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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다산 첫 유배지는 강진 주막… ‘사의재’서 술로 시름 달래다 마음 다잡은 곳 - 마운틴
다산 첫 유배지는 강진 주막… ‘사의재’서 술로 시름 달래다 마음 다잡은 곳

다산초당을 지나 백련사로 가는 길은 야생녹차밭, 대나무숲, 사스래나무 등이 등산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 이 길은 녹차와 대나무 등으로 인해 사철 내내 푸를 것 같았다. 야생녹차는 이미 관목으로 자리 잡은 숲의 터줏대감이었다.

드디어 1962년 12월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림에 도착했다. 3㏊이상 달하는 동백나무는 300~500년 이상 된 것들로, 일일이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었다. 1,500여 그루에 이르는 동백나무들은 갖가지 모양을 띠고 있었다. 미끈하게 잘 생긴 동백부터 울퉁불퉁한 동백까지 동백나무의 모든 부분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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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내려가는 길은 동백나무가 가로수로 늘어서 있다.

또 다른 장면을 만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다산이 다산초당에 오기 전 8년 동안 지냈던 세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 강진읍으로 간다. 옛날엔 다산초당에서 만덕산을 거쳐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강진읍 주막으로,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갔겠지만 1900년대 일제가 탐진강 갯벌을 매립한 이후 강둑길이 생기고 신작로가 개통됨으로서 산은 잘려 나갔다. 매립한 땅은 농토로 변했고 둑을 막아 강물의 범람을 막았다. 그 강둑길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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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자주 들러 혜장 스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백련사 전경.

탐진강 하류는 썰물 때는 남해 바다물이 둑 상단에까지 물이 찰 정도로 들어오지만 밀물 때는 수만㏊의 개벌이 형성돼, 철새들의 낙원으로 변했다.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와 청둥오리, 재두루미들이 저마다 무리지어 날갯짓을 하며 눈길을 끌었다. 정작 눈길을 주면 놀래서 날아갔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니 그림보다 더 한가롭고, 고즈넉하며 아름다운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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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강 갯벌의 철새도래지.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장흥 천관산 방향이다.

이 갯벌이 강진읍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백합과 대합, 꼬막, 키조개, 망둥어, 바지락, 갯지렁이 등 각종 어패류들의 서식지이다. 이들이 무한 서식하고 있으니 철새들이 매년 풍부한 먹잇감을 찾아 이곳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다.

강둑길은 2㎞가량 된다. 이 길을 걸으며 찬바람이 온몸을 움츠리게 했지만 겨울의 정취는 맘껏 느낄 수 있다. 둑방길 끝자락에는 대규모 갈대밭이 산들거려 겨울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조금 전까지 만끽했던 다산과 백련사와 동백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탐진강의 갯벌과 겨울철새, 그리고 강둑길과 갈대, 찬바람이 주는 색다른 감동이 다가왔다. 자연이 주는 무한 감동의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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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들이 매년 풍부한 먹잇감을 찾아 이곳에 온다.

이젠 강진읍이다. 주택으로 인해 아직 정비되지 않은 길도 있었지만 다산수련원 윤영선 위원 등이 50m 단위로 화살표나 다산유배길 이정표를 꼬박꼬박 붙여 안내하고 있었다. 강진읍에서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곳이 다산이 1년 남짓 기거했던 제자 이학래의 집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표시도 못하고 있다. 읍내의 한 폐가터에 제자 이학래의 집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동행한 윤영선 운영위원이 전했다. 다소 무미건조한 읍내길이지만 다산의 흔적을 찾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되새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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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첫 유배지인 주막집. 강진군청에서 새로 단장했다.

