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등산이란 말에 익숙해있지만 전통적이고 광의의 어법으로는 입산이었다. 이 입산의 개념도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냥 단순히 산에 놀러갈 때도 사용하기도 하지만 한때는 중이 되기 위해 절에 들어갈 때도 ‘입산했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과거엔 사람(人)이 산(山)에 들어가는 행위를 신선놀음, 또는 신선이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사람과 산을 합친 신선 선(仙)자를 썼다. 그만큼 산에 들어가는 행위 자체를 높고 숭고하게 평가했다. 반면 산에 가지만 신선이 된 사람과 비교해서 계곡이나 골짜기에서 노는 사람을 속인이라 했다. 그래서 사람(人)과 계곡(谷)과 합쳐져 속(俗)이 된 것이다. 신선과 속인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사람들이 산을 어떤 자세로 대하느냐와도 관련 있지 않을까 싶다.
이같이 우리의 전통과 사상은 산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언어에서도 간단히 살펴볼 수 있다.
입산도 조선시대 들어선 유산(遊山)의 개념이 강했다. 그 이전까지는 산은 숭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올라갈 수 없었다. 물론 땔감을 구한다던지, 먹을거리를 채취하기 위해서 산에 갔겠지만 다른 이유로 산에 올라간 기록이 없다. 조선시대 들어선 선비들의 유산기를 여기저기 볼 수 있다. 전부 하인을 데리고 가마를 타고 올랐다는 기록이다. 일종의 산행기이거나 자연예찬론 일색이다.
요즘은 원체 등산인구가 많아져 누구나 산에 입산하고 있다. 산도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언제부터인지 등산에도 등급이 생겼다. 바둑은 18급부터이지만 등산은 그만큼 세분화된 건 아니고 8급부터다. 조금 우스개 섞인 얘기지만 곰곰 되새겨보면 족집게 같이 정확히 표현했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등산 다니는 사람들이’난 어디에 속할까’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져보자.
8급 타의입산
이 급수는 바둑과 마찬가지로 초보 입문 수준으로 의무감보다는 남이 하니까 한다는 ‘남 따라 장에 가는’ 부류의 등산객들이다.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야될 상황이 되면 은근히 하늘을 쳐다보며 ‘하필 이럴 때는 왜 비가 오지 않나’ 하며 마음속으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7급 증명입산
이 부류도 산을 좋아해서 찾는다기보다는 경치 좋으면 어느 곳이던 상관없이 퍼지고 앉아 즐기며 사진 찍기 좋아하는 등산객들이다. 일종의 ‘심심풀이 땅콩’으로 산에 가는 부류다. 그래도 이들은 산에서 찍은 사진을 증명으로 내보이며 ‘어느 산에 다 가봤다’며 자랑거리로 삼는다.
6급 섭생입산
산에 가서 먹어야 제대로 음식맛이 있다고 주장하는 부류다. 배낭 가득히 먹거리를 채워 계곡 주변에서 먹는 전형적인 ‘금강산도 식후경’ 또는 ‘다 먹자고 하는 짓’이라 주장하는 등산객들이다.
5급 중도입산
산행을 하긴 하되 꼭 중도에 하산하는 부류다. ‘이 만큼 왔으면 됐지 꼭 정상까지 올라가야 하나’ 투덜거리며 ‘정상은 왜 이리 높지’라며 힘들다고 포기하는 형태다.
4급 화초입산
이 부류는 내내 집에 있다가 꽃이 피거나 단풍이 들 때 꼭 산을 찾는다. 춘삼월 진달래, 철쭉 계절이나 가을 단풍 때 빠지지 않고 본인의 의지에 의해 산을 찾는 부류다. 점차 산과 가까워지는 단계다.
3급 음주입산
본인의 의지에 의해 정상까지 오르는 것까지 좋았지만 내려갈 때 그냥 갈 수 없다며 꼭 하산주를 찾는 부류다. 산을 찾는 이유가 성취감 뒤에 따르는 하산주 때문일 경우가 많다. 하산주 종류도 ‘주종불문’이다. 술 이면 다 좋다.
