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WP_Widget에서 호출한 생성자 함수는 4.3.0 버전부터 폐지예정입니다. 대신
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고인돌과 질마재따라 100리길…고창엔 맛과 멋 다 있다. - 마운틴
고인돌과 질마재따라 100리길…고창엔 맛과 멋 다 있다.

고창엔 유명인사와 명소, 맛집 등이 너무 많다.

가장 아름다운 시어를 썼다는 미당 서정주 선생은 그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할 정도로 서해바다에서 질마재로 넘어오는 코끝 찡한 바람이 부는 고창을 사랑했고, 지난 2000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인돌 고분군이 있는 곳도 고창이다. 또 지난 9월 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선운산도 여기 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특유의 맛을 내는 풍천장어로도 유명하다. 그 외에도 판소리 신재효 선생의 생가, 고창읍성, 인촌 김성수 선생과 LG 창업주의 묘지, 복분자 등 고창의 명물들은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자랑거리들이다.

-SANY0023.JPG

고창 고인돌 고분군이다. 지천으로 널려 있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길이 있다. 방법으로서의 길이 아니라 실제로의 길이다. 단절된 옛길을 ‘고인돌과 질마재 따라 100리길’로 연결시켰다. 전체 길이가 무려 43.7㎞에 달한다. 길이 긴 만큼 유적과 볼거리, 먹을거리도 가득하다. 제1코스는 고인돌박물관~생태습지~원평마을까지 8.8㎞에 이르는 ‘세계문화유산 고인돌길’이다. 2코스는 원평마을~연기마을까지 7.7㎞구간의 ‘인천강 풍천장어와 복분자길’이다. 3코스는 연기마을~검당소금전시관까지 14.5㎞거리의 ‘시와 차와 국화꽃이 있는 질마재길’이다. 4코스는 검당소금전시관~선운산관광안내소까지 12.7㎞ 거리의 ‘천오백년 화염(火鹽)의 역사가 살아있는 선운산 보은길’이다. 전부 수 백 년 이상 된 옛길이다.

-SANY0033.JPG

고인돌 고분군을 지나면 잘 정돈된 길이 계속 나온다.

어느 길로 먼저 돌아도 상관없다. 각 길마다 고유의 특색을 지닌 길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고창읍에서 가장 가까운 고인돌박물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고인돌박물관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어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했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로서 수천 년 전 청동기 시대의 사람 무덤이다. 고창 죽림리 일대는 ‘고인돌 떼무덤’일 정도다. 죽림리 매산마을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윗덩이는 전부 고인돌이다. 고창군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의 정확한 숫자는 현재 대략 85곳에 2,000기 이상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바둑판형인 남방식, 탁자형인 북방식 등 그 형태도 다양하다. 각 고인돌마다 각각의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었다.

-SANY0041.JPG

그림같은 생태습지연못이다.

인근 지동마을 외딴 집에 있는 고인돌은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로, 미국의 고인돌 전문가가 와서 감탄하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인돌”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가보니 교과서에서 본 아름답고 제단 같은 그 고인돌이었다. 매산마을의 고인돌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라 하루 종일 살펴봐도 다 못 볼 것 같았다. 그래도 갈 길이 있으니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SANY0043.JPG

생태습지연못 설명.

오베이골로 넘어가는 매산재를 넘었다. 재 넘어 운곡마을 사람들이 닥나무를 재배해서 고창읍에 내다팔기 위해 한지를 지고 넘나들었다는 고개다. 매산재를 서낭재, 쥐겁재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낭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있었다고 불렀을 법하지만 쥐겁재는 또 뭘까?

동행한 김동식(60) 문화관광해설가는 “지금 고인돌 박물관이 있는 자리가 과거엔 더 넓은 평야라 아마 쥐들이 많았을 것 같다. 사람들이 고개를 넘으면 그 소리에 쥐들이 겁을 내 소란스럽게 울어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여겨진다”고 했다. 김동식 해설가는 30년간 교직생활을 하다 지난 해 교장으로 퇴직한 분이다. 8년간의 교장생활을 명퇴로 그만두고 문화해설가와 숲해설 겸 등산안내인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교직생활 할 때보다 더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보람 있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한다.

