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또 하나의 고려(高麗)’라는 다큐멘터리를 몇 년 전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적이 있다.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자, 이에 굴복하지 않고 따로 국가를 조직해서 몽고에 항거하며 장렬히 전사한 우리 민족 최초의 자주적 저항운동을 벌인 삼별초의 활약을 조명한 내용이었다. 삼별초라고 하면 강화도에서 40년 가까이 저항한 사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진도에서 웬 또 하나의 고려일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굵고 짧게’ 활약한 그들의 흔적을 용장산성의 길, 즉 삼별초의 길을 따라 살펴보면서 장렬하게 산화한 삼별초의 삶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삼별초의 출발은 무인정권의 산물이다. 고려 조정을 장악한 최충헌과 그의 아들 최우는 무인정권 세력을 공고히 다지고 반대파들을 색출하기 위해 수도의 치안유지란 명분으로 창설한 군사조직이자 특수부대가 바로 삼별초였다. 처음엔 야별초란 이름으로 야간순찰과 같은 공적인 임무를 동시에 수행했다.
야별초가 지방에도 파견되면서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좌․우별초로 나뉘었다. 여기에 몽고군에 포로로 끌려갔다 도망 온 자들로 신의군이 구성되면서 이들과 합쳐 삼별초라 부르게 됐다. 삼별초의 출신 성분부터 몽고에 저항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무인정권의 각별한 배려 속에 삼별초 조직은 더욱 커졌고, 이들의 무인정권에 대한 충성심도 남달랐다.
삼별초는 무인정권 3대에 걸쳐 전성기를 누렸다. 삼별초를 창설한 최충헌과 그의 아들 최우, 또 그의 아들 최항, 이렇게 3대 동안 무인정권의 권력유지를 위한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했다. 3대째 최항으로 인해 이후 삼별초가 진도에 근거지를 마련하는 결정적 단초가 된다.
진도에 있는배중손 장군을 모신 사당.
고려 원종11년(1270) 6월1일,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대몽항쟁을 포기하고 항복을 선언하는 순간, 삼별초는 반 개경정부, 반 몽고 노선을 표방하고 거사에 나섰다. 어쩌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저항이었는지 모른다. 나라는 몽고에 넘어갔고, 그들을 보호해 줄 무인정권도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종결은 결국 그들의 주요 임무가 사라지는 것과 같고, 강화에서 항몽전쟁을 주도한 그들은 항복 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짐작 가능케 했다.
결국 그들은 샴별초 해산 조치에 맞서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새 정부를 수립했다. 배중손, 노영희 등이 삼별초 군대와 재물을 1,000여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게 1270년 6월3일의 일이다. 두 달 남짓 걸려 진도에 도착한 시점이 8월 19일. 진도는 그들의 새로운 거점이 되었다.
용장산성터엔 왕궁터가 거의 복원되었고,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궁궐로 복원할 계획이다.
<고려사> ‘반역 배중손전’에 삼별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배중손이 야별초 지유(脂諭) 노영희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고는,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외치기를 “몽고 군사가 크게 이르러 주민을 마구 죽여 대니, 무릇 나라에 힘이 되고자 하는 이는 모두 격구장으로 모이라”고 했다. 잠깐 동안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들었는데, 혹은 달아나거나 사방으로 흩어졌고, 다투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배중손은 고려 정부에서 보자면 반역이었다. 몽고에 항복을 거역하고 정부에 저항한 잔당세력인 셈이다. 배중손의 입장에서 보자면 삼별초의 살길은 저항뿐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우리민족 자주와 자존이라는 명분으로 외세에 저항하다 목숨을 버리는 길이 가장 실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고려 조정의 반역 배중손 장군은 그렇게 진도에 새로운 세력을 구축했다.
