 유명한 사상가이면서 종교가였던 ‘우찌무라 전집’이다. 그는 책을 읽다 ‘어떻게 하면 나의 천직을 알 수 있을까?’라는 구절을 접하게 된다. ‘누구든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고, 그 사명대로 사는 길은 지금 자기가 처해있는 자리에서최선을 다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다.마음의 큰 동요가 일었고, 동시에감동를 받고 임업에 전념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는 그 정도로 자신에게 성실한 사람이었다. 이후부터 수림식물과 조림에 특히 관심을 갖고 매진했다.

식목행사.jpg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식목을 하며 설명을 하고 있는 현 박사.

우찌무라 전집이 그의 인생에 외적인 전환을 주었다면 수원고농 다니면서 만난 정희섭은 현 박사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조림학자로 성장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다. 1933년 졸업 무렵 정희섭은 “내가 학비를 대줄테니 임업 시험장에 취직하지 말고 일본 대학으로 진학하라”고 적극 권했다. 그러지 않아도 취직보다는 연구직을 마음에 두고 있던 터라 귀가 솔깃했다.

현사시조림지에서_박대통령과.jpg

현사시나무 조림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정희섭의 제안을 받아들여 33년 졸업하자마자 바로 일본 구주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36년 3월 구주대학 졸업 후 바로 귀국해서 청량리에 있는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 취직했다. 이 곳은 당시 국내 유일의 임업관련 연구기관이었다.39년 임업시험장장 자격으로 백두산 자원조사대를 구성했다. 산림, 농무, 축산, 지하자원 등을 탐사할 목적으로 지질, 광물, 기상, 동물학자 등 50여명의 학자들이 함께 갔다. 그 자원조사 업적이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백두산 생태조사에 관한 논문으로 발표됐다. 아쉽지만 일본 식물학회지에 발표됐다.나라 잃은 설움을 또 한번 더 겪었다.

미국에서_연구하실_때.jpg

젊은 시절 미국에서 공부할 때 연구실에서.

미농무성에서_연구성과에_대한_감사장을_받는_장면.jpg

미 농무성에서 연구성과에 대한 업적으로 감사장을 받는 장면.

그의 끊임없는 학문에 대한 갈증으로 다시 구주대학 박사과정에 들어갔다.박사공부를 하면서 해방 후 그가 능력을 발휘할 임목육종에 안목을 더 높였다. 임업분야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원고농에서 조교수로 있으며 해방을 맞은 그는 미군정청의 재건복구계획에 따라 유진오 박사 등과 함께 선진 학문의 견학을 위해 미국에 유학갔다.콜럼비아 대학에서 법학공부를 하고 있던 그의 동생을 4년 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기회를 갖기도했다.

그의 동생은 나중에 한국인 최초로 연방법원 판사가 된다. 그가 미국 캘리포니아 산림유전연구소에 있을 때 세계 각국의 소나무들이 서로 교배하여 만든 우수한 잡종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는 모습을 보고, ‘이게 바로 내 할일이다’고 느꼈다. 이후 숙명적인 과제를 붙잡은 곳이 미국 산림유전연구소이며, ‘이곳이 내 학문의 성지‘라고 각오하는 장소가 됐다.

미의회보고서.jpg

현 박사의 업적을 치하한 미의회 보고서.

그는 53년 리기테다 소나무 종자 수백 개를 얻어 한국으로 귀국했다. 현대판 문익점 이었다. 리기다 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장점이 있는 반면, 구불구불한가지와 송진이많고 재질도 좋지 않고생장속도가 느린 것이 단점으로 지적됐다. 테다소나무는 곧게 자라며 재질이 좋고 생장속도가 빠른 장점을 지녔다. 단점은 추위에 약하고 비옥한 땅에서만 자라는 것이 흠이었다.

임목육종연구실전경.jpg

서울농대 전신인 수원고농임목육종 연구실 모습.

현 박사는 이 둘을 교배했다. 생장이 우수하고, 곧게 자라며, 추위에 강하고,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기적의 소나무인 리기테다 소나무를 탄생시켰다. 이 나무는 유럽의 잡종낙엽송과 에테뉴 라디아타소나무에 이어 교잡육종에 성공한 세계에서 세 번째 사례로 꼽혀 국제적으로 소개됐다.아직도 미국의 주요 임업 교과서엔 현 박사의 업적과 리기테다 소나무 사진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이태리에서_이태리포플러식재지를_시찰.jpg

이태리에서 이태리포플러 식재지 시찰할 때.

속성 재배가 가능한 이태리 포플러 나무도 잡종 교배해서 가로수와 녹음수로 보급했다. 한때 전국적으로 붐이 일었던 ‘포플러 나무 심기’운동도 그의 업적인 것이다.

남한의 빠른 조림을 위해선 생장속도가 빠른 나무들이 절실했다. 그의 육종연구도 이 분야에 집중됐다. 은백양나무의 빠른 생장력, 건조에 견디는 힘, 꺾꽂이가 잘 되는 점과 수원사시나무의 곧게 자라는 성질을 겸비한 은수원사시나무를 교배육종하기에 이른다. 이 나무는 평지뿐 아니라 산지에서도 빠르게 잘 자랄 수 있는 특징을 지녀 또 한번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오산에서_리기다소나무에_테다화분으로_교배하고_있는_광경.jpg

오산에서 리기다소나무를 테다화분에교배하고 있는 모습.

현사시조림지.jpg

현사시나무 조림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현 박사를 찾아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은수원사시나무를 앞으로 현사시나무라고 개칭하도록 지시했다. 그 뒤부터 한국에서는 이 나무를 현사시나무로 불렀다. 그러나 국제학회에서는 아직 은수원사시나무로 불리고 있다.

그의 일생일대 철학은 한마디로 산림부국론이었다.산림이 바로 국부의 척도이고, 산림의 성쇠가 국가의 성쇠와 비례한다는 게 그의 평생 소신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평생을 바친 임업 육종학자였다.

SANY0068.JPG

숲의 명예 전당에 헌정된 현신규 박사.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2 Comments

  1. 또흙

    04.06,2009 at 12:57 오후

    현신규 박사님은 우리 농업과학인 모두의 표상이십니다. 과학기술부에서 2002년 선정한 우리나라를 빛낸 대표 과학자 14명 중 농업계에서 현박사님과 화농 조백현 박사님 두분이십니다. 조백현 박사님께서는 우리나라에 토양비료와 농화학 분야를 개척하신 세계적 대학자이십니다.
    현 박사님과 조 박사님의 모습은 우리 농업과학자들 가슴에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2. 아이디얼가든

    06.09,2009 at 8:01 오후

    농업이 21세기 미래 산업이자 신성장 동력이죠. 녹색산업은 산림감시원을 이르는것이아니라 농업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