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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조장희 박사 “세계적 과학자 안됐으면 세계적 산악인 됐을 것” - 마운틴
조장희 박사 “세계적 과학자 안됐으면 세계적 산악인 됐을 것”

인간의 뇌가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물리적으로 보면, 태어날 땐 인간 신체무게의 30% 정도를 차지하다 차츰 줄어들어, 성인이 되면 그 10분의 1인 3% 밖에 되지 않는다. 에너지는 전체의 20%이상을 소비한다. 활동적인 측면에서는 뇌의 지시를 받지 않는 자율신경계를 통해 움직이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뇌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는다. 정확히 구분하기 힘들지만 대략 50% 이상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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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희 박사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질병적인 관점에서는 뇌가 질병에 미치는 영향은 대략 50~80%가량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몸에 이상이 생겨 약을 먹고 나았을 경우, 일반적인 원인이야 알 수 있지만 약의 어떤 영향 때문에 쾌유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단지 뇌가 어떤 형태이든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은 동의하고 있는 정도다. 뇌의 이상에 의해 발생한 질병은 전체 질병의 50% 이상 된다.따라서 어떤 관점으로 보아도 뇌가 우리 신체에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하지만 아직 뇌 분야에 대한 연구와 개발에 대해선 미미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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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박사가 자신의 연구실에 붙어 있는 뇌 단층 화면을 보며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미증유의 뇌 영역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져 새로운 영역을 계속 개척해 가며 뇌 과학 분야 세계적 석학으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한국인 과학자 조장희 박사가 있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지난 2004년 가천의대 뇌 과학연구소장으로 영구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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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박사가 자신의 컴퓨터에 저장된 서울대 공대 산악부 시절 설악산 훈련갔을 때의 사진을 보고 있다.

괄목할만한 그의 연구업적부터 먼저 살펴보자. 조 박사가 세계최초로 개발한 것만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PET(Positron Emission Tomography, 양전자 단층 촬영기), 2.0T(Telsa, 자강 강도의 단위, 지금은 7.0까지 나와 있음) MRI, 뇌 영역에 침의 영향 첫 연구, PET-MRI 등이다. 세계 최초로 개발했거나 실전에 적용한 연구만 하더라도 4개나 된다. 끊임없이 노벨상 후보군에 오르면서 유력한 수상자로 거론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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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통합 치료다’라는 제목으로 2002년 뉴스위크에 실린 침에 관한 기사.

그의 업적만큼이나 그의 경력도 화려하다. 각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들에게만 부여되며 현재 5천여 명에 불과한 미 학술원 회원, 미 국립보건원 국가자문위원, 캘리포니아(UCLA) 교수, 콜롬비아 대학 교수, 미 어바인 캘리포니아대(UCI) 교수,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물리학과 부교수, 한국 과학기술원(KAIST) 초빙 석좌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광주과학기술원 초빙교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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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박사(맨 우측)가 서울대 공대 2년 시절 당시 서울대 의대 본과 1년 생이던 고재경(현 피부과 전문의)과 함께 암벽 등반하면서. 복장이나 표정이 재미있다.

현재는 가천의대 뇌 과학 연구소장직을 맡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가천의대 길재단 이길녀 회장의 15년 계약에 파격적인 연봉으로 2004년 영구 귀국했다. 조 박사는 “미국에서 계속 연구하기 위해 일부러 무리한 조건을 내걸었음에도 이길녀 회장이 선뜻 받아들여 조금 놀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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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공대 시절 산악부원들과 설악산 훈련 갔을 때 단체사진을 찍었다.

가천의대는 뇌과학 분야에 서울대 등과 공동연구협약을 맺고, 세계 3대 의료장비업체인 지멘스가 의료영상기기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R&D계약을 체결했다. 이길녀 회장은 조 박사 귀국이후 뇌 과학연구에만 640억원을 투자, 세계적 뇌 과학 연구 메카로 발돋움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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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 조 박사(우측 두번째)가 도봉산 암벽을 오르내릴 때 동료들과 함께.

조 박사가 어떻게 이 정도의 성과를 올렸고,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며, 그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가 궁금했다. 39년 태어난 그는 중학교 2년 때 6․25를 맞았다. 피난을 떠나 대구에서 생활했다.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장사하며 끼니를 때웠다.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만 전쟁의 어수선한 상황에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학교로 돌아갔다. 몇 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요즘 기준으로 우수한 학생들만 할 수 있는 월반으로 옛날 동료들과 같은 반에 배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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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스키 훈련하러 가서 민박 주인과함께.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공부를 제대로 따라갈 수 없었다. 자연히 공부와 담을 쌓기 시작했다. 산과 가까이 지냈다. 공대 산악반장까지 하면서 북한산, 도봉산, 설악산 등 암벽이란 암벽은 전부 섭렵하다시피 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만약 내가 중간에 군에 가지 않고 계속 학교를 다녔다면 아마 유명한 등산가가 됐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만큼 암벽의 매력에 흠뻑 빠져 전국의 산을 돌아다녔다. 다른 사람이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간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았다. 도봉산 선인봉 정면벽 B코스를 동료들과 함께 개척했다. 사람보다 산이 좋던 시절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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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 한라산 동계 훈련하면서.