삼별초가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선택한 몇 가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제주도와 같이 본토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되었다.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거점을 정해 지속적으로 세력을 과시해야만 했다. 동시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지리적 위치에 있어야 했다. 본토와 진도를 사이에 둔 명랑해협, 즉 울돌목은 조류의 유속이 시속 11㎞로 동양에서 가장 빠른 곳으로 꼽힌다. 오죽했으면 조류의 흐르는 소리가 노루가 우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노루목이라고도 불렸다. 이순신 장군이 배 13척으로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 왜군의 배 수십 척을 무찌른 ‘3대 대첩’의 그곳이기도 하다. 해전에 약한 몽고군이 이곳을 통해 침입하지 못할 것이란 심리적 전술도 작용했다.
용장산성도 일단 700m를 복원한 상태다.
둘째, 진도는 <동국여지승람>에서 옥주(沃州)로 기록할 정도로 비옥한 농토와 넓은 평야가 있어 섬인데도 농업이 활발했다. 또한 해산물도 풍부했다. 이는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서 장기간 항전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연안해상교통의 요충지로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에서 거둬진 조곡의 수송선이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조곡선을 탈취하면서 삼별초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개경 정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이중효과를 거둘 수 있는 지역이었다.
용장산성 정상에서 본 진도앞바다. 이순신 장군이 명랑대첩을 거둔 곳이기도 한 이곳은 물살이 빨라 울돌목이라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진도는 원래 무인정권의 기반이기도 했다. 최씨 무인정권의 3대 집정인 최충헌의 손자이자, 최우의 아들인 최항이 승려로 출가해서 주지로 있던 절이 진도에 있었다. 최항이 승려가 되어 만전이란 법명으로,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권세를 누리며 횡포를 자행했다. 주민들 원성이 너무 자자해서 조정에서 만전이 있는 절을 해체하라고 명할 정도였다. 절 이름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아마 용장사일 가능성이 높고, 그 용장사의 규모가 방대해서 삼별초군이 진도로 내려갔을 때 그 절을 진지로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서는 삼별초가 진도에 있었던 불과 1년도 채 안되는 기간에 그렇게 큰 용장산성을 축성하기는 시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별초는 결과적으로 무인정권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던 그런 군대였다.
용장산성은 성안의 면적이 총 89만㎡(258만 평)이고, 둘레는 총12.85㎞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들은 급속히 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나주, 전주, 장흥, 마산, 김해, 동래, 밀양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11월3일엔 제주를 함락시켰다. 가는 곳마다 백성의 호응을 받으며 쉽게 지지를 이끌어냈다.
무인정권을 보위하는 무력집단으로 출발했고, 농민봉기를 억압하는 데 앞장섰던 그들이 어떻게 농민과 지방세력들의 지지를 쉽게 이끌어냈는가에 대한 의문점도 남는다. 그들의 성향 자체만으로 볼 때 결코 농민들의 지지를 받을 세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리 나왔다. 추측컨대 몽고에 대한 반감이 삼별초의 기존 활동에 대한 반감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감과 자주성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역사학자들의 정확한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진도 삼별초 왕온의 묘지.
삼별초는 왕온을 황제로 옹립하고 몽고, 즉 원에 복속된 고려의 개경 정부보다 더 자주적인 정부임을 표방했다. 이것은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불과 수십 년 전에 일본에서 발견한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는 당시 일본 조정에서 작성한 메모에 가까운 외교문서로, ‘고려에서 보내온 의심나는 몇 가지 사항’으로 해석할 수 있다. 1268년과 1271년에 고려에서 온 두 개의 외교문서가 정반대의 내용을 적고 있다고 전한다. 1268년 개경정부에서 보낸 문서는 일본도 원나라에 항복해서 예를 갖추고, 그렇지 않을 땐 정벌에 나설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한다. 반면 1271년의 경우 고려가 강화도를 버리고 진도로 천도했으며, 원나라, 즉 몽고가 일본을 침략하려고 하니 사전에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병력을 진도로 지원해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게 바로 ‘진도, 또 하나의 고려’라고 하는 주요 근거가 되는 대목이다.