2급 선수입산
산을 무슨 마라톤 코스로 생각하고 줄곧 내달리는 부류다. 하루 산을 몇 개 넘었다 던지, 몇 ㎞ 달렸다는 사실을 무용담 같이 늘어놓으며 주변에 자랑거리로 삼는다. 같이 가는 사람들은 대개 피곤해하기 때문에 혼자 가거나 끼리끼리 모이는 유유상종형이다.
1급 무시입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제사가 있으나 아이가 아프거나 상관없이 자기가 계획한 산행은 꼭 하는 부류를 말한다. 엄청난 호우에 산행계획을 취소하려고 하면 “넌 비 오면 밥 안 먹냐?”며 되물으며 강행한다. 산을 좀 알아서 주변을 피곤하게 하는 부류다.
1단 면벽입산
수도하러 면벽하는 게 아니라 암벽 타러 산에 가는 부류다. 이쯤 되면 알피니스트에 입문했다고 주장해도 주변에서 어느 정도 인정해준다. ‘산에 모든 게 있다’며 책과도 담쌓을 정도다. 일반인들과 서서히 대화가 구분되기 시작하는 단계다.
2단 면빙입산
면벽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날씨가 추워지기만을 학수고대하는 부류다. 평소에도 얼음도끼와 쇠발톱을 가지고 찍는 연습과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할 날을 기다라며 쳐다보는 상태다. 빙판길에 가족이 넘어져도 ‘겨울은 추워야 제격’이라며 ‘그래야 빙벽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산에 미쳐가는 단계다.
3단 합계입산
빙벽까지 끝내면 ‘산을 조금 더 알 수 있는 방법이 뭐 있을까’며 산서적을 뒤진다던지 외국원서를 쳐다보며 번역한다고 머리를 쮜어뜯는 단계다.
4단 설산입산
드디어 더 높은 산, 더 험한 산을 찾아 히말라야로 떠나는 단계다. ‘산이 곧 나요, 내가 곧 산이다’고 말하며 홀연히 목숨 걸고 떠난다.
5단 자아입산
산심을 깨닫고 진정으로 넘어야 할 산은 눈에 보이는 높은 산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단계다. 훨씬 더 높은 철학과 가치를 지닌 것 같이 보인다.
6단 회귀입산
산의 본질적 의미는 자신을 발견하는 데 있다는 철학을 깨닫고 다시 낮은 산으로 임하는 부류다. 엄청난 시간이 지난 뒤다.
7단 불문입산
한마디로 하면 ‘산 위에 산 없고, 산 밑에 산 없다’는 평등 산사상의 경지에 빠진 상태다. ‘산에 오르는 의미를 묻지 말고 스스로 깨달아라’며 선문답 같은 말을 해댄다. 일종의 입신이다.
8단 소산입산
작은 산도 엄청나게 크게 보는 안목이 생기는 단계다. 이 정도 되려면 신체연식도 이미 오래 돼서 곳곳에 고장이 생기며 작은 산에 갔다 와서 과거를 회상한다. ‘왜 그리 아등바등 살았을까’ 후회하곤 한다.
9단 입산금지
죽어 한 평도 안 돼는 봉분아래 묻혀있다. 진정 ‘산이 곧 나고, 내가 곧 산이다(山卽我, 我卽山)’인 단계다. ‘산은 산이다’는 ‘山是山’이다.
여우재
07.26,2009 at 9:43 오후
공감하며 웃음이 나는군요.
Hansa
07.27,2009 at 4:33 오후
오 그렇군요.. 하하
바람처럼
08.10,2009 at 12:10 오후
바둑에서도 1급에서 1단 되기가 참 어렵다고 하는데… 나이들면 산에서도 1단 따기가 참 어렵겠습니다. 1,2,3단 뛰어넘고 4단으로 가면 안될까요? 아주 높은데 말고 높은 산 주변이 눈에 어른거려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