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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지리산 사람들이 만든 ‘지리산학교’ - 마운틴
지리산 사람들이 만든 ‘지리산학교’<1>

지리산엔 백수가 없다. 아무 하는 일 없어도 백수가 아니다. 지리산이 일을 시키고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남의 밥 빌어먹지 않으니 백수가 아닌 것이다. 지리산에 살면 굶어죽지 않는다고 다들 말한다. 대도시에 살면서 굶어죽었다는 얘기 들어봤어도 지리산에서 굶어죽었다는 얘길 아직 못 들어봤다. 그만큼 포용의 산이고, 베풂의 산이고, 어머니의 산이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그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부지런하거나, 게으르거나 먹고 사는 동네가 바로 지리산이다.’

대도시에서 살다가 지리산에 입산한 사람들이 있다. 다들 10년이 넘었다. 지리산에 발을 붙인 지 몇 년간은 소설가 박태순씨의 분류대로 활인지지의 지리산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젠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주변을 살펴보니 비슷한 부류, 아니 독특한 개성과 소질을 지닌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사진작가, 시인, 목공예 전문가, 도예가, 화가들이 소리 없이 본업에 충실했다. 일부는 귀촌이었다. 반귀농 반귀촌 병행하는 이도 있었다. 귀농은 농촌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는 사람을 말하고, 귀촌은 촌에 돌아가서 농사짓지 않고 다른 일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을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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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왼쪽부터 사진 이창수, 도예 류대원, 목공예 김용회, 숲길 남난희, 천연염색 신미원, 시인 이원규, 시인 박남준, 화가 오치근, 가운데 앉은 사람이 사진 이창수씨의부인 안강임, 그 오른쪽이 이원규의 부인이다.

이들이 지리산 문화를 일구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른바 지리산에 귀의한 지리산 사람들이 지난 5월 9일 지리산학교를 세워 지역문화예술과 귀농 안착을 위한 교육에 나섰다. 사진작가 이창수(49)씨는 사진반, 화가 오치근(39)씨는 그림반, 도예가 효석요 류대원(40)씨는 도자기반, 목공예가 김용회(43)씨는 목공예반,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산악인 남난희(52)씨는 숲길걷기반, 시인 박남준(52)씨와 이원규(47)씨는 시문학반, 퀄트 안경림(51)씨는 바느질반, 서재골 사람 신미원씨는 천연염색반, 옻칠공예가 성광명씨는 옻칠반, 낙원상가에서 언더그라운드를 운영하고 있는 김선웅씨는 기타반을 각각 맡기로 했다. 12명이 각각의 전공을 살린 10개 반 강사로 나서 하동 평사리 악양 지역문화와 토착, 귀농민들을 위한 열린학교를 열었다. 현재 10개 반이지만 지역민들과 의논해서 영농법, 국악 등을 오는 9월 가을 학기부터 개설할 예정이다.

이들의 중심은 사진작가 이창수씨였다. 그는 ‘한국의 슬로시티’ 지리산에 살면서도 시간 단위로 사람 만날 약속을 잡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마저도 괜히 바빠지는 것 같다.

“시골에 살면서 왜 그렇게 바쁘게 사느냐.”

“남들 편하고 느리게 살게 하기 위해서 바쁘게 산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그는 ‘바쁜’ 지리산 사람이다.

그는 또한 하동군 악양면이 국제 슬로시티로 지정되기 전까지 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악양은 지난 1월 슬로시티 국제연맹으로부터 한국에서 다섯 번째 슬로시티로 공인받았다. 2009년 현재 세계에서 16개국 111개 도시 뿐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되면 관광명소로 전 세계에 알려지는 기회를 잡게 된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슬로시티로 지정된 국가다. 일본엔 아직 없다. 2007년 12월 전남 신안군, 담양군, 장흥군, 완도군에 이어 올 1월 하동군 악양면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원래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악양면에서 강권했지만 외지인보다는 토착민이 맡아야 하고, 그는 외곽지원을 하겠다고 해서 부위원장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추진력이 있다. 그의 말대로 ꡒ길이 보이면 무조건 지르고 본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러한 소신은 사진기자하면서 길러졌는지 모른다. 그는 언론사 사진기자 출신이다. 85년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샘이 깊은 물’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 국민일보, 월간중앙에서 사진기자를 했다. 기자생활 16년, 할 만큼 했다고 판단했다. 대학 다닐 때 유럽 무전여행을 경험했고, 기자할 땐 한국의 동식물을 찾아 비자가 거의 나오지 않던 시절 가이드 없이 혼자 백두산 천지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겼다. 사진이 인생의 전부인 시절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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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남준

