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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겸 CM송 작곡가 김도향씨 “등산은 명상의 극치 순간 맛보는 것”


히트곡 몇 곡 없는 인기가수, 독특한 창법의 소유자, 한국 CM송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가요계의 수염도사 김도향(金道鄕, 63). 요즘 한창 뜨고 있는 개그계의 만능 달인 김병만과 비교하면 그는 ‘대중을 휘어잡는 달인’쯤 되지 않을까 싶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다시 20대 못지않은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70년 ‘투 코리안스’란 듀엣으로 ‘벽오동 심은 뜻은’이란 노래로 가요계를 한바탕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후 70년대 중반 잠적하다시피 가요계를 훌쩍 떠났다. 그러다 잊을 만하면 다시 나타나 그의 노래를 대중들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시켜놓곤 다시 사라지는 생활을 반복했다. 70년 데뷔, 80년 ‘바보처럼 살았군요’ 발표 후 뜸하다가 94년 듀엣앨범 ‘향수’를 발표하고, 3년 전 2005년엔 그의 싱글 2집 앨범 ‘브레스(Breath)’를 발표했으니 말이다. 내년이면 햇수로 가요계 데뷔 40년인데도 그의 싱글 앨범은 2집뿐이다. 그런데 그는 “가요계 데뷔이후 한번도 음악에 손놓은 적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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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세대 가수 김도향씨가 6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 데뷔 이래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인왕산 백사실 숲가는 언저리에서 북한산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았다.

어디서, 뭘 했는지, 대중들의 신비감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혹시 이 신비감이 그가 대중의 사랑을 받게 만드는 전략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가 데뷔하기 전부터의 이력과 데뷔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 쭉 살펴보자.


그는 경기고를 나왔다. 그의 나이 때의 경기고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 경쟁하던 시절이다. 당연히 부모님이 그에 거는 기대도 높았지만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뜻은 거역할 수 없는 일. 부모님이 원하는 학교에 원서를 냈다. 기대도 안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낙방했다. 그의 중학교 때부터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바로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선택했다.


“경기고 나오고 서라벌예대 들어가면 사람 취급도 안하는 시절 얘기죠. 전부 미친놈이라 했습니다. 아마 내가 외아들이라 그런지 선택을 내 마음대로 하는 그런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마음수련 한다고 수염 기르고 한복입고 돌아다닐 때도 주위에서 미친놈이라 했지만 내가 재미있으니 했어요. 재미없으면 못하죠. 학교도 재미를 느껴서 계속 다녔죠.”


영화감독 김도향, 그는 그 꿈을 향해서 달렸다. 그러나 영화감독은 그에게 쉽게 다가서지 않았다. 군 제대 후 충무로에 입성정도가 아니고 그냥 들어갔다. 조감독 수업을 받으며 빗자루 드는 것까지 마다않고 열심히 했지만 월급은커녕 차비도 없었다. 도대체 생활이 안됐다. 생활고를 견디기 힘들어 나이트클럽, 야간무대 가수 오디션을 보니 전부 오라고 했다. 무대에 설 배짱은 두둑했다. 이른바 ‘끼’는 스스로 생각해도 넘쳤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한 중간단계로 생각하고 열심히 노래 부르며 돈을 모았다. 가수가 그의 평생 직업이 되리라곤 꿈에조차 생각 못했고, 또한 안했다.


그러나 현재 잘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몰두하는 게 운명의 제1 법칙이다. 독특한 캐릭터로 드라마에도 잠시 출연하는 등 밤무대 가수활동과 병행하던 중, 군악대에서 같이 근무하던 친구가 찾아와 TV에 출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듀엣으로 데뷔하자고 뜻을 모았다. ‘벽오동 심은 뜻은’이란 곡을 받아 일주일 정도 합숙 연습했다. 데뷔 날짜가 잡혔다. 정확히 1970년 9월1일,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었다.