-SANY0050.JPG

복분자밭

“오베이골은 오방곡의 전라도 사투리로서, 다섯 방향으로 고개를 넘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베이재(운곡~아산), 백운재(운곡~부안 사창), 행정재(운곡~고창 송암), 쥐겁재(운곡~고창고인돌), 해암골(운곡~신림 해암)로 빠져나가는 오거리 역할을 한 골짜기지요. 지금은 지난 81년 운곡댐이 생긴 이래 사람들 통행이 뜸해졌어요.”

-SANY0073.JPG

아름다운 숲길도 나온다.

옛날 오베이골 사람들이 한지를 팔러 장에 다닌 길로 걷고 있다. 작은 돌길로 만든 걷기 좋은 길이다. 조금 더 가니 흙길이다. 맨발로 걸으면 더 좋겠다. 외국인들이 조깅하러 자주 찾는다고 했다. 1구간 8.8㎞를 왕복하더라도 4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다.

갑자기 눈앞에 그림 같은 연못이 떡하니 나타났다. 생태습지연못이다. 운곡댐이 생긴 이래 30여 년간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아 물이 고여 좋은 습지를 형성했다. 환경부에서 생태조사를 나와 습지보존지구로 지정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SANY0086.JPG

숲이 끝나면 인천강이 나오고, 강따라 길따라 가다 정자에서 쉬어갈 수 있다.

수양버들과 연꽃, 습지식물이 붉나무, 얼음나무, 참나무와 적절히 조화를 이뤄 향긋한 숲냄새가 코를 찌른다. 숲 향기를 가장 크게 내는 나무가 비목이라 한다. 비목잎을 잘라 비벼서 코에 갖다 댔다. ‘아하, 이 향기였구나!’ 숲속에 나는 그 냄새보다 더 진하다. 비목나무가 눈에 자주 띄었다.

-SANY0091.JPG

강둑길은 코스모스가 만발하다. 지금은 다 없어졌겠지만.

이젠 수많은 실향민을 만든 운곡댐이다. 운곡, 용계리 158세대가 운곡댐으로 고향을 떠났다. 운곡마을은 원래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예로부터 심산유곡이라 마을 주변이 봉우리로 둘러싸여 아침, 저녁으로 안개가 덮여 운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청정 골짜기에 수질 좋고 공기 맑아, 영광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용수로 쓰기 위해 운곡댐을 만들었다.

-SANY0095.JPG

인천강 옆으로 나무데크로 길을 만들었다.

수 백 명의 실향민들 만든 운곡댐은 두루미 등 새들의 낙원으로 변해 있었다. 실향민들은 가슴 아프겠지만 175만㎡(53만평)의 면적을 자연에 양보했다고 하면 어떨까?

적적한 운곡마을엔 수백 년 된 보호수가 1세대만 남은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보호수에서 250m 동쪽으로 올라가면 동양에서 제일 큰 고인돌이 나온다. 가로 세로 약 5m 크기에 무게는 300t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이곳 주변에는 수백 년 전부터 닥나무를 재배해 7개의 한지공장에서 생산한 한지를 쥐겁재을 통해 내다팔았으나 수몰이후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다. 흔적만이라도 남겨 유산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SANY0110.JPG

소금 팔기 위해 넘나들었다는 질마재. 서정주가 말한 바로 그 고개다. 바다바람을 바로 만날수 있는 길이다.

운곡서원과 운곡샘을 지나 망향정에 다다랐다. 운곡, 용계리 주민 수백 명이 실향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지난 87년 지은 정자와 비석이 있다. 여기서부터 734번 군도로 잠시 연결된다. 운곡저수지 끝 지점에 있는 원평마을이 1코스 마지막이다.

2코스는 고창의 대표적 먹거리인 인천강 풍천장어와 복분자길이다. 서해바다로 흘러가는 인천강 따라 걷는 길이다. 고창의 수많은 역사를 담고 흐르는 인천강은 고창의 대표적인 참게, 가물치 등 민물어종이 풍부하여 왜가리, 백로, 두루미, 청둥오리 등 다양한 철새들이 날아든다.

-SANY0117.JPG

서정주 생가를 복원했다.

인천강의 대표적인 어종인 풍천장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역에서 잡히는 장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풍천이란 고유지명은 안동지방에 있다. 일부 풍수가들은 동출서류한 인천강이 선운산을 앞에 두고 다시 서출동류로 역류해 서해 북쪽 바다로 흘러드는 명당수인 인천강에서만 잡히는 장어를 풍천장어라고 주장한다.