1999년 6월 어느 날 서소문 식당가 십구공탄 연탄 위에 삼겹살을 구우며 동료들과 시끌벅적하게 떠들다 잠시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가 머리를 스치는 순간 정신이 확 돌아왔다.

‘내년이면 사십이다. 인생의 절반, 사진기자 생활 16년 동안 열심히, 원 없이 일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아왔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왜 사는가?’

본질적 의문이 확 들었다. ‘어차피 내려갈 거면 빨리 내려가자. 한시라도 늦출 이유가 없다.’ 그날의 다짐이었다. ‘지를 거 빨리 지르자’는 그의 습성이 도진 것이다.

IMF도 지났고 별로 어려울 게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 상황은 호의적이었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 스스로의 의식이 문제였다. 하나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원래 45세쯤 지리산으로 내려갈 작정이었다. 5년이 당겨진 셈이다. 그 해 12월 회사를 그만두고 지리산에 입산했다. 과거엔 사람이 산에 들어가면 신선놀음이라 했다. 사람 인(人)에 뫼 산(山)이 합쳐지면 신선 선(仙)자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엔 처자식 내팽개치고 입산하면 바로 이혼감이다. 아니, 분명 이혼 각오하고 갈 것이다.

그의 부인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반대하기엔 너무 빈도가 잦았다. 이번엔 ‘저러다 말겠지’ 정도가 아니었다. 잡는다고 될 일도 아닌 것 같아 순순히 내버려뒀다.

그렇게 우리 나이 40에 부인보다 먼저 지리산으로 내려왔다. 서울 용산 아파트에서 살다 지리산 자락 악양 초라한 재래식 화장실 집을 월세 7만원에 얻었다. 그의 지리산 첫 터전이다.

그는 젊은 시절 사진기자로 한창 사진 찍을 땐 ‘사진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인생, 그 자체가 전부다’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소중치 않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사진도, 일도 삶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죽음도, 삶도 크게 보면 한 흐름이란다. 달관한 수준이 듯했다.

지리산 생활 10년. 이혼 당하지 않고 내려온 지 1년 뒤 부인도 따라 내려왔다. 교사직도 사표내고. 그렇게 부창부수하며 지낸다. 그의 이름이 창수라서 그런지….

그의 부인 안경임은 지난해부터 아강퀄트를 열어 퀄트 이불과 간편한 옷 만들기를 강의하고 있다. 교사하면서도 바느질에 소질이 있던 터였다. 지리산에 내려온 초기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남편보다 더 재미있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

지금 이 부부는 악양 제일 높은 지리산 자락 형제봉 가는 중턱에 1만5,000여 평을 사들여 터전을 일구고 있다. 사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낸다. 봄엔 송장도 일어나 일을 도울 정도로 바쁘다는 녹차 시즌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녹차잎을 따는 일부터 시작해서 한밤중 찻잎을 덖는 일까지 이창수의 손을 거치지 않는 과정이 없다. 한밤중 부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300℃ 내외되는 가마솥 옆에 서서 녹차잎을 덖는 과정을 보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더울 지경이다. 장갑은 5개정도 낀다. 사이사이에 열전도를 차단하기 위해 비닐장갑도 낀다. 영판 깁스한 손이다. 그 손으로 최대한 감촉을 살려 녹차잎을 정성들여 덖어야 녹차맛이 제대로 난다고 한다. 하여간 농촌일은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여름엔 매실 수확 시기다. 매실을 따서 저장하고 술 담그고 하는데 한여름을 보낸다. 가을엔 감이 기다리고 있다. 감을 따서 박스에 담아 팔기도 하고 저장도 한다. 겨울엔 곶감 시즌이다. 계절마다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찍으러, 땅의 의미를 찾으러, 땅의 의미를 알려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내려온 사람이 이렇게 바쁘게 살줄은 자신도 몰랐다고 한다.

