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사람들<2>…‘지리산 학교’서 지리산문화 메카 만든다


지리산엔 무척 많은 사람들이 산다. ꡐ어머니의 산ꡑ지리산이 안고 있는 사연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지리산에 터전을 잡고 있다. 원래 지리산에 살았던 사람들, 도시에서 생활하다 지리산에 귀의한 사람들, 지리산을 떠났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온 사람들, 지리산 주위를 여기저기 맴도는 사람들 등 이유야 어쨌든 이들 전부 지리산 품안에 안겨 있다.


시인 이원규도 도시 생활이 싫어 지리산에 입산한 전형이다. 중앙지 기자 생활을 하다 98년 과감히 사표를 내고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내려왔다. 처음 내려와 3년 동안 아무 하는 일 없이 산짐승 같은 생활 그대로 보냈다. 배고프면 먹고, 잠 오면 자고, 그러다 심심하면 지리산 이곳저곳 누비며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지리산 박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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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기자였던 시인 이원규씨.

기자생활을 할 땐 특종상도 몇 차례 받고, 시인으로 일찌감치 등단도 했지만 그에겐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3년을 무위도식하며 보낸 뒤 ꡐ인간으로서 도리를 해야겠다ꡑ며 양심의 가책을 느껴 활동을 시작했다. 지리산 지킴이 역할도 하고, 좌우 이념 대립 해소를 위해 ꡐ지리산 위령제ꡑ를 기획, 진행했다. 낙동강 1,300리길 도보순례, 지리산 850리 도보순례, 생명평화 탁발순례 1만리, 4대강 3천리 도보순례 등 주로 걸으며 세상의 소리를 경청하고 있다. 그는 아이디어맨이다. 이것저것 궁리하며 아이디어를 낸다. 지리산 학교도 그가 지리산을 위해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하며 산다.


숲길걷기반을 맡은 남난희는 8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성 산악인이다. 백두대간이란 이름조차 생소했던 84년 새해 첫날부터 76일 동안 단독 종주를 감행해 성공했던 인물이다. 86년엔 여성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7455m) 등정에 성공했다. 30세 전후까지 그녀에겐 산은 오직 오르기 위해 존재했다. 그 산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잠적하다시피 결혼과 함께 산악계를 떠났다. 지리산에서 녹찻집도 운영했고, 정선에서 자연학교 교장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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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산악인이라고 말하는 남난희씨.

다시 지리산으로 입산한지 만 13년. 욕망과 도전의 산에서 내려와 안정과 평온의 낮은 산에서 산과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 이혼의 아픔도 겪고 아들이라는 희망도 얻었다. 매일 아침 된장과 녹차 농사로 정신없이 바쁘지만 쌍계사 불일폭포가 있는 불임암에서 108배 하고 내려와 일과를 시작한다.


"나에겐 산이라는 큰 신(神)이 있어요. 불교 신도는 아니지만 108배는 사색을 하기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불일암까지 왕복 2시간 30분가량 갔다 오면 몸과 마음이 가뿐해져 일과가 수월하게 시작되죠."

악양 화개골 야트막한 산에 숲길 8개 코스를 개발해 ‘지리산학교’ 수강생들과 같이 다닐 계획이다. 무조건 오르려던 불씨를 지녔던 20대에서 그 불씨가 따뜻한 장작숯불로 변한 50대엔 아담한 산에서 사람과 함께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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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 신미원씨.

화가 오치근은 남원 운봉이 고향이다. 그런데 왜 악양에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판소리 선생님이 악양에 계셨습니다. 남원에 있으면서 판소리 배우러 악양에 한번씩 오갔습니다. 당시 받았던 인상은 너무 좋았습니다. 악양엔 들과 강과 산이 있고, 조금만 나가면 바다가 보였습니다. 모든 자연을 다 만끽할 수 있었던 거죠. 고향에서 그림만 그리고 있으려니 눈치도 보이고 99년부터 악양 빈집에서 개인 작업을 시작하면서 아예 눌러앉았습니다. 이제 내가 디자인하고 지은 집에서 애들 둘을 낳고 키우니 집과도 정이 들었습니다."


오치근은 지리산에서 살지만 세상과 다양하게 소통하고 있다. 책 속의 일러스트를 계속 그리고 있다. 서울에서 그려 달라는 청탁이 계속 온다. 그가 일러스트 한 책도 벌써 몇 권 나왔다. 또 일주일에 한번 동네 유치원생과 초등생, 학부모를 모아 그림 강습을 가진다. 섬진강에 나가서 모래 조각을 쌓기도 하고, 계곡에서 돌을 관찰도 하고, 나무와 숲길 관찰도 한다. 일종의 자연 체험 그림 그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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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오치근씨.

가르치는 걸 통해 스스로도 그가 느끼지 못했던 부분을 동시에 배우고 있다. 주민과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이창수씨로부터 지리산학교 강사를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다양한 활동을 기다리던 있던 차에 선듯 승낙했다.


"여태까지는 백석 시인의 글에 내 그림을 그려 책으로 냈으나 앞으로는 나만의 악양 이야기, 귀농 이야기, 시골 이야기를 감동적인 글로 담아 내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을 할 겁니다"

시골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며, 그 꿈을 하나하나씩 현실화 시켜가고 있는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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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예 김용회씨.

