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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국토, 나의 산하>를 가다…소설가 박태순의 소설과 삶

“백두산은 모진 시련을 굳세게 이겨낸 국조(國祖)의 산이고, 지리산은 온갖 수난을 무던히 극복한 성모(聖母)의 산이다. 지금에 이르러 백두산에서는 미래지향적인 세계주의를 살펴야 하고, 지리산에서는 분단시대의 민족주의를 졸업하여 다음단계의 지평선을 틔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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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소설가 박태순씨.

소설가 박태순씨가 꼬박 3년여 전 국토를 기행하며 쓴 <나의 국토, 나의 산하>(한길사)를 내놓았다. 국토 대백과전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서사적이다. 39편의 국토기행 글들과 사진을 모두 3권에 나눠 실었다.

제1권 ‘나의 국토 인문지리지’에서는 거대 담론으로서의 서사 국토를 조망하고 있다. 임진강 들녘에서 송악산과 북한산을 바라보며 분단의 역사를 되짚고, 국조의 산 백두산에서 반도사관을 극복하여 동아시아 대륙성 문화와 해양성 문화를 갈무리하고 있다. 성모의 산 지리산, 청춘의 산 설악산, 국토의 중앙에 우뚝 솟은 소백산 등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와 역사담론을 읽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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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산동 산수유 마을에서.

제2권 ‘시인의 마음으로’에서는 국토의 미시담론을 담았다. 1천년 목사고을 나주의 시간여행, 광양과 섬진강의 화신(花信)기행, 남원 관한루원의 누정문화를 살피고, 가장 오래된 역사의 길 계립령과 문경새재, 그리고 영남대로의 자취를 더듬고 있다. 제3권 ‘인간의 길 시대의 풍경’에서는 국토의 종단기행과 횡단기행의 두 코스를 마련하고, 길과 풍경의 복잡다기한 관계를 읽어낸다. ‘길이 사라지면 그 길 위의 역사와 문화도 사라진다’라고.

특히 제1권에서 우리 5,000여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그만의 신선하고 독특한 눈으로 읽어내고 있다. 백두대간의 능선을 따라 백두산은 우리민족의 거대한 뿌리로, 금강산은 풍류와 화랑의 길노래로, 설악산은 청춘의 산으로, 소백산은 천상의 화원으로,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 등으로 설명하며 해박한 지식을 담담한 필체로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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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미륵리 미완성미륵불에서.

그가 왜 이런 산들의 특성을 집중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는가 궁금했다.

“똑같은 산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자세로 입산하느냐에 따라 산의 의미와 내용은 달라진다. 도교의 산은 운림의 청산이 되고, 불교의 산은 산문의 출가가 되고, 유교의 산은 산림의 강호문학이 된다. 세상에 뜻을 펴지 못하는 자들은 암혈에 숨으려 하고, 먹고 살 수 없는 자들은 녹림의 패거리를 이루어 산적이 된다. 산은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아울러 저들이 원하는 바를 베풀어 주었다. 오늘 날에는 이런 모든 산수들이 몰수되고 ‘산업산수’의 그린필드로 남아있거나 그마저도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나 또한 스스로 산악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넓은 의미의 산악문화인 내지 산악숭배자라고 여긴다. 또 산인(山人)이라는 별호를 갖고 싶어 한다. 선인들의 유산록에서는 심신의 밝음과 청산의 맑음을 부단히 일치시키려는 마음의 행로를 보여주고 있다. 퇴계 이황은 ‘산은 책과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고들면 들수록 무궁무진한 지혜와 일깨움을 주니, 산타기와 책읽기는 그 노고와 탐구 과정이 흡사하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러한 산에 대한 관점을 여러 가지로 넓혀 산악문화를 새롭게 하자는 의미에서 접근해봤다. 산업산수로 변한 지금 국토의 소비행위자가 되지 말고 생산행위자가 돼야 한다. 국토의 자연유산, 문화유산, 역사유산 합류의 생산행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그는 처음부터 기행문학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서울대 영문과 졸업 무렵인 64년 소설 <공알앙당>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러나 그는 소설가로서 원천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능력이 아니라 개인적 성향과 시대적 환경은 소설가로서 성장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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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동 고분.

그는 47년 고향 황해도를 떠나 아버지를 따라 월남했다. 서울 퇴계로 인근에 남한의 고향으로 정착했다. 이른바 월남 1.5세대다. 어릴 적부터 그는 유달리 호기심이 강했다. 모르는 길을 항상 찾아 헤맸다. 다녀봐서 아는 길과 모르는 길의 경계선에 서서 넘어갈까 말까하는 갈등을 수없이 겪었다. 경계선을 넘어 모르는 저쪽으로 가는 순간 미아가 된다. 실제 미아가 된 적도 많았다. 그 경계선에서 방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경계선을 넘나드는 빈번한 방황으로 조금 더 자기의 세계를 넓혀나갔다. 그러나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지만 경계선은 없어지지 않았다. 항상 따라 다녔고, 그 곳에서 헤맸다. 그 경계선이 영원히 그의 굴레가 돼버렸다. 그게 소설가 박태순씨의 개인적 성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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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령 옛길 하늘재.

시대적 환경은 그에게 더 아픔으로 다가온다. 서울로 피난 와 얼마 안 있어 어린 눈으로 6.25라는 민족의 대참극을 겪는다. 뿐만이 아니다. 서울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60년, 4.19를 새내기의 눈으로 동료의 죽음을 현장에서 목격하게 된다. 이듬해 5.16, 유신, 광주사태 등 역사의 소용돌이를 고스란히 체험한다. 이런 경험은 그를 반체제, 비주류, 실천문학, 민족문학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인이었고, 80년 실천문학 발간한 주역이었다. 그가 지닌 개인적 성향과 묘하게 맞아떨어져 갔다. 이로 인해 그의 관심은 소설보다는 우리 국토와 민족을 생각하는 기행문학, 보고문학, 현장문학에 더 기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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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에서 바라 본 지리산.