새로 단장한 초가집이 객들을 맞았다. 사의재 주막집이다. 과거 같으면 영락없는 주막 같아 보였다. 이곳이 바로 다산이 유배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다. 오갈 데 없는 다산을 받아들여 한국 최고의 사상가로 거듭나게 한 주모의 집이기도 하다. 주모는 다산에게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시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전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 주모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멸문지화 당하고 귀양 온 관리를 모두 후환이 두려워 문전박대하는 현실에서 무얼 보고 그를 받아들였는지 궁금했다. 한편의 영화 소재감이다. 아마 몇 년 후에 고증을 거쳐 ‘다산을 키운 주모’나 ‘다산의 주모’란 제목의 영화가 나올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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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집에 사의재란 간판이 걸려 있다.

주막 뒤채엔 ‘사의재’란 간판이 걸려 있다. 유배 초기 술로서 시름을 달래다가 주모의 닦달로 곧바로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거처를 사의재라 하고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한 곳이다.

사의(四宜)는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를 말한다. 어쩌면 상심과 시련을 겪은 사람만이 알고 쓸 수 있는 그런 교훈이다. 다산 역시도 얼마나 상심이 컸겠는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사의재였다. 다산은 나중에 “내가 강진에 귀양 오기를 잘 했다. 여기 오지 않았다면 어찌 사회 모순과 병리를 다 볼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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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 바로 위 탐진강 하류에는 갈대들이 군락을 이뤄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강진의 다산유배지 네 곳 중에 세 곳을 거쳤다. 이젠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만 남았다. 백련사 주지로 있던 혜장스님이 다산을 보은산방으로 초청한 곳이다. 강진읍 뒷산인 보은산 등산로로 올랐다. 평일인데도 강진 주민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보은산 등산로 따라 가다가 정상 우두령 가는 길과 고성사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당연히 고성사 가는 방향이다. 발길을 조금 옮기니 남녀 공용 샤워장이 나왔다. 남자들이야 시도 때도 없이 이용하겠지만 더운 여름날 오전엔 일정시간을 정해 여자들만 이용한다고 했다. 물론 망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무척 궁금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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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을 지나 보은산 가는 길에’모란이 피기까지’의 시인 김영랑 생가가 있다.

강진읍은 풍수적으로 황소가 누워있는 ‘와우(臥牛)’ 형국이라고 한다. 강진엔 실제로 소와 관련된 얘기가 많다. 보은산 정상인 우두령이 소의 머리에 해당된다. 소의 목에는 방울이 걸려 울리는데, 이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고민하다 보은산 중턱에 고성사를 지었다고 한다. 고성사에서 울리는 범종이 소의 목에 있는 워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풍수는 이렇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실제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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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 생가에 들어가서 주변을 담았다.

고성사는 원래 조그만 암자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중건을 거듭해서 대웅전을 포함한 구색을 다 갖췄다. 대웅전과 칠성각을 건너 보은산방이 있다. 지금은 스님들의 요사(寮舍)로 사용했다. 다산이 1년 가까이 묶으면서 학문의 깊이를 다지면서, 한편으로는 혜장법사와 학문적 교류도 활발히 했던 그 곳이다. 여기서도 다산의 체취가 진하게 다가왔다. 마치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조선시대 강진으로 유배 간 사람은 정약용을 포함 총 90여명이었다. 강진에서 생가를 복원하고 그의 뜻을 기리는 사람은 단 한사람, 다산 정약용뿐이다. 그의 위대한 사상은 이미 상당히 연구되고 있지만 그의 불굴의 정신도 또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하산길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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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사가 있는 보은산 가는 입구에 탱자로 이뤄긴 담벼락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 명의 위대한 사상가를 사심 없이 돌 본 고마운 주모와 그녀의 딸, 강진 6제자와 초당 18제자가 머리 속에 맴돌고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다산이 있지 않을까? 다산은 지금도 그들과 함께 다산유배길에서 숨 쉬고 있다. 그 숨소리를 들어보려면 다산유배길로 가보라. 그의 불굴의 정신과 실학사상에 대한 집념의 맥박이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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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산 고성사. 다산이 두번째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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