이 길을 따라가면 복분자 공장들도 몇 곳 눈에 띈다. 고창에서 생산되는 복분자 관련 상품이 전국시장의 약 30~40%가량 점유하고 있다고 했다. 복분자 공장을 지나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산초등학교가 나온다. 폐교 직전인지 ‘폐교 반대’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일부에서는 수련관이나 펜션 등으로 활용하기 위해 찬성한다고 한다. 자리는 좋아 보였다.

-SANY0118.JPG

서정주 문학관이다. 주변엔 국화가 지천으로 널려 장관을 이룬다.

아산초등학교 뒤를 지나 인천강 강둑길로 따라가다 보면 풍수가들이 금반옥호(金盤玉壺)와 선인취와(仙人醉臥)라고 주장하는 명당을 만나게 된다. 신선이 말을 타고 내려와 금반옥호에 술상을 차려놓고 예쁜 옥녀와 술을 마시다 취해 술병을 엎어놓고 누워있는 형국이란다. 명당인지 아닌지 비전문가는 봐도 잘 모르지만 풍수가들이 그렇다고 전하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다. 실제 이 부근에 인촌 김성수 선생과 LG 창업주의 묘지가 있다.

강둑길을 지나 산과 접해 있는 인천강 옆은 나무데크로 길을 만들어 탐방객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했다. 게가 눈에 언듯언듯 보였다. 산길인지 강길인지, 바닷길인지 분간이 안됐다. 영락없이 ‘게가 산으로 가는’ 형국이다. 산에서 게를 보는 드문 지역이다. 이곳 마을이름도 연기마을이다. 연기처럼 사라지고 신출귀몰하는 대사가 있어 이름 붙여졌다고 전한다. ‘신출귀몰한 연기마을의 산에서 게를 보는’ 묘한 분위기다. 연기마을이 2코스 끝이고 3코스 시작지점이다.

-SANY0124.JPG

고창에서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 인천강 너머 선운산 들머리에 있는 연천마을 끝머리에 있다.

2코스에서 바로 선운산 방향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3코스인 질마재를 지나칠 수 없다. 바로 미당 서정주의 생가와 시문학관이 있는 곳이고, 가을에 수만 송이의 국화꽃이 만발하는 그 질마재 아닌가.

질마재는 고개 모양이 ‘길마(수레를 끌 때 말이나 소 등에 안장같이 얹는 도구로, ’질마‘는 구개음화 안 된 상태)’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질마재는 수천 년 동안 이 지역 사람들이 정읍이나 장성으로 소금을 팔러 나갈 때 이용하던 길이다. 동시에 미당이 서울로 길을 떠날 때 넘었던 고갯길이다.

소요산 소요사를 지나쳐 질마재에 올라섰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휙 하니 불어왔다. 저 멀리 변산반도를 마주보며 바닷가에 더 넓게 형성된 갯벌이 보였다. 바다와 접한 고창은 전형적 만(灣)의 형태다.

그 바닷바람으로 시적 영감을 얻은 미당은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겼다. 시문학관에 둘러 그의 작품을 죽 둘러봤다. 문학관 계단 올라가는 벽엔 특이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세계의 산 그림들이다. 웬 산 그림인지 궁금했다. 실제로 미당은 말기에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세계의 유명 산 이름과 높이를 줄줄 외웠다고 한다. 주변에 있는 국화는 9월말, 10월초라 아직 계절이 이른지 꽃봉오리조차 보여주질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발길을 돌렸다.

-SANY0126.JPG

파릇파릇한 녹차밭.

동행한 김동식 해설가는 “고창은 겨울과 초봄엔 선운사 동백, 여름 해수욕장과 복분자, 초가을 꽃무릇(상사화), 늦가을 국화와 단풍, 계절 상관없는 고인돌 등 사계절 내내 즐기고 볼거리가 풍성한 지역”이라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거기에 풍천장어까지 있다고 강조했다.

민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좌치나루터에 도착했다. 백로, 두루미, 왜가리 등이 날갯짓을 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풍경이다. 그러나 나루터에 있어야 할 뱃사공은 없고 나룻배 한 척만 덩그러니 있다. 한때 고창 서부와 영광 법성포 사람들이 넘나들던 교통의 요충지였으나 22번 국도가 확포장 되면서 승용차가 늘고, 급기야 1995년 영선교 다리가 건설되면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80년대까지 주변에 주막이 있었으며, 미당, 인촌 등과 시인묵객들이 자주 애용했다고 한다. 시대에 밀려난 처량한 모습이다. 이것도 우리의 사라지는 옛길이다. 정취 있게 되살아난 좌치나루터를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SANY0150.JPG

선운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선운사와 선운계곡 경관.