목다구(木茶具) 공예가 김용회는 이제 40대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지리산 입산 햇수로 따지면 가장 고참이다. 89년 가을에 입산했으니, 정확히 만 20년 됐다. 그는 원래 화가였다. 89년 배낭에 화구만 넣고 지리산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었다. 등산이라기보다는 그림 그리기 위한 포인트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화개 방향으로 내려오다 느낌이 너무 좋아 "한 계절만 이곳에서 보내야겠다"고 눌러앉았다. 근데 먹고 살거리가 없었다. 화개에서 차도구 작업하는 선배 만나 일주일에 세 번 나가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림 그리러 지리산에 왔다 목공예로 전업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시작된 목공예로 인해 96년엔 완전히 그림을 접었다.


그림과 접목된 목공예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림은 구상이고 디자인이다. 이미 훈련은 돼 있는 상태였다. 아름다운 한국의 선을 살려 목다구를 만들었다. 주변에선 ꡒ야, 너 참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목다구를 만들 수 있나ꡓ는 칭찬도 들렸다. 일본, 중국에서까지 반응이 왔다. 그는 각오를 새로 다졌다. "우리나라만의 차 도구를 만들어보겠다“고. 그래서 나온 게 코고무신, 베틀북, 한복치마 등의 모습을 담은 차 도구가 나왔다. 이젠 그의 차 도구는 기십 만원 하는 정도의 작품이 됐다. 옛날에 비하면 정말 괄목상대다. 집도 사고, 그럴 듯한 작업장도 지었다. 그만의 공간이다. 지리산에 입산한지 20년 만에 마련한 것이다. 원래 도시생활을 부러워하지 않았지만 명실상부 남부럽지 않은 수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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퀼트 안경임씨. 사진작가 이창수씨의 부인이다.

그새 결혼도 했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팬이라고 찾아온 여성과 그녀의 친구가 지리산에 왔다. 이원규 시인은 후배 김용회를 바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그녀의 친구와 그, 둘은 필이 바로 꽂혔다. 주변 반대와 곡절을 극복하고 끝내 결혼했다. 반대했던 처가 식구들도 지금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도 아쉬운 점이 있다. 너무 일찍 지리산에 입문하는 바람에 이론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무의 결이 어떤지, 그 결을 살리는 방법이 없는지 등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부족해 아직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이번 지리산 학교에서 수강생들에게 목다구를 가르치면서 자신에겐 이론을 닦을 기회를 마련하자고 만반의 각오를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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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류대원씨.

도예가 류대원은 지리산에 입산한지 만 10년 됐다. 경남 양산에서 매형 밑에서 도자기를 배웠다. 지리산에 납품하러 다니다 ‘불편하게 오가느니 아예 여기서 살자’고 한 게 지금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됐다.


"불편한 점 전혀 없고 경치도 좋고 사람도 좋고 너무 만족스런 생활을 하고 있다“고 즐거워했다. 지리산에서 결혼도 했지만 그의 부인은 양산 통도사 부근에서 그의 도자기숍을 운영하고 있다. 일종의 주말부부다. 지리산에서 만든 그의 도자기를 일주일에 한번 그가 직접 양산까지 배달한다. 돈이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른다.

"집사람이 돈 얘기를 하지 않는 것 보니 먹고 살만 한가보죠. 모든 관리는 집사람이 하기 때문에 저는 잘 모릅니다."


그도 지리산의 좋은 사람들 만나 지리산을 위해서 뭔가 할 일을 없나 찾고 있던 차에 지리산학교에 합류하게 됐다. 섬진강 청소와 악양 동네밴드에 이미 가입, 주민을 위해 봉사해 오던 터였다. 악양의 문화 자급자족을 위해 매진할 자세는 벌써 갖춘 상태다.


소질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 이렇게 다재다능한 사람들이 모여 지리산학교를 개강한다는 소문이 벌써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전해졌다. 개강도 하기 전 여기저기서 문의가 들어오더니 5월초 8개 강좌에 48명이 등록을 마쳤다. 6월엔 이미 모든 반의 정원이 다 찼다고 한다. 옻칠반과 천연염색반은 9월부터 하기로 했다. 또 영농반과 국악반이 추가될 지도 모른다. 점점 더 규모가 커질 판이다.


강의실은 따로 없다. 강사 작업실이 강의실이고, 지리산이 강의실이다.

초대 교장을 맡은 이창수씨는 ꡒ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단 한 명이라도 수강신청하면 개강한다ꡓ며 ꡒ지역주민과 귀농인이 합심해 지리산 문화가 확실히 뿌리를 내릴 때까지, 그리고 꽃 피울 때까지 기여하겠다ꡓ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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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입학식과 함께 강사진 소개를 하고 있다.

밀려서 온 사람들이 아닌, 지리산을 선택해서 온 사람들이 지리산 문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뭉쳤다. 어떤 문화의 모습을 보여줄 지 사뭇 기대된다. 토착민들과의 보이지 않는 간극을 여하히 조정하고 좁혀나가는 것도 그들의 과제다. 지켜볼 일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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