"사진은 이제 안 찍어요? 언제 찍나요?"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찍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시간을 내서 지난 해 생애 두 번째 사진전을 서울 학고재에서 열었다. 올해 10월 8일 세 번째 사진전이 성곡미술관에 예정돼 있다. 대도시의 기계음과 정신없이 얽매인 일정이 싫어 지리산에 입산한 사람이 지리산에 사는 건지, 서울에 사는 건지 모를 정도로 빡빡하게 산다. 그래도 기계음 듣지 않는 시골이 너무 좋다며 대만족하고 있다.

지리산 학교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시인 박남준과 이원규, 이창수 3명이 저녁을 하면서 ꡐ이대로 있지 말고 지리산을 위해 뭔가 일을 도모하자ꡑ고 한 게 발단이 됐다. 이 중 제일 연장자인 박남준씨가 맡아 추진하라고 했으나 세월아 네월아 하고 일이 되지 않았다. 이창수씨가 바로 나섰다. 그래서 지금까지 온 것이다.

애초 일을 맡았으나 만만디였던 박남준 시인은 원래 성격 자체가 느긋하다. 원체 구도자적 삶을 추구하는 성격인지라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 싶다.


박남준 시인은 지리산에 입산한지는 만 6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주 인근 모악산에서 이미 혼자 신선생활, 아니 산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모악산과의 인연은 84년, 그가 시인으로 등단하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가을 모악산 등산을 갔을 때 길을 잘못 들어 날이 저물도록 헤맸다. 랜턴도 없이 어둑한 길을 저 멀리 보이는 불빛만 보고 걸었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당도해서 얼핏 엿보니 산속 무속인의 집이었다. 문득 ꡐ이런 집에 한두 달 살며 무속인의 삶에 대한 시를 쓰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도 하다 삭막한 도시생활에 스스로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던 차 마침 전주에서 문화센터 관장직을 제의받아 바로 낙향했다. ‘산 중에서 산책하듯 삶을 객관적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산 속에 집을 얻어 출퇴근했다. 꼬박 1년을 산 속에서 생활했다. 산중 생활이 그와 둘이 아니고, 유리되지 않았다는 감정이 슬며시 들었다.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면 돈을 쓸 일도 없고, 돈을 쓰지 않으면 돈을 벌지 않아도 되지 않나’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바로 사표를 냈다.

그 와중에 아는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산속 집 지킬 사람을 찾고 있으니 아는 친구 있으면 소개하라고. 마침 사표 낼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선배랑 같이 그 산속 집을 찾아갔다. ꡒ혹시 이 집에 무속인이 살지 않았냐ꡓ고 물었다. 10여 년 전 모악산에서 길을 잃고 헤맸던 그 산속 집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 선배는 ꡒ맞다ꡓ며 ꡒ어떻게 알았냐ꡓ고 되물었다. 참, 기막힌 인연이다. 산과의 인연인지, 무속인과의 인연인지, 자신과의 무언의 인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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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씨가 지난 하동 차축제 때 전시회에 앞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내가 이 집에 살겠다’며 눌러 앉았다. 그렇게 13년의 세월을 습하고, 춥고, 외진 산중에서 보냈다. 보통 사람이면 견디기 힘든 고독과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벌써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어느 정도 추위냐면, 한겨울 방안에서 양철 지붕 밑으로 물이 슬슬 내려와 고드름과 같이 지낼 정도였다. 집 옆 나뭇가지에 쌓인 눈은 바람이 불면 양철 지붕으로 떨어져 지붕이 내려앉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벽에 바짝 붙어 잠을 청하곤 했다.


