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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현세(문경 관음리)와 미래(충주 미륵리)를 넘나드는 길


영남대로 이전의 길, 기록상 한반도 최고의 길인 하늘재 계립령길을 따라 걸었다. 충주 미륵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섰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미륵이 무슨 말인가?’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불교 용어로 미래, 내세의 의미 아닌가. 그럼 문경 관음리는? 현세불이다. 하늘재가 미래와 현세를 넘나드는 고갯길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절묘하게 지명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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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하늘재 길을 완전히 그늘로 덮었다.

미륵리는 미래의 동네란 의미, 즉 내세다. 지금은 볼품없고 초라한 관광지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내세의 동네로 불렸을 만큼 영화를 누렸음 직하다. 그 흔적은 500m쯤 올라가면 미륵리사지터에서 찾을 수 있다. 미륵사지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우뚝 선 불상이 보인다. 보물 제96호인 미륵석불입상이다. 높이가 무려 10.6m에 달한다. 석불은 부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양 엷은 미소를 띠며 북쪽을 향하고 있다. 한국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유일한 석불입상이다. ‘유일’하면 분명 뭔가 사연을 품고 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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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가다 시멘트 박석포장길이 나온다.

망국의 한을 품은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다 미륵리에 멈춰 내세를 기약했다. 그 내세는 신라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었다. 마의태자는 10년 동안 미륵석불입상을 세우고 세월을 기다렸다.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건립하고 미륵리의 석불입상과 마주보게 마애불(보물 406호)을 암벽에 새겼다. 마주보는 미륵석불입상과 마애불에 망국의 한을 담아 남매는 내세를 기약했다.


그러나 끝내 그 내세는 오지 않았다. 마의태자는 눈물을 머금은 채 금강산으로 떠났고, 덕주공주는 자신이 세운 덕주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마애불과 석불입상은 1,000년 가까운 세월동안 마주보며 신라 망국의 한을 담은 남매의 전설을 내세에 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고려 초에 세워진 석불입상은 북방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아 한반도 중앙에서 북쪽으로 향하게 했다는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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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미륵리에서 올라온 하늘재 끝이다. 길옆으로 울창한 숲이 드리워 한낮에도 밤 같은 분위기다.

김영기 문화해설가도 “한반도 최고의 옛길인 만큼 많은 전설을 간직하기 마련”이라며 “사실여부를 떠나 망국의 한과 북방통일은 별개의 관계인 듯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일맥상통하는 면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륵사지터(사적 제317호)엔 미륵리석불입상과 보물 제95호인 미륵리5층석탑, 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인 미륵리석등이 일렬로 배치된 것도 이채롭다. 이 외에도 3층석탑, 시 향토유적 제9호인 미륵리석두, 온달장군이 힘자랑하기 위해 가지고 놀았다는 직경 1m 정도 크기의 공기돌 바위 등 그 옛날 역사와 문화가 하늘재 주변에 널려있다. 온달장군에 대한 기록도 삼국사기에 나온다. 온달장군이 신라와의 전투에 출전하면서 ‘계립령과 죽령 북쪽은 원래 고구려 땅이니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각오를 밝힌 기록이다. 이곳에서 온달은 장렬히 전사했다. 그때가 서기 590년이다. 6세기 후반엔 완전히 신라의 영토가 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세, 즉 미륵리에서 출발한 계립령 하늘재길는 1시간쯤 지나면 재 너머 문경 관음리에 도착한다. 어찌된 일인가? 이렇게 차이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재를 경계로 마치 내세와 현세, 미래와 현재를 구분하듯 충주 미륵리 방면은 과거 옛길 그대로의 모습이고, 문경 관음리 쪽은 아스팔트 포장길이다. 전형적인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다. 어찌 이렇게 절묘하게 구분했을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실로 10여 년 전 문경시가 이 길을 개통하기 위해 관계부처에 민원을 넣고 했으나 결국 보존이 우세해 문경까지만 도로포장 한 것이다.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충주 방향 하늘재는 2008년 12월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제49호로 지정됐다. 아쉽지만 어디에도 그런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아직 없다. 지자체의 무심함과 명승관리의 소홀이 빚은 합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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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 경계에 있는 이정표.

문경에서 충주로 넘는 자체가 내세로 가는 길이다. 그 내세는 남에서 북으로 진군하는 북방통일과 신라의 부흥을 꾀했던 그 옛날 꿈이 마치 아직 유효한 것 같이 보였다.

하늘재를 경계로 서쪽으로는 탄항산, 동쪽으로 포암산이 펼쳐져 백두대간를 잇고 있다. 이곳은 신체로 보자면 백두대간의 배꼽부분이다. 백두대간 종주하는 등산객들이 필히 거쳐야 하는 능선길이다.

마침 설악산에서부터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등산객 성변춘(41)씨를 만났다. 오늘(7월8일)이 20일째라고 했다. 겉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눈빛만큼은 초롱초롱 빛났다. 아니 살아 있었다. 산에서 야성을 찾아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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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쪽에 있는 하늘재 유허비.

“어떻게 백두대간 종주를 하게 됐나요.”

“백두대간 종주하는 사람은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죠.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주하면서 만난 사람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으며, 그 사람과 잠시 얘기를 나눠보면 갖가지 아픈 사연을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어떤 계기가 있어 종주하고 있습니다.”

“무슨 계기죠?”

“특별히 얘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

느낌에 굉장히 아픈 사연 같았다. 괜히 더 물으면 언짢을 것 같아 그 정도로 끝냈다.

“무사히 종주 잘 하라”는 말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무언가 꼭 맞아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현세와 미래를 넘나드는 하늘재가 간직하고 있는 그 수많은 사연만큼이나 오고간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하늘재를 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픈 사연을 품고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치 한편의 드라마가 주마등 같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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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항석 입구에 있는 하늘재 비석.

그렇다, 역사는 한편의 드라마다. 모든 계층과 모든 시대와 모든 전설과 찬란한 불교문화를 아우르는 하늘재야말로 무궁무진한 우리의 역사다. 그 하늘재길을 뒤로 하고 다시 내세의 길에서 꿈을 깨고 미륵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정말 현세와 미래를 갔다 온 듯한 꿈같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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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비석에 새겨진 설명.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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