혼자서도 즐겨 다녔다. 56년 설악산 산악훈련 갔을 때의 기억이 너무 오래 남아 57년 설악산에 혼자 찾았다. 웃지 못 할 사건이 발생했다. 배낭 속에 칼, 버너, 옷가지 등을 잔뜩 넣고 속초에서 하루 종일 걸어 겨우 설악산에 당도했다. 경찰이 오더니 배낭을 열라고 했다. 다짜고짜 아귀를 때리면서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간첩이라고 본부에 신고하며 차로 다시 속초로 이송했다. 서울대 공대 산악부의 학생 신분을 겨우 확인한 후 미안하다고 하면서 가라고 했다. 어이없기도 분하기도 했지만 시절이 그런 시절이었다. 다시 하루 종일 걸어 속초로 갔다. 길거리에서 이틀에 걸쳐 도보훈련을 한 후 설악산 등산을 한 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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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에서 산악스키 훈련을 하고 있다.

산에 푹 빠져있다 군에 갔다. 그의 인생 첫 전환기다. 제대하니 같이 등산할 동료가 없었다. 공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의 맛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젠 공부에 미쳤다. 대학원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나갔다. 먹고사는 문제가 눈앞에 다가왔다. 공부에 맛을 들였으니 이왕 내친 김에 유학가자고 작정했다. 돈은 없었다. 국비 장학생을 노렸다. 기회는 어렵지 않게 왔다. 마침 국제원자력 장학생 시험이 있었다. 62년 석사학위를 받고, 동시에 스웨덴 웁살라대학으로 단돈 50달러를 들고 유학을 떠났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전자공학에서 물리학으로 전공이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웁살라대학 박사과정 학생으로, 스톡홀름 대학교수로 그렇게 스웨덴에서 10년을 보냈다.

조 박사는 또 한 번의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60~70년대 반전, 반핵 운동이 세계적으로 퍼질 즈음 미국에서 핵물리학을 평화적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핵물리의 평화적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핵의학이다. UCLA에서 원자력을 이용한 새 프로그램 연구를 시작하며 새로운 보금자리를 잡았다. 72년 영국에서 학계 보고도 없이 바로 CT(Computerized Tomograph, 컴퓨터 단층 촬영)를 상용화하자 미국 의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원리가 무엇이며, 비밀이 뭔지 연구소와 병원 등에서 연일 세미나 열기 바빴다.

조 박사는 UCLA 방사선 과장으로 첫 미팅에 참석했다. 조 박사가 연구하겠노라고 했다. 재미있고 도전해볼 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CT 연구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 해 겨울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원리를 발표했다. 학계의 반향이 엄청났다. 스스로도 굉장히 큰일을 했다는 자부심도 가득했다. 73년 심포지엄을 만들어 세계에서 처음으로 CT영상을 재구성했다. 컴퓨터 단층 촬영을 3차원 영상으로 잘라서 보기 시작했다. 의료영상 분야에 획기적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75년엔 드디어 세계에서 처음으로 PET를 개발했다. 조장희란 이름 세 글자를 세계 영상 의학계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뇌 연구뿐만 아니라 암 연구에도 활용했다. 여태 볼 수 없었던 암세포를 3차원 영상으로 잘라서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했다. 그의 연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KAIST 초빙 석좌교수로 있을 92년, 등산을 하다가 넘어져 허리를 삐끗했다. 거동하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당시 60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쉽게 낫지도 않았다. 힘든 생활을 했다. 옆에서 누군가가 침을 맞으라 했지만 거절했다. 당시까지 조 박사는 침은 미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LA에 있는 중국인에게 침을 한번 맞았다. 한 10여분 지나니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신비한 동양의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고, 침에 대해 본격 연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96년 침은 경혈만이 아니고 어느 부위에 놓아도 상관없으며, 침은 뇌를 통해 치료된다는 새로운 결과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침의 뇌 과학에 대한 연구라는 신기원을 여는 쾌거였다. 이에 대한 논문내용이 98년 디스커버리(DISCOVERY) 9월호에 실렸고, 뉴스위크 2002년 12월2일자에 ‘침, 대체의학에 대한 과학연구(The Science of Alternative Medicine)’라는 제목으로 거의 표지뉴스 정도 크기로 소개됐다.

그의 연구결과와 성과를 유심히 본 가천의대 이길녀 회장이 급기야 2004년 파격적인 조건으로 초빙했다. 한국을 떠난 지 42년 만에 다시 귀국했다. 귀국 조건은 세계 의학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기는 것이다. 이 회장과 조 박사와의 약속이다. 이제 그는 조국의 의학발전을 위해 여생을 바칠 결심을 했다.

40여 년 전 등산에 미쳐 있을 때 보여줬던 도전의식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싶다. 그의 인생은 도전으로 점철돼 있다. 등산하면서 새로운 길에 대한 도전, 미지의 세계로 유학하면서 공부에 대한 도전, 남이 개척하지 않은 뇌 과학 분야에 대한 도전 등 항상 그의 인생엔 새로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조 박사도 말했다. “산은 나에게 모험심을 심어줬던 것 같다. 물론 성격적으로 그러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대학생 때 배운 등산이나 암벽 등이 나에게 그런 모험적 성향과 도전의식을 더 부추긴 것 같다”

그의 인생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도전정신과 모험심을 잃지 않아, 모든 게 순조롭게 풀려갔다고 볼 수 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다가 스웨덴으로 유학 갔을 때 물리학으로 전환, 미국으로 스카우트됐을 때 의학으로 전환 등 그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필요에 따라 순리를 따랐을 뿐이다. 순응하는 인생, 이게 곧 자연과 산이 주는 가르침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1 Comment

  1. 구본승

    04.13,2009 at 11:56 오전

    연봉이 30억원이겠지요.30억불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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