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국립공원 자락 피거산(375m)에 가면 엄청나게 많은 돌탑들이 있다. 한국 최고의 돌탑을 가진 산이다. 그 돌탑들을 누가, 어떻게 쌓았으며, 무슨 사연을 갖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돌탑들이 산마다 다 있는 것도 아니다.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이 한 개씩 쌓아 조잡한 돌탑도 있고, 정성들여 쌓아 무슨 거창한 조각 이상의 모양을 갖춘 것도 있다.
돌탑뿐만 아니라 산세로도 유명한 전북 마이산의 돌탑은 약 120기다. 피거산 돌탑은 대략 300기다. 크기와 규모면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다. 피거산 돌탑은 한 사람의 힘과 노력에 의해 세워졌다. 이 돌탑은 금속공예가인 홍익대 조치원캠퍼스 조형학부 고승관(66) 전 교수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번 가본 사람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승관 교수가 왜 돌탑을 쌓았을까?
계기는 없다. 서울서 살기 힘들어 파묻혀 살고 싶어서 내려온 게 계기라면 계기다. 인근 산에는 돌이 너무 많았다. 다들 쓸데없다고 버리는 돌도 분명 쓰일 곳이 있을 것이라 고민하다 탑을 쌓게 됐다고 한다.
1차 목표는 500기다. 500개가 가리키는 의미는 예수의 12제자나 공자의 72제자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500 나한상을 의미한다. 피거산은 지금 전국의 명소가 됐다. 돌탑을 보기 위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도원성 탑골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사람들은 미쳤다는 말을 수없이 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썼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고 교수가 자신이 쌓은 돌탑을 둘러보고 있다.
고 교수는 돌탑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관련 있다고 했다. 돌탑이 한국의 문화적 정서를 가리키며, 돌탑을 보면 숙연해진다는 것이다. 돌은 마을의 수호신이었고, 전쟁이 나면 바로 무기로 사용됐다.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마을마다 성황당에 돌을 쌓아두는 것도 그 일환이다. 성황당의 느티나무는 촌로들의 쉼터인 동시에 전쟁 준비하는 곳이기도 했다. 농군이라는 말을 풀면 바로 알 수 있다. 농사를 지으니 농민이고, 유사시엔 전쟁에 나가야 되는 군인이 돼야 하는 사람, 즉 농민과 군인의 1인2역이 바로 농군이라는 게 고 교수의 설명이다.
고 교수는 시골에 내려와 뜻밖의 횡재도 했다. 전혀 상관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지만 22년 전인 87년 사 둔 그 산, 그 땅이 지금 100여배 정도 올라 금액을 환산할 수도 없을 정도가 됐다. 17만6,200㎡의 땅이 100배 정도 올랐으면 가격이 어느 정도 나갈까? 세속적인 기준으로, 아니 인간적인 기준으로 상상만 해도 부러워진다. 고 교수는 단호히 말했다. “올라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 팔지도 않을 것인데 돈 계산은 왜 하나”
지금은 봉사 인생을 살 고 있다. 여름마다 어린이 미술 무료 강습을 매년 실시했다. 물감과 크레파스를 주고, 음악을 들으며 느낀 것을 그리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우기 위한 행사를 자비를 들여 했다. 대학생 10여명의 아르바이트비용까지 1,000만 원 이상 들었다. 순전히 베풀고 싶어서 했다. 겨울에는 정월 대보름 남북통일 기원 탑돌이 행사를 가진다. 3.5㎝ 둘레의 초를 4,000개를 산 입구에서부터 약 1㎞ 되는 거리에 돌탑과 거리 곳곳에 꽂아두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이 4,000개의 초는 4천만 민족의 남북통일의 염원을 한반도의 중부에서 활활 태우는 것이다.
고 교수는 의미심장한 말로 맺었다. “왜 탑을 쌓는지 모른다. 왜 내가 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내가 그 이유를 알 때까지 탑을 쌓겠다. 아마 죽기 전까지 쌓겠다는 거겠지. 또 설사 그 세계를 모른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쌓는 그 자체가 중요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