벽오동 심은 뜻은 / 봉황을 보잤더니 (중략) 하늘아 무너져라 / 와뜨뜨뜨뜨~ / 잔별아 무너져라 / 와뜨뜨뜨뜨~ (후략)


첫 방송이 나간 그날부터 세상이 난리가 났다.

“한마디로 충격이었죠. 엉뚱한 놈이 나와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것 같았어요. 그 전까지의 노래는 옥구슬 같은 달콤한 목소리에, 감정을 한층 올리는 분위기가 주류였죠. 벽오동이란 노래가 주는 엄청난 볼륨을 대중들이 처음 접했고, 이들에게 폭발적으로 다가간 거죠.”


눈을 떤 다음날 그는 유명가수가 돼 있었다. 정말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 것이다. 모든 매체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방송 스케줄이 휴식취할 틈조차 없이 짜여졌다. 그렇게 그는 졸지에 가수가 됐다. 그것도 노래 한곡으로 가요계를 휩쓴 초대형 가수, 김도향이었다. 그의 꿈, 영화감독 김도향은 더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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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세대 가수 이정선, 한대수 등과 자리를 함께 했다.

그는 듀엣 투코리안스로 ‘젊었다’ ‘언덕에 올라’ 등을 발표하면서 7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다. 그의 지론은 ‘재미있으면서 하고 싶은 것 한다’이다. 70년대 중반 그는 광고음악, 즉 CM송에 관심을 갖게 된다. 75년 광고회사를 차려 본격 CM송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중장년층 귀에 익은 ‘줄줄이 사탕’ ‘써니텐’ ‘오 예스’ 등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져 가요 이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0여년 남짓 만든 CM송이 3000여곡이나 달한다.

광고음악 하는 와중에도 대중가요적 영감을 받으면 곡을 만들어 세상에 선보이곤 했다. 80년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그 때 만들어진 곡이다. 이 노래를 히트시켜 다시 한번 가요시장을 흔들었다. 그리곤 조용히 광고음악으로 복귀했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산다는 게 뭔가’라는 인간 본질적 의문에 빠졌다. 누구나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대부분 지나치는 화두를 그는 끝내 버리지 않았다. 이후 그는 20년 가까이 전국의 산을 누볐다. 물론 그의 말대로 음악엔 손을 떼지 않았다. CM송을 계속 만들며 ‘산다는 게 뭐냐’란 화두를 찾아 산으로 방황했다.


그의 눈에 태교음악, 명상음악이 들어왔다. 100억 되는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정성을 다해 제작했다. 호평을 받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엄청난 빚뿐이었다. 광고음악해서 번 수십억 다 날리고 빚만 고스란히 수십억이나 안겨줬다. 좋은 아이들이 좋은 음악을 듣고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어차피 돈 벌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부담이 됐다. 그 빚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다. 그에게 삶에 대한 화두의 일부가 미래의 세대들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준다는 책임감으로 돌아왔고, 그 책임감은 그의 인생에 부채만 지운 셈이었다.


‘산다는 게 뭐냐’라는 화두를 찾아 전국의 산을 누비며 나름대로 결론을 찾았다.

“도 닦는다고 한 20년 헤맸어요. 중간에 광고음악은 계속했지만 결론을 내자면 ‘어디서든지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면 되는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돌이켜보면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면 되는데 괜히 산에 갔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의 노래만큼이나 호탕하게 웃은 뒤) 하지만 덕분에 산을 좋아하게 됐죠. 젊었을 땐 내려갈 걸 왜 올라가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산에 가기 위해서 건강해야겠다고 느끼죠. 산에 다녀서 건강한 게 아니고, 산에 가기 위해서 말이죠.”


‘왜 산에 갔느냐’라는 본질적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 입산한 지 20여년. 그는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이상의, 그만의 세계를 이미 구축하고 있는 듯했다.