그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 자신은 소설 창작에만 몰입해온 쪽은 아니었다. 작가는 온갖 형태의 산문문학을 아우르도록 하여 당대의 시대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으로 믿었다. 1960년대는 대단한 격변의 시대였고, 거대담론을 요청하는 산문정신의 시대였다. 60년대 문학은 근대화의 추구와 근대성의 구현간의 갈등관계를 규명해보아야 하는 작업을 분명 요청받고 있었다. 근대성을 갖추지 못한 채 근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하는 문학적 관찰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근대인으로서 인간성 자각과 사회 민주화 실현을 동반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 경제 근대화 과제만 추구하는 것의 모순구조와 갈등 구조를 문학이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 문학만 아니라 세계 문학이 전반적으로 이러한 숙제에 당면하고 있었다. ‘소설의 죽음’을 선언한 미국의 비평가이자 소설가이며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끈 레슬리 피들러(Leslie Fiedler)는 64년 <종말을 기다리며>라는 책에서 ‘소설의 종말’이라는 명제를 공식적으로 제출했다. 로버트 스콜스도 픽션으로서의 소설은 더 이상 리얼리티를 반영하지 못하고, 진실도 제시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픽션으로서의 소설을 거부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메타픽션은 ‘비사실주의적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요약하자면 나는 소설문학에 국한하기보다는 산문문학 전반에 부단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소설 문학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선 허물기, 팩트와 판타지 뒤섞기, 문학 시장주의에 철저히 포섭당하는 쪽으로 외연을 넓혀야만 했다. 나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선 허물기의 산문문학 쪽에 발을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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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의 눈 쌓인 겨울.

그가 문학을 하는 이유도 근대화 과정에 돌입한 한국 사회를 거대서사로 돌파해내야 한다는 포부와 나름대로의 사명감,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80년 한국탐험과 83년 <국토와 민중>에 이어 그 결실이 이번에 나온 <나의 국토, 나의 산하>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는 지난 93년부터 충주 수안보 월악산 자락에 거처를 마련해 생활하고 있다. 암에 걸린 아버지의 요양을 위해 마련한 곳인데, 곧 돌아가셨다. 부친은 출판사 박우사의 창업자이셨다. 이후 그는 아예 서울을 떠나 이곳에 정착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 정착했지만 그는 서울생활이 싫었다. 떠날 기회만 엿보다 부친의 사망이 계기가 됐다. 그의 주변 작가들은 ‘도시생활의 재발견’이라는 새로운 화두로 대중적 인기도 얻고 경제적 안정을 취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의 기준은 오직 정직하게 글을 쓰는 것뿐이다.

“요즘은 아예 서울에 올라가지 않는다. 서울에서는 서울만 보이고, 시골로 내려와 보니 서울도 보이고 국토도 보이더라. 난 촌놈이 다 됐다. 지금 서울 시민은 이상야릇한 모습을 띤다. 인공 지능도시와 같은 로봇화 돼가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이런 얘기를 하는 자체가 촌놈이 다 됐다는 증거다.”

그는 촌놈의 시각으로 산하와 대지를 누비며 국토를 조명하고 우리 역사를 서사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에게 우리 산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부탁했다.

“국조의 산인 백두산은 동해와 서해를 양 겨드랑이에 건사하여 동아시아 해양성 문화를 조망하게 하고, 아울러 한반도와 중국 동북대륙의 대륙성 문화의 센터를 이루고 있다. 전통 시대의 중원 천하사관이라든가, 근대 제국주의의 반도사관, 그리고 만선(滿鮮)은 단호하게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백두산은 알려주려고 한다. 백두산의 몸과 마음을 우리는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리산은 ‘국토의 울음주머니’라 표현한 적이 있다. 사람이 산에 오르면 선(仙)이 되고, 골짜기로 들면 속(俗)이 된다고 한다. 산 위의 신선보다는 산 아래 골짜기의 속물들을 품어 활인지지(活人之地)의 낙토를 펼쳐주는 지리산을 우리는 새롭게 찾아야 한다. 설악산이 자연문화유산의 걸작이라면 소백산은 한국 인문주의의 문화 요람이다. ‘산중미인’이 설악산이고, 풍류가인이 소백산이다. 설악산에서는 청춘언어를 발견해볼 수 있겠고, 소백산에서는 전설의 고향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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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지심도 동백꽃.

끝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지난여름 베이징 올림픽 개막 축제를 보면서 1964년의 도쿄 올림픽과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비교해보게 됐다. 세계주의는 아직까지 그 나름의 갈등이 있고, 국가주의 또는 민족주의는 이제 와서 극복되어야 할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 백두산에서 미래지향적 세계주의를 살펴야 하고, 지리산에서는 분단시대의 민족주의를 졸업하는 다음 단계의 지평선을 틔워 한민족과 한반도가 세계로 재도약하는 에너지로 삼아야 한다는 걸 느꼈다.”

우리 국토, 우리 산하를 통해 한민족의 무궁무진한 에너지를 찾고, 미래의 가치를 찾는 노 작가의 목소리엔 아직 젊은 작가 못지않은 힘과 열정을 있었다. 그는 “찾지 않는 한 국토는 없고, 깨닫지 않으면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걷는다. 길을 찾는다.”고 말을 맺었다. 그의 한반도 사랑, 아니 우리 산하 사랑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사진 황헌만 작가 제공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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