겨울엔 그렇다 치고 여름엔 웬 놈의 습기가 그렇게 많은지. 장마가 한번 오면 바로 그 다음날은 온 방이 습기로 가득 찼다. 밖에서 말린 빨래를 방에 들여놓으면 다시 습기로 축축해져 냄새까지 쿰쿰하게 났다. 그의 말대로 ꡒ겨울엔 추워서 죽겠고, 여름엔 습해서 죽겠더라ꡓ는 거였다.

어느 날 재미있지만 웃기 힘든 사건이 발생했다. 한번은 지인이 그 산속 외딴집으로 찾아왔다. 쌀도 떨어지고 없었다. ꡒ잠시 기다려라ꡓ해놓고선 ꡐ쑥국이나 끊여 먹여야겠다ꡑ며 부근에 늘린 쑥을 캐고 있었다. 갑자기 이름모를 새가 날아와 울었다. 새의 울음소리가 왜 그리도 처량하게 들리는지. ꡒ어~허허허허~~~ꡓ라고 울며 ꡐ쌀도 떨어지고 쑥이나 캐는 처량한 인생ꡑ이라며 마치 선명하게 비웃는 듯했다. 갑자기 얼마나 서럽던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스스로도 ꡐ내 삶이 얼마나 비참했으면 새까지 나를 비웃을까ꡑ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어 여기저기 강연 가서 ꡒ새소리가 어떻게 들리느냐ꡓ고 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ꡒ홀딱 벗고, 홀딱 벗고ꡓ로 들린다고 했다. 마치 각자의 현재 삶의 상태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 새이름은 검은등뻐꾹이라고 했다.

지인들이 ‘도저히 모악산 생활이 안되겠다’ 싶어 지리산 자락 악양 아담한 집을 사서 박남준 이름으로 등기를 했다. 법률사무소에서 박남준을 찾아 전화를 했다.

"여기는 법률사무소인데, 박남준씨 맞죠?"

"맞는데, 내가 뭘 잘못했죠?"

법률사무소에서 황당해 하며 ꡒ뭘 잘못한 게 아니고, 서류 찾아가라고 연락했습니다ꡓ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끊었다고 한다. 그만큼 본능적으로 ꡐ법ꡑ이란 단어만 나오면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정말 자연 속에 파묻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다. 처음엔 ‘나한테 얘기도 않고 누가 이런 짓 했나’싶어 자존심 심해 모악산에서 더 버텼다.

2003년 늦봄 어느 날 며칠간 계속 비가 내렸다. 며칠 전 말려놓은 옷을 입으려는 순간 곰팡이 냄새가 확 풍겼다. 밤에 자는데, 곰팡이가 몸에서 스멀스멀 나는 느낌을 받았다. ꡒ아, 정말 못견디겠다ꡓ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 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지리산으로 입산한 게 2003년 9월이다.

지리산 생활을 한마디로 ꡒ행복하다ꡓ고 했다. 모악산에 비하면 극락과 지옥차이다. 사람 하나 찾아오는 이 없는 외롭고 춥고 습한 집에서 꼬박 13년 살다 지리산 와선 산을 알고, 사람을 알고, 시를 알고, 문화를 더욱 더 알게 됐다고 말한다.

지리산에 와서 ‘섬진강과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섬진강 청소도 하고, ‘동네친구들’이란 밴드도 만들어 악양 지역민들을 위해 한번씩 공연한다.

자신만의 삶을 추구한 외골수로 지내다 이젠 지역민과 함께 나누는 삶을 하고 싶어 자발적으로 단체를 만들어 만만디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지리산 학교도 그 일환으로 참여하고 있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1 Comment

  1. 권대감

    06.21,2009 at 11:29 오후

    여러분 !

    智異山에서 자연과 어울려 살 수 있음은 天福입니다.
    본인도 지리산에 入山 生活하고 싶었으나 이제 나이가 들어
    기력이 못미쳐 아쉽네요. 여러분들의 健勝을 바라면서…

    ㅡ沙 權正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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