“산은 그냥 어머니 같은 존재죠. 산에 가 있으면 어머니 품속같이 편안합니다. 아마 그 편안함 때문에 사람들이 산을 찾지 않나 싶어요. 사람들이 그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엄홍길 같은 산악인이 8,000m 이상 고지에, 마지막 산소도 없는 희박한 상태를 알면서도 또 찾는 이유는 그 상태가 명상의 세계이기 때문이죠. 힘들어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명상의 극치와 통하죠. 그 명상의 극치를 맛보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간다고 봅니다. 그 정신세계를 맛보기 위해 목숨을 걸만도 하죠. 에베레스트와 같은 고산엔 가보지 않았지만 팔부 능선 넘어 숨이 까닥까닥할 때 극도의 명상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수 시간 지속된다면 최고의 명상의 순간을 맛볼 수 있다고 봅니다. 왜 가는지, 왜 좋은지 모르면서 계속 하는 게 바로 명상이죠.”


그의 말엔 산에 가는 이유와 산이 주는 의미를 한꺼번에 담고 있었다. 명상음악에 기꺼이 수십억 날린 사람답게 명상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그의 생활 속의 등산에 대한 의견은 계속 됐다. “원래는 사는 게 등산입니다. 굴곡 있는 생활은 고통도, 기쁨도 동시에 줍니다. 바로 산에 가면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죠. 그런데 세속은 잡음거리가 많으니, 명상 상태를 놓치게 됩니다. 산에 가면 잡음도 없어 육체적으로 명상상태에 쉽게 도달할 수 있죠.”


그가 광고음악과 명상 세계에 빠져 있다 대중 곁으로 다시 돌아온 것도 사소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어쩌면 그의 명상음악과 저술 작업을 접으라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7년 전쯤 제주도 치매노인 요양원 공연에 누군가 예고도 없이 펑크를 냈다. 그를 잘 아는 선배가 전화로 긴급 참석 부탁을 했다. 준비한 노래도 없어 거절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참석했다. 그가 딱 나서는 순간 수년 동안 말도 못하고 누워만 지내던 할머니가 “김도향이다”라고 소리치며 앉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동도 받고 반성도 하며 많이 울었다. ‘노래의 역할이 이렇게 큰 부분이 있구나’라고 느끼며 연습도 많이 하고 2집 앨범도 발표하며 20여년 산 공부와 명상세계를 뒤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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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창렬이 프로듀싱한 2집 앨범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50대 후반에 가요계에 컴백한 그는 데뷔한 이래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열린음악회, 가요큰잔치와 같은 큰 무대에도 나가고, 시트콤에 카메오로 깜짝 출연하여 극의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작년엔 드라마에 1년가량 나갔고, 수시로 공연도 하고 있다. 또한 그의 말대로 산에 가기 위해 그의 집에서 성수대교까지 하루 10㎞를 꼬박 걸어 건강을 다진다.

왕성한 활동 못지않게 젊은 가수들과 음악적 교류도 활발히 한다. 2집 싱글 앨범 브레스를가수 김창렬이 프로듀싱 했다. 이 앨범을 위해 3년 간 매일 4시간 이상 발성연습 했다. 요즘 가요 트렌드를 따라가기 쉽지 않지만 그 나름대로 열심히 젊은 가수들의 음악적 감각을 익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프로가 아니다. 아니 이미 프로의 세계를 뛰어넘었는지 모른다. 그는 우리 가요계 프로 1세대로 서태지를 꼽는다. 자기관리, 매니지먼트, 음악 등 프로 감각이 물씬 풍긴다고 말했다. 서태지 이후 가요계가 기업화 되면서 프로화 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낭만 세대다. 낭만은 진솔한 감정과 정서를 공유한다. 음악을 만들 때도 진솔했고, 책을 썰 때도 그의 감정이 흐르는 대로 솔직했다. 방송할 때도 가식 없이 그대로 보여줬다. 이런 모습이 대중을 사로잡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산은 항상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람에게 다가와서 보여준다. 진솔하게 명상의 시간을 가지라고. 그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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