마지막 코스인 천오백년 화염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선운산 길이다. 1,400여년 전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할 즈음 선운산 계곡에 많은 도적들이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고 한다. 검단선사가 이들을 제압하고 불로 소금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후 도적들은 양민으로 개과천선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고, 이들이 검단선사의 은혜를 못 잊어 매년 보은염을 부처님께 공양했다. 그 보은염을 부처님께 공양하러 가던 길이, 지금 걷는 이 길이다.

선운산 들머리인 연천마을에 있는 느티나무는 고창에서 가장 크고 오래됐다. 나무 밑동만 하더라도 성인 10명이 둘러쌀 정도의 둘레다. 이곳부터 산길로 이어진다. 곧이어 참당암녹차밭이 나왔다. 희미한 안개가 서린 듯한 녹차밭과 반짝이는 녹차잎이 잘 어울려 운치를 자아냈다. 연화봉, 소리봉, 낙조대를 거쳐 병풍바위에 이르렀다. 저 아래 도솔암과 바위틈에 있는 듯한 도솔천내원궁, 도솔암마애불, 도솔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SANY0198.JPG

선운사 대웅전 바로 앞에 기묘한 나무가 있다. 이름은 들었는데 잊었다. 아시는 분 가르쳐 주세요.

지난 9월말 국가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선운산이다. 맞은 편 거대한 암벽엔 마애석불이 바라보고 있다. 20m는 족히 될 듯싶었다. 주위엔 울창한 숲이다. 단풍 시즌이 되면 정말 온 산을 뻘겋게 물들일 것 같았다. 도솔암을 거쳐 선운사로 내려왔다. 선운사 뒤쪽 500년 이상 된 동백나무는 천연기념물이다. 꽃은 없어도 그 규모가 장관이다. 꽃이 없을 때도 이 정도인데, 만발했을 때 과연 어느 정도일까? 꼭 다시 한번 찾을 것을 유혹하는 듯했다.

선운사에는 3가지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동백나무와 관광단지로 조금 내려가면 나오는 장사송, 그리고 관관단지 바로 옆에 있는 송악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에 버금가는 나무가 또 있다. 바로 꽃무릇나무, 일명 상사화다. 잎과 꽃이 절대로 같이 피지 않아 서로 상상만 한다고 해서 상사화라 붙여졌다.

선운사에서 관광단지로 내려가는 길은 은행나무와 왕벚꽃나무, 꽃무릇이 지천에 늘렸다. 다양한 수종에 이름모를 야생화도 더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길이 또 있을까 싶다.

-SANY0177.JPG

선운사에서 하산길. 아름다운 숲길이다.

걷는 행위는 목적이 아닌 그 과정 자체에 몰입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예찬>에서 ‘정신적인 시련은 걷기라는 육체적 시련을 통해 치료할 수 있다’고 극찬했다. 그는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다 손을 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길을 다듬어간다”고 했다.

고창의 구불구불한 옛길은 시대를 거듭나, 고인돌을 말하고, 복분자를 말하고, 질마재를 말하고, 선운산을 말하며 고창의 내면을 다듬어 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4 Comments

  1. 김동진

    11.24,2009 at 1:28 오후

    혹시 배롱나무 아닌가요?   

  2. 푸른하늘

    11.24,2009 at 3:10 오후

    간지름 나무(경험해본 사람만 아는 이름)-나무 가지를 손가락으로 간지름 태우면 나무가 흔들리기 시작해서~~    

  3. 박정원

    11.24,2009 at 4:02 오후

    배롱나무 맞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고 백일홍이라고 한다 그러네요. 백일홍이라 하면 우리가 흔히 듣던 이름이죠. 근데 백일홍은 초본도 있고, 목본도 있다 합니다. 꽃은 초본이 조금 더 오래간다고 김동식 교장 선생님의 설명이네요.    

  4. 데레사

    11.25,2009 at 4:24 오전

    고창엔 선운사밖에 못 가봤거든요. 그것도 가을에 딱 한번.
    소개해 주신곳 내